# 66
예정된 이별
"도착했어요."
12층. 한창 업무를 봐 주고 있는 사이에 나를 버리고 하유진을 키우던 여성 진들이 찾아왔다.
정확히는 한 명씩 돌아가면서 나를 도왔고, 오늘은 남은주와 일을 하고 있었기에 자리를 비운 세 명의 여성 진과 하유진이 찾아온 것.
마지막 남은 미노타우로스만을 남겨놓고 있다고 한다.
"…드디어?"
20층에 도착하기까지 한 달 이상 걸렸다. 한 층을 오르는 데 거의 3~4일꼴.
다른 파티들이 보기에는 미친 속도지만, 우리는 이미 20층에 도착한 이들에 하유진 하나 추가한 것뿐이다.
뭐, 우리도 랜덤 조건인 통로 때문에 애먹었었으니 나쁜 속도라고 볼 수는 없었다. 재수가 없으면 다음 층까지 오르기가 더럽게 오래 걸리니까. 그 때문에 15층에서는 한바다 파티에게 한 번 역전도 당했었고. 그에 비하면 이번에는 무난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1회차에서도 잘 안하던 작업을 하고 있다 보니, 그 한 달마저도 너무 길게 느껴졌다.
나는 최근 한 달간 거의 업무, 신전, 업무, 신전을 반복하는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신전도 그나마 있는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다녀올 정도. 사실 쉬는 시간도 안 주려는 것을 업무만 하면 몸이 녹슨다는 핑계로 내가 받아낸 거였다.
여성 진들의 도움과 본인의 엄청난 재능 덕분인지, 층을 올라가면서도 하유진은 미친 듯한 성장세를 보였다.
레벨은 우리에 비해 부족할 수밖에 없지만, 능력치는 그 부족한 레벨에 걸맞지 않은 수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부족했던 근력과 체력을 이 기회에 채우고 있었다.
이제는 20을 바라보는 수준. 한 달 새 이정도면 말이 되지 않는다. 남은주는 어느새 바짝 뒤쫓아오는 하유진을 바라보면서, 저것도 재능충임을 깨닫고 최근 그나마 살아났던 기가 다시금 팍 죽어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전투도 저렙 인간 말고는 다 싸워봤던 이들이라 그 가팔랐던 성장세도 많이 죽은 상태.
그래도 잠재력도 올랐고 탑의 축복으로 스킬 슬롯과 업적까지 얻었으니, 다시 한번 흐름을 탄다면 더 빠르게 성장할 여지가 남아있었다.
덕분에 내가 계획했던 남은주 밑바닥 계획은 좀 미뤄진 상태다.
이대로 남은주가 꾸준히 탑의 사랑을 계속 받는다면, 어쩌면 정말, 정말 희귀한 케이스중 하나인 밑바닥부터 올라간 1군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랭커는… 아무래도…. 밑바닥부터 시작해 랭커가 되었다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그냥 환경이 거지같았던 경우지, 본인의 재능은 충분히 받쳐주는 케이스다.
생각해보라. 랭커들의 평균 초기 스킬 슬롯의 개수는 8~9개. 애초에 초기 스킬 슬롯 자체가 재능의 증명이니, 그 정도 스킬 슬롯을 지닌 이가 재능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뭐, 스킬 슬롯 3개로 시작해 4개로 늘었으니, 앞으로도 늘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다. 이후로는 이전 같은, 미노타우로스, 그것도 환영 하나 혼자 잡았다고 스킬 슬롯을 늘려주지는 않을 테니까.
남은주가 20층 보스를 혼자 잡으면 어쩌면 하나 더 늘릴지도 모르지만….
'그걸 기다릴 시간은 없지.'
능력치도, 기술도 부족하다. 애초에 20층 미노타우로스의 스펙은 혼자서 상대하라고 만들어진 수준이 아니다.
괜히 30명 가까운 인원이 떼거지로 덤비는 것이 아니다.
나라면 가능하고, 남은주의 예가 있어서 한 번 쉬는 시간에 신전을 가는 대신 20층으로 이동해 미노타우로스 솔로 레이드를 해 보기는 했었다. 공격력의 한계가 있고, 최대한 안전하게 싸우는 바람에 3시간 가까이 걸리긴 했지만 레이드 자체는 성공했다. 그래 봤자 아무것도 주지 않았지만.
애초에 내 현재 신체 잠재력이나 스킬 슬롯 개수는 랭커와 비벼도 되려 우수한 수준이다 보니 그런 듯했다. 스킬 슬롯 개수. 이건 탑의 축복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그걸 제외해도 대마도사와 같은 수이며, 그마저도 슬롯 취급을 해 포함한다면 나서윤과 동률이다. 게다가 신체 잠재력도 전설급 영약 덕에 성장했는데, 1회차 능력치도 일부 계승해 현재 신체 능력치는 내가 최고. 즉, 나는 탑 전체에서 봤을 때 1등일 가능성이 한없이 높았다.
