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고난의 신전
제일 먼저 17레벨이 된 것은 나였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범위. 그럴 수밖에 없기는 했다. 애초에 내 레벨이 가장 높기도 했고, 기여도도 내가 제일 높은 상황이었으니까.
중간부터는 키퍼 역할을 하며 나서윤이 앞장서게 만들었고, 나연은 처음부터 꾸준히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내 레벨업이 가장 빨랐다. 다음은 나연, 그다음은 나서윤 순서대로 17레벨을 달성하기 시작했고, 남은주 주하연 한바다 순서대로 17레벨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막 17레벨을 찍음으로써 이제 한동안 레벨의 성장이 멈춰버린 한바다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 파티는 규격 외다.
한바다는 자신도 모르게 인정했다.
달려오는 소 떼들. 이제는 익숙하다. 외뿔 미노타우로스 말고 쌍뿔도 섞여 있기는 했지만, 전혀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쌍뿔을 쓰러뜨리고 열린 다음 층으로 향하는 통로도 무시한 채 일행은 계속해서 사냥에 열중했다.
이제는 소 떼가 10마리를 넘어 20마리 가까이 달려드는데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나연은 침착하게 선두의 미노타우로스들을 향해 윈드 커터를 날려 진형을 반쯤 붕괴시키고, 나서윤이 나서 붕괴된 진형을 반쯤 헤집는다.
남은주와 한바다가 2열을 형성하며 남은 이들이 더는 돌진하지 못하도록 막고, 주하연과 이윤형이 2열을 보조한다.
소 떼들의 속도를 제압하는 데 성공하면 나연과 조연은이 원거리 지원을 시작하고 서서히 전투를 마무리하기 시작한다.
나는 뒤에서 위기 상황에서만 나설 뿐, 다른 일행들이 충분히 스스로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도록 구경만 했다.
레벨이 오르지 않는다고 해도, 이정도 전투를 이어가면 능력치가 성장하고 스킬의 숙련도가 쌓이기 마련이다.
나야 한동안 1회차의 경험이 몸에 녹아들도록 허공에 검만 휘둘러도 성장하지만, 이들은 아니니까.
전투는 마치 잘 짜인, 정해진 수순대로 진행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다들 익숙한 모습이다.
"하아…."
"레벨 올랐습니다."
인원이 많아져 느려진 레벨업 속도를 물량으로 떼운다.
이런 전투가 이어진 지 어느새 3주 가까이 흘렀고, 이제는 이상한 철조각도 모일 만큼 모였다.
이 정도면 목표치에 다다랐다고 판단해도 될 정도.
그리고 방금의 전투를 끝으로 이윤형과 조연은의 레벨도 17에 도달했다.
"이제… 끝났나요?"
한바다는 어딘가 기대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끄덕.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바다뿐만이 아니라 모든 일행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 드디어…."
"왜 이들이 선두인지 알만한 경험이었어…. 원래 이래요?"
"…튜토리얼 때는 안 그랬는데… 미궁에 오더니…."
목표를 달성했다는 말에 한바다 파티와 내 파티는 모두 긴장을 풀었다.
일대의 몬스터가 방금의 전투로 동나버린 이상 별 상관없었기에 나도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한바다를 불러들였다.
"…무슨 일이시죠? 설마…."
또 전투를 시킬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 그만큼 그간의 일정이 고되었다. 사실 나처럼 강행군을 하는 경우는 없다고 봐야 한다. 전투는 변수가 많고 목숨이 달린 일이다. 그런 만큼 안전이 가장 중요한데, 나는 그딴거 모르겠고 일단 시간부터 줄이자는 식이었으니 이런 경험을 처음 해보는 한바다는 확실히 무서워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 만큼 대가는 확실해 그녀의 평균 능력치는 어느새 20대 후반을 넘어 30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균 30을 돌파해 자신의 재능을 입증한 나서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만만히 볼 성장세는 아니다.
지금 말도 안 되는 성장을 보이는 남은주도 한바다에 비하면 아직 부족하다.
게다가 재능 자체가 높은 한바다는 한동안 주춤하더라도 꾸준히 성장할 것이 확실하다는 점에서 남은주와 비교하기가 미안할 정도였다.
"아뇨. 사냥 때문은 아닙니다. …배신자 파티에 대한 일입니다."
진상수.
그 이름이 나오자 한바다의 표정이 일변했다.
