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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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앞에 내 실력을 토대로 신전이 정해준 '나와 비슷한' 존재가 눈앞에 나타났다.
나타난 존재는 내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는 존재였다.
내 눈앞에 나타난 존재는 무려 '오거'였다. 그것도 나무 몽둥이까지 쥔 채로 등장했다.
"…미친!?"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오거. 일반 오거만 해도 근력이 최소 70은 되는 괴물 같은 존재.
신전, 아니 탑은 그런 존재를 '나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던져 준 거다.
내 능력치는 평균이 50이 채 안 된다.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현재 능력치로 오거를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탑은 이길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는 거다.
최근 성장을 하고는 있다. 육체 자체의 잠재력도 올랐고, 레벨도 17을 달성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균형을 맞추려면 중층은 가야 한다.
그때까지는 느려도 꾸준히 성장한다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 상황.
일행을 키우고 파티 내의 영향력을 유지할 목적만 아니었다면 한동안 여기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한바다 파티도 있었으니 더더욱 신전에서 지낼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 상대가 오거? 이게 말이 되는가? 한 대만 맞아도 빈사다.
"우어어어!"
의미 없는 괴성을 지르며 내게 달려오는 오거.
덩치가 5m는 가뿐히 넘고 미노타우로스 이상의 근육질인 몸뚱이. 게다가 별명이 '숲의 폭군' 답게 속도도 예상 이상으로 빠르다. 아니, 애초에 키가 5m인 시점에서 느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기민하다. 절대 둔한 몬스터가 아니다.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거리에 나는 자연스럽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애초에 여기서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
그리고 '탑'은 저게 내 상대로 충분하다고, 아니 내 현재에 격이 맞는 상대라고 판단했다.
즉, 내게 승산이 없는 것은 아닐 터. 나는 달려오는 오거를 향해 마주 달려나갔다. 동시에 오랜만에 마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흐읍!"
오거는 내가 역으로 달려들자 가소롭다는 듯이 손에 쥔 나무 몽둥이를 휘둘렀다.
나는 나를 향해 날아오는 나무 몽둥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빠르다. 그런데 그리 빨라 보이지는 않다.
순식간에 다가오는 무기. 나는 타이밍에 맞춰 몸을 강하게 비틀었다
콰아아앙!
어마어마한 파괴음. 역시 오거 답게 무시무시한 힘이다.
바닥이 갈라졌다. 그러나 나는 그 나무 몽둥이에 맞지 않았다.
몸을 비틀어 몽둥이를 피하자마자 역으로 몽둥이 위로 올라가 땅을 박찼다.
"크아아!"
그리고는 나무 몽둥이를 디딤돌 삼아 오거의 무릎으로 크게 뛰어올랐다.
오거는 뒤늦게 반응하려 했다. 오거는 둔한 몬스터가 아니다. 높은 수준의 민첩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내 타이밍이 훨씬 좋았다.
나는 가뿐이 무릎 위로 착지했고, 오거는 뒤늦게 무릎을 털었다.
좋은 타이밍. 나는 무릎을 터는 순간 오금을 향해 검을 휘둘렀고, 마력이 깃든 검은 손쉽게 오거의 가죽을 파고들었다.
푹!
자세히 보면 내 검에는 옅은 푸른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검기.
검이 오거의 가죽을 가를 수 있었던 이유였다. 아무리 마력이 깃들었다고 해도, 검기가 없었다면 무기는 튕겨 나갔으리라.
"끄아아아아!"
오거는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향해 남은 손을 휘둘러왔다. 날 손에 잡으려는 듯했다.
난 내게 다가오는 손을 오거의 허벅지까지 밟고 올라가 피해냈다. 동시에 내 발아래로 지나가는 손을 향해 검을 휘둘러 손가락 하나마저 베어버렸고, 오거의 고통에 찬 비명은 더욱 커졌다.
몸이 생각 이상으로 가벼웠다. 내 몸이 내 몸 같지가 않았다. 내 몸인데도 생소한 감각이다.
나는 몸을 비트는 오거를 피해 다리에서 뛰어내렸다.
그러자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오거는 발을 굴러 나를 짓밟으려 들었다.
훙, 쾅! 훙, 콰아앙!
커다란 소리가 울리고 바닥에는 먼지가 자욱이 피어난다.
그러나 내가 다치는 일은 없었다.
신체 능력은 분명 오거가 더 뛰어나다. 그러나 전투를 주도하는 것은 나였다.
사실 싸우면서 느낀 거지만 그럴 만 했다 싶었다.
한 대만 맞아도 빈사다. 웃긴 말이지만 그렇다면 안 맞으면 된다.