그래서 아마 업적 평가도 짜겠지. 탑이 좋아하는 노력이나 사선을 건너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할 수 있는 일을 무난하게 한 것에 불과하니까. 내가 남은주처럼 처절하게 노력한 것도 아니고. 애초에 노력할 시간에 다른 애들을 키우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만. 지금 내 노력은 레벨 때문에 지나치게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어지간한 업적은 업적 취급도 되지 않는다는 거다.
조금 억울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20층의 보스, 미노타우로스만 잡으면 돼요. 우리끼리 잡는 것도 될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안전한 것이 최고니까요."
"왜, 은주처럼 업적을 위해 덤벼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텐데요?"
나는 최근 남은주와 말을 놓았다. 남은주는 사적으로는 나를 신후 오빠라 불렀고, 공적으로는 여전히 파티장 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제 파티 내에서 내가 말을 놓지 않은 유일한 사람은 주하연이었다. 실제로 놓을 생각도 없었고.
그편이 주하연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좋았다. 주하연은 파티 내에서 2인자를 맡아주고 있었으니까.
"…그건 좀…."
곤란하다는 표정의 주하연. 솔직히 나 없이도 잡을 수는 있을 거다. 물론 남은주 마냥 1:1은 절대 안 돼고.
그건 나서윤도 안 된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그런 무리한 일을 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있으니까.
"유진이는 많이 컷습니까?"
"…네. 다행히 상당히 성장을 잘 해줘서…. 사실상 서윤이 수준의 성장 속도라고 느껴져요. 아니, 전체적으로 그 아이를 위해 행동한 만큼 서윤이 이상의 성장 속도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나서윤 이상. 이제부터 천천히 속도가 줄어들긴 할 테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그런 표현을 들었다는 것 자체가 하유진의 잠재력을 짐작할 수 있게 만들었다.
"무기는…."
"곧잘 다루고는 있답니다. 무기술 관련 스킬은 없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단검을 곧잘 다룬답니다. 엄청 열심히 하고 있어요."
스킬은 꼭 구입이나 카드를 얻어야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몇몇 기술은 굳이 사지 않더라도 자주 쓰는 거라면 스킬 슬롯에 등록해 효율을 높이고 탑의 보조를 받을 수도 있었다.
검술 또한 꾸준한 연습으로 획득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있기는 했고. 하지만 솔직히 매우 비추천하는 방식이다.
스킬, 특히 검술과 같은 스킬은 구입을 제외하면 행동 등으로 스킬 등록이 사실상 힘들다.
무기술 만큼은 신전을 통하는 것이 좋았다. 스킬 레벨이 오르고 등급이 오를수록 몸이 체득하고 시스템으로부터 전해지는 기술들이 어지간한 검술서 뺨을 갈길 수준이라, 무기술 만큼은 신전을 통하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 만약 구입을 하지 않았다면 이처럼 훌륭한 검술 지식을 탑으로 받지 못한다. 스스로 만들어야 하니까.
하층에 가면 하유진에게 가장 먼저 배우게 만들어야 할 기술이 바로 단검술같은 무기술이다. 하루라도 빨리 배워서 성장시키는 것이 수련자에게 유리했다.
"그러면 이제 저희 벗어나는 건가요? 신후 오빠?"
"그래. 그럴 것 같다."
나는 기뻐하는 남은주를 내버려 둔 채 곧바로 한바다를 찾아갔다.
"무슨 일이시죠?"
"전 이제 곧 미궁을 벗어날 예정입니다."
이제 업무는 안 한다.
나는 당당하게 선언했다.
"…당신이 틀어쥐고 있는 저 관리자 권한은 어쩌실 생각인가요?"
별게 다 걱정이다. 그건 그냥 남는다.
"어차피 제가 죽으면 서브 관리자인 당신께 권한이 넘어갑니다. 죽지 않는다면 더 상관없겠죠. 지금처럼만 운영하시면 되니까요."
끄덕.
그건 그렇다는 듯이 한바다가 말했다.
"그럼… 이제 헤어지는군요."
그랬다. 아마 년 단위로 볼 일이 없겠지.
그녀는 이곳을 관리하며 시간을 보낼 테고, 미궁의 사회가 무너지기까지는 수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내가 길을 잘 닦아 놓은 만큼 2~3년 정도 걸릴 거라고 생각한다 .
몬스터 정보도 뿌렸고, 사냥의 방해는커녕 적극적인 장려와 도움까지 제공한다.