우리는 일부러 진상수 파티가 존재하는 안전 구역은 피해 사냥을 했었다. 위치야 한바다를 통해 들을 수 있었기에 피해 사냥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안전 구역의 관리자 권한이 한바다에게 있는 이상 그들을 꺼내 처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나는 사냥을 우선했고, 한바다는 그런 내 의견에 따랐다.
어차피 그들은 도망갈 장소가 없다. 게다가 관리자 권한이 계속 한바다에게 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슬슬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눈치챘겠지.
아마 지난 3주는 그들에게 있어서 엄청난 공포의 시간이었을 터다. 살아남은 한바다 파티가 언제 자신들을 죽이러 올지 모른다. 처음에야 희망적인 생각으로 한바다 파티가 어떻게든 살아남았고, 내 파티는 우리대로 따로 행동해 자신들을 찾아오길 바랐을 터다.
하지만 3주나 지났다. 그 시간 동안 한바다가 살아있으며, 자신들을 찾지 않았다. 3주면 내 파티도 15층에 올라오기 충분한 시간. 그들은 이제 우리가 한바다 파티와 합류했다는 사실을 반쯤 짐작하고 있을 거다. 이제 기다리는 것은 나와 한바다 파티가 다음 층으로 이미 가버렸고, 아예 제3의 파티가 15층에 올라와 자신들과 함께 해 주길 바라는 것 정도다.
정보가 아예 제한되어 있으니 저 예상만이 자신들이 살길이다.
"그들은 여전히 안전 구역 내에 있습니까?"
"…네. 여전히 그 안에 있습니다. 어차피 그들만으로는 미노타우로스 하나도 잡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안전 구역 내부에서 버틸 수밖에 없죠."
그랬다. 그들은 현재 아무리 기를 써도 미노타우로스를 잡을 수 없었다. 그들이 현재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안전 구역 내부에서 능력치를 올리기 위한 훈련과 기도하는 것 정도다. 그래 봐야 레벨 12~13에 잠재력 중~중상 수준으로는 미노타우로스를 잡기가 힘들겠지만. 상성상 실력이 부족한 전사 넷이서 미노타우로스를 잡기란 그만큼 힘든 일이다.
"우리는 이제 16층으로 향합니다. 오늘과 내일은 푹 쉬고, 모레 16층으로 향할 계획입니다."
나는 한바다 파티에게 미궁에서는 임시로 동행하자는 제안을 했었고, 한바다는 감지덕지라며 받아들였다.
한바다의 목적인 고정 안전 구역의 확보는 이제 완전히 포기한 상태다. 실력 차이도 인지했고, 우리 쪽 의도가 나쁘지 않다는 것도 확인했으며, 애초에 파티도 반 토막 나 이제는 이쪽에 빌붙어야 하는 처지. 지금은 내가 키워준 실력 덕에 다음 층부터는 따로 활동해도 되나, 그렇게 하면 내 목적과 부합하지 않는다. 미궁에서의 임시 동행을 제안한 이유였다.
즉, 한바다 파티도 모레에 16층으로 향한다는 뜻이고, 그리되면 이전 층으로 돌아오지 못하니-아직 이들은 20층에서 아래로 갈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복수할 기회가 사라지는 거다.
그간 지낸 바에 따르면 한바다는 나연보다는 덜 갑갑한 성격이었다. 도덕이나 약자를 지켜야 한다는 것은 나연과 비슷했지만, 이전의 나연은 쓰레기라도 함부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을 꺼렸던 것과는 다르게, 쓰레기들을 살려 두는 것은 그들이 더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줄 기회를 주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즉, 쓰레기를 살려 놓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는 이였다.
더할나위 없었다. 나연이 저 정도만 되었어도 덜 답답했을 거다. 지금은 과거와 다르게 말 잘 듣지만. 아니, 오히려 지금이 낫긴 하다. 우리 파티를 위해서라면 좀 비도덕적이라도 뭐라 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처리하고 가야겠군요."
"도와드릴까요?"
"솔직히, 저희 손으로도 충분하기는 하지만, 거리가 제법 되니까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모레 가는 길에 처리하고 가죠. 쌍뿔 미노타우로스를 잡아야 하니, 안전 구역 쪽으로 이동하면서 찾으면 되겠습니다. 참고로, 저도 그런 놈들은 무척 싫어하는지라."
히죽.
내 웃음에 한바다는 조금 든든하다는 표정이었다.