나는 오거와 싸운 적이 많았고, 그들의 행동 패턴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내게 큰 무기가 되어주었다.
단순한 오거를 농락하듯 나는 디디는 발의 아킬레스건을 차례로 끊어주었고 무릎 꿇은 오거의 나머지 오금을 베어버렸으며, 거기서 끝내지 않고 척추 쪽의 허리 근육과 기립근을 하나씩 베어버렸다.
아래로부터 천천히 올라오는 상처들. 오거는 천천히 무너져갔고, 마침내.
쿵.
오거는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다.
자연스러운 검의 연계. 스스로도 놀랐다. 내가 오거를 잡았다고? 지금 몸뚱이로? 스킬도 사실상 하나인데?
힐과 정화는 보조 스킬이지 전투 중에 쓰기는 힘든 스킬들이다.
"이게 뭐야…."
현재 내 몸으로도 오거를 잡는다고? 말이 되는가?
신전, 아니 탑은 내 소프트웨어까지 고려해 상대를 골랐다. 그럼에도 일방적인 승리. 나는 내 상상보다 훨씬 강했다. 자신의 강함을 제대로 모르는 것은 일행뿐만이 아니었던 거다.
잠재력이 증가한 육신은 마력 효율을 미친 듯이 높여 주었고,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자유로운 움직임을 선사했다.
그리고 거기에 1회차의 경험이 더해지자 말이 되지 않는 전과가 생겼다.
이정도면 업적 하나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이곳은 환상. 그런 것은 없었다.
오거를 쓰러뜨리자 나는 어느새 환상을 빠져나와 있었고 눈앞에는 메시지 창 하나가 덩그러니 떠올라 있었다.
[승리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보상은 그냥 음식 몇 개. 경험치도, 능력치도 오르지 않았다. 지금 레벨에 오거를 잡았는데도 보상이 음식 몇 개라니…. 정말 효율 하나는 거지 같다. 아니, 지금의 나에게는 나쁘지 않을지도. 몇 번 하면 능력치가 오르고, 그게 여기서 사냥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내 예상이지만 과거 2대 권왕이 열 번 해서 능력치가 하나 올랐다면 난 두세 번이면 능력치 하나가 오를 거다. 효율이 나빠도 상대가 상대인 만큼,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고난의 신전에서 수련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층과 중층에서 챙길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여기에 처박혀야 한다는 말인가. 육체 잠재력도 대폭 상승했으니 당장 필요한 것은 레벨이다.
나는 애써 시선을 돌려 주변을 확인했다. 나보다 빨리 나온 사람은 없었다. 다들 한참 환상과 싸우고 있겠지.
나는 방금 전의 전투를 떠올리며 명상에 젖어 들었다. 더 좋은 움직임은 없었을까. 나는 명상을 하며 방금 전의 전투를 분석했다.
그사이 일행들이 하나둘 나왔다. 다들 표정이 어둡지 않은 것으로 보아, 패배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남은주조차 승리한 듯 보였으니까.
하긴, 내 파티와 한바다 파티는 내가 직접 단련시킨 이들이다. 고작 여기서 패배할 만큼 쉽게 가르치지는 않았다.
일행은 서로가 만난 몬스터들에 대해 얘기하며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전체적인 의견은 상대 수준이 매우 높았고, 자신을 돌아보기는 좋지만 보상은 영 아니라는 것. 그러나 단 한 명. 나서윤만은 무언가를 생각하기 바빳다.
한참을 생각하던 나서윤은 곧바로 내게 달려왔다.
"오빠!"
"…왜 그래?"
"저 여기 좀 더 이용하고 있어도 돼요?"
"어차피 쉬는 날인데 네 마음이지. 마음대로 해."
"감사합니다!"
나서윤은 곧바로 다시 고난에 도전했다. 그리고 하루, 이틀이 지나 다음 층으로 향하기로 한 날에도 나서윤은 조금만 시간을 더 달라며 신전에 눌러앉았다.
어느새 13층에 도착한 파티들도 있었다. 나는 더 위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나서윤이 뭔가 실마리를 잡은 것 같다. 결국 나는 일행들에게 말해 하루를 더 쉬겠다고 전달했다. 반대하는 일행은 없었다. 한바다 파티가 조금 아쉬워하긴 했지만, 갑은 이쪽이다.
그 시간 동안 나는 고난의 신전에 도전하며 내 상상보다도 더 엄청나진 육체에 맞도록 검술을 가다듬었으며, 덕분에 웨폰 마스터리의 숙련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성과를 얻었다. 과정에서 10회 이상 고난의 신전을 클리어하는 바람에 다음 층으로 올라갈 자격을 얻었지만, 아직은 한바다의 복수가 남았기에 올라가지 않았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저녁, 나서윤은 처음으로 마법을 사용했다.