연합 차원에서 실력이 부족한 이들에게는 따로 도우미까지 붙여 사냥의 위험마저 줄였다.
이전에 재능 없는 이들이 6개월 걸릴 한 층 공략을 3~4개월이면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개인적으로 그녀에게 여러 충고도 해주었다.
"제가 했던 말들을 기억 합니까?"
"…그 잔소리들 말이군요. 물론이죠."
"안정도 잘 되고 때가 되었다 싶으면 적당히 나오세요. 밖에서의 성장은 약속대로 제가 준비합니다. 마법사들도 그때 데리고 나오시구요."
마법사들은 진짜 거의 마지막에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제가 드린 아이템은 되도록 빨리 쓰시는 것이 좋습니다. 근력은 마력으로 어느 정도 대치 가능하니까요. 제가 써 본 바로는 금방 성장합니다. 벌써 절반은 복구했어요. 그리고 이제 성장이 슬슬 정체되어 가시는데, 신전을 이용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알겠으니 그만하셔도 됩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만큼 고생하시니 말이죠. 너무 걱정은 마세요. 잘 될 겁니다."
나는 그녀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마중을 가고 싶네요. 이윤형과 조연은을 불러 두었습니다. 20층으로 가시죠."
바쁜 와중이지만, 내가 가는 거다. 그녀는 갑작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시간을 비워 주었다.
20층. 한바다 파티가 관전하는 와중 우리는 20층의 보스를 향해 한 발자국씩 접근했다.
그런 내 옆에는 어느덧 능력치가 폭풍 성장한 하유진이 함께했다.
딜러겸 탱커 역도 하는 나와 함께, 전방의 딜러를 담당한다고 한다.
'벌써?'
부족할 것이 걱정되긴 했지만, 그래도 공헌도를 생각하면 방치는 곤란하다.
키퍼는 남은주가 봐 주고 있었고. 그래도 만약을 위해 전방에서 최대한 날뛸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이미 클리어한 인원인 만큼, 단순한 방치는 독이 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미노타우로스와의 전투는 이전처럼 제법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하지만 의외로 시간을 조금은 단축할 수 있었다.
푸쉭-
"무어어어!"
하유진은 보스 몬스터의 주변을 은밀하게 돌아다니며 시선을 피하고, 은신과 조용한 발걸음을 이용,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급습, 급소를 공격하고는 다시금 빠지는, 전형적인 히트 앤 런 전법을 사용했다.
그런데 어그로를 끄는 대상이 나고, 자신은 스킬과 특성을 정확히 이용했기에 생각 이상의 데미지를 뽑아낼 수 있었다. 조금이나마 시간을 단축한 일행들은, 여전히 폭풍 성장 중인 하유진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대견하다며.
나도 내심 제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허투루 배우지는 않은 듯했다.
벌써부터 전력이 되겠다고 나설 줄이야… 미래를 보고 뽑은 인재가 사실은 현재에도 꽤나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놀랍기는 했다. 그래도 서윤이의 전례가 있는 만큼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았는데, 스스로가 상당히 노력한 듯했다.
나는 전투가 끝나고 나자, 나서윤에게 자주 그러는 것처럼 하유진의 머리 또한 가볍게 쓰다듬었다.
내게 잘했냐고 물으려던 아이는, 내 행동에 기쁜 듯 환한 웃음을 지었다. 사실상 칭찬이니까.
"그 아이가 이번에 영입했던… 그 수준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러게요. 저도 오랜만에 봤는데 놀랍군요."
한바다의 경탄. 나조차 놀랐을 정도니 그녀는 오죽할까.
하유진은 내게 들러붙은 채 살짝 쑥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곧 나서윤에 의해 떨어져 21층 입장 자격을 얻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끌려갔다. 혹시 모른다며 내가 지시했다. 일행은 일정 이상 공헌도가 없으면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확인은 시켰다.
다행히 미궁 탈출 자격은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과거에는 레이드에 참가했지만, 탈출은 안 되는 이들도 있었다 보니, 노파심에 시킨 것이었다. 별문제는 없었다. 무사히 전원, 탈출 자격을 확보하는 것에 성공했다.
우리의 파티와 한바다 파티는 21층의 입구에 서서 서로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그럼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킥. 그래요. 저도 곧 따라 갈게요."
끄덕.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한바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간 감사했어요.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이렇게 목표까지 이뤘네요."
"별말씀을."
나는 뒤돈 상태로 대답했다.
"정말 감사해요. 위층에서 기다려요. 당신의 부탁을 제대로 완수해서, 위로 올라갈 테니까."
"기대하죠."
더 있었다간 이야기가 길어질 판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미궁을 탈출하시겠습니까? Y/N]
나는 망설이지 않고 Y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