***
"에너지 볼트!"
"와… 이게 마법이야?"
"네. 무속성 기초 마법이긴 하지만요."
나서윤은 일행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마법이라니. 그것도 미궁에서?
그 빠르다는 대마법사도 하층에 도착하고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야 마법을 하나둘 쓰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육체로 싸웠으며, 봉 같은 것을 주로 사용했다고 알고 있었다.
최상급 잠재력답게 마법사임에도 육체 자체의 스펙이 좋아 그래도 중상위권이었다고 들었다.
마법을 하나둘 쓰기 시작한 이후로는 점점 괴물이 되었지만.
그런데 나서윤은 벌써부터 마법을 사용한다.
나는 새삼 회귀자의 지원을 받는 최상급 잠재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깨달았다.
숫제 소름이 돋는다. 진짜배기 괴물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저게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일행은 그저 신기하다는 반응이지만.
아니, 애초에 일행에 그 귀하다는 정령사가 있다 보니, 저런 신기한 마법에 익숙한 것도 영향을 줬겠지만.
나는 일행들 사이로 파고들어 나서윤의 앞에 섰다.
"오빠?"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잘했다. 고생했어."
"네. 히히."
나서윤은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잘했다. 이런 칭찬이 부족할 만큼. 하지만 지금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 정도가 다다.
나서윤을 칭찬한 뒤, 몸을 돌려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내일은… 밀렸던 일을 처리합니다. 한바다 씨,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 약속했던 일을 처리하도록 하죠."
"아뇨. 별말씀을. 어차피 그들이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닌걸요."
그들. 일행은 단숨에 우리가 무슨 대화를 하는지 눈치챘다.
일행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진상수 파티. 그들이 화제에 오르자 조금 불쾌한 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내일, 진상수 파티를 처리하고 다음 층으로 올라갑니다."
나는 일행을 향해 선포했다.
다음 날이 되었을 때, 일행의 분위기는 딱딱한 편이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망설이거나 하는 모습은 없었다.
진상수 파티가 한 일이 있고, 나름 같이 지내며 한바다 파티와도 친분을 쌓았다. 그렇기에 내 일행도 진상수 파티가 싫으면 싫었지 좋은 감정은 없었다.
안전 구역으로의 이동은 얼핏 느린듯했지만 분명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어느새 일행은 안전 구역 앞에 도착했고, 별다른 조건 없이 안전구역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전 구역에 입장하셨습니다.]
관리자가 설정한 조건들이 주르륵 나타났다.
내게 조건을 풀라고 했던 한바다답게, 내부에서의 범죄, 특히 살인 같은 것을 제외하면 조건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그마저도 방금 풀렸다.
"한, 한바다 씨…. 유신후 씨까지…."
이제 며칠 남지도 않은 안전 구역.
그 안에서 진상수 파티는 우리를 발견하자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작은 희망을 기대했던 걸까. 진상수는 즉시 달려들어 무릎을 꿇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빠른 행동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때는 제가, 제가 너무 살고 싶어서 미쳤었나 봅니다! 바다 씨, 아니 한바다 님! 제발,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내심 나에게 변명하며 한바다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해라고 말할 줄 알았다. 실제 배신 현장을 보지는 못했으니까.
그런데 그는 그런 행동 대신 빠른 사과를 선택했다.
생각보다 상황 판단이 좋았다.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다 저희 잘못입니다!"
나머지 셋과도 이야기가 되어 있었는지 나머지 셋 또한 진상수의 뒤를 이어 바닥에 납작 엎드려 사과를 하고 있었다.
나는 한바다를 쳐다보았다.
솔직히 나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아무리 사과를 해 봐야 이들이 한 짓은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이다.
간접 살인, 아니 그냥 살인 행위였고, 동시에 동료를 배신한 행동이었다. 지구에서도 살인은 엄격한, 그것도 중범죄에 해당한다. 탑에서도 정당방위가 아닌 한 살인은 중범죄다. 하지만 훗날에는 동료를 배신하는 행위가 더 심각한, 중범죄로 분류된다. 1회차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이 둘을 동시에 행하려 한 이들에 대해서 도저히 동정심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한바다는 다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들의 전략이 효과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완벽한 무표정. 그 안에서도 나는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저건 전혀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분노를 부채질한 듯했다.
콰직.
맨 왼쪽의 남자. 황우진. 그는 엎드린 자세 그대로 한바다의 검에 머리가 쪼개졌다.
"힉!"
반응도 하지 못했다. 이전에도 무력으로써는 한바다가 이들 중 최고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차이가 더 벌어졌다.
게다가 엎드린, 완벽한 무방비 자세. 반응하는 것이 더 신기하다.
다짜고짜 한 명을 죽여버릴 줄은 몰랐는지 엎드린 놈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표정은 당황과 공포로 얼룩져 있었다.
"왜 그러셨어요?"
"그… 그게, 도, 도저히 불가능해 보여서… 죽, 죽고 싶지 않았습니다. 살, 살고 싶어서 그랬어요. 정, 정말입니다 한바다 님."
떨리는 목소리. 흔들리는 동공. 그 안에서도 이들은 어떻게든 살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그러면 그냥 도망치면 되지, 왜 찔렀어! 그딴 짓을 하고도 뻔뻔하게…!"
조연은이 끼어들어 외쳤다.
"하, 하지만, 도망쳤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우리를 그대로 버릴 거 아닙니까! 우리는 살길을 찾아야 했어요! 그래서…!"
"하, 우리가 안 되니까 신후 씨 파티에게 빌붙을 생각이셨다? 배신했다는 증거인 우리는 다 치워버리고? 뻔뻔하게?"
어지간히 우리 파티를 호구로 본 듯했다.
"살, 살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도, 도망쳐도 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도망쳐서, 안전 구역에 들어가면, 한, 한바다 님이 저희를 쫓아버리실 줄 알았습니다. 그게, 그게 무서워서 그랬습니다. 부디, 부디 한 번만 자비를…."
끊임없이 말을 더듬는다. 정말 겁에 질린 사람처럼. 실제로 겁에 질리긴 했겠지. 하지만 나는 저게 반쯤 의도적인 모습이라고 보였다. 하지만 단죄는 한바다 파티의 것. 나는 참견하지 않았다.
"…그냥 도망치셨다면, 찾아오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파티까지 죽이려고 했어. 그건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15층까지 이끌었잖아! 난 반대했어! 천천히, 천천히 올라갔으면 우리가 이 꼴이 났을 것 같아?! 개소리를 지껄이면서 우리를 15층으로 끌고 온 것은 너야! 일차적인 원인은 네 탓이라고!"
"맞습니다. 그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의 배신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
차가운 한바다의 선고. 그 말에 어느새 일어선 진상수가 무기를 뽑아 들었다.
자신들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듯, 마지막 발버둥이라도 칠 셈일까.
하지만 곧바로 우리 일행을 바라보았다.
우리 일행은 그들이 무기를 뽑아도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알게 모르게 마력은 끌어올린 것 같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여유로운 모습.
우리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은 진상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무기를 집어 던지며 다시금 매달렸다. 이번에는 나를 향해서.
"신후 씨! 아니, 유신후 님! 제발,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살려만 주시면 제가 당신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견마지로를 다 할 테니 부디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저런 노예는 필요 없는데. 실력도 하찮고 도움 될 구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되려 짐이지. 위험하면 또 배신이나 안 하면 다행이다.
한바다는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무표정이긴 했지만, 조금 걱정이 섞인 눈빛이다. 혹시라도 받아들이면 어쩌나 하는 듯했다.
확실히 내가 나서면 저거 하나 살리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아 보였다. 한바다도 내 부탁이면 엄청나게 싫어하면서도 살려는 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득보다 실이 훨씬 많다. 할 이유도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진상수 씨. 제가 뭐라고. 저는 이 일에 간섭할 권한이 없습니다."
"제발! 제발! 유신후 님이면 저희를 살려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부디, 부디 목숨만이라도…!"
진상수가 내게 매달리는 모습에 희망을 찾은 듯 남은 세 명 중 한 명이 내게 달려들었다.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매달릴 심산인 듯했다.
하지만 곧바로 일행이 내 앞을 막아섰고, 이윤형은 그보다 더 과격했다.
달려들던 남자, 나상민의 한쪽 다리를 그 자리에서 잘라버렸다.
"끄아아악!"
나는 그런 나상민은 쳐다보지도 않고 한바다를 향해 말했다.
"시간 좀 드리겠습니다. 일단 쌍뿔 미노타우로스 좀 찾겠습니다. 가는 길에 존재하는 미노타우로스들은 모두 정리하고 표시를 남겨 둘 테니, 흔적을 쫓아 오시면 됩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한바다는 내게 감사를 표했다.
"별말씀을. 그럼 천천히 따라 오시면 됩니다."
나는 안전 구역을 벗어났다.
"유신후 님! 유신후 니이임!"
뒤에서 나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무시했다.
"으아아아아아!"
처절한 비명이, 내 뒤에서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