솔직히 한바다가 보기에 나는 상당히 호감이 가는 성격이겠지만, 근본은 다르다. 나는 가족을 보기 위해, 지구를 위해 이런 작업이 필요해 하는 것, 즉 필요에 의해 하는 거지만, 한바다는 정말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서 하는 거니까.
하지만 결과는 같다. 그거면 된다.
우리는 다 같이 고정 안전 구역으로 복귀했다. 일행들은 이틀간 쉰다는 내 말에 무척이나 기쁜 기색이었다.
오늘 쉰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나서윤이 내게 달려왓다.
"오빠, 오빠!"
"왜 그래?"
"우리 신전에 가 봐요!"
신전. 고정 안전 구역 옆의 고난의 신전을 말하는 것일 터다.
"…거긴 왜?"
"멋지게 생겼잖아요! 그리고 뭐 하는 데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실제로 처음 발견한 뒤로 여러 사건 덕분에 제대로 신전에 가본 적이 없었다.
우연히 발견-일행은 그렇게 생각한다-한 데 이어서 곧바로 고정 안전 구역을 찾았고, 그 뒤에는 위기에 빠질 게 뻔한 한바다 파티를 찾아다녔다. 찾고 나서는 이들을 회복시키고 곧바로 전투에 돌입했으며, 나중에는 몰이 사냥하느냐고 3주라는 시간을 사냥에만 집중했다.
결과가 엄청나기는 하지만 그런 만큼 다른데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래. 그러자."
나는 별다른 반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봐도 금방 질릴 거다. 그리고 한 번 이용해 보면 놀라겠지.
그녀의 실력에 딱 맞는 상대가 나올 테고,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 여러 시도를 해볼 수 있을 거다.
좋은 훈련을 해볼 수 있는 기회다. 현시점에서는 효율이 별로겠지만, 그렇다고 말리고 싶지는 않았다.
"저희도 같이 가죠 신후 씨."
"그래. 나도 같이 갈래."
그러나 내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언제 왔는지 주하연과 나연이 다가왔다.
"…그러세요."
딱히 말릴 이유는 없기에 허락했다.
그러자 나서윤이 조금 핀잔 주듯이 말했다.
"언니들은 왜?"
"그냥. 할 거 없어서?"
"나도 심심해."
주하연과 나연이 다가오자 우물쭈물하던 남은주도 따라붙었고, 우리가 어디를 가려 하자 한바다 파티도 다가왔다.
"어디 가시나요?"
"이 옆에 신전이 있어서요. 쉬는 김에 보러 갑니다. 거기도 안전 구역 비슷한 곳인지 몬스터는 없거든요."
"신전이요?"
몰랐다는 반응. 생각해보니 한바다 파티는 신전에 가볼 일이 없었다. 우리가 이쪽으로 데려오기도 했고, 방향 자체가 우리는 6구역, 저쪽은 2구역에서부터 오다 보니까 신전을 지나치지도 않았으며, 치료가 끝난 후에는 곧바로 우리와 함께 사냥에 돌입했었다.
신전을 볼 기회가 없었던 셈.
"그럼 저희도 가도 될까요?"
"…뭐 전세 낸 것도 아니니 좋으실대로요."
결국 기껏 준 쉬는 날에도 단체 행동이다.
우리는 다 같이 신전을 향해 이동했다.
신전이라고 해봐야 건축물 자체는 웅장할지언정 주변은 휑하다.
한 바퀴 돌고 나면 금방 질릴 거다.
"세계를 여행하면서 이런 볼거리 보는 게 꿈이었는데… 이런 엉뚱한 장소에서 작은 꿈을 이루네."
"언니도요? 나도 그랬었는데. 언제 한번 날 잡고 여행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됐었죠."
주하연과 나연, 남은주는 서로 붙어 다니며 담소를 나누었고, 나서윤도 불퉁해 하면서도 그녀들에게 달라붙었다.
나 또한 끌려다니며 신전 주변을 돌아야만 했다.
"신후 씨는 지구에서 뭘 하셨었어요?"
"…그냥 평범했습니다. 여기 오기 전날에는…."
솔직히 기억이 잘 안 난다. 탑에서 너무 농도 짙은 삶을 살았다. 내가 지구에서 뭘 했더라? 학생이었나?
적당히 학생이었다고 둘러대며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는 하연 씨는 뭘 하셨습니까? 지구에서."
"저는 뭐… 일하고 있었죠. 그냥저냥 일에 치여서… 그렇게 살았어요. 여기 온 날도 야근에 치여서 늦게 퇴근해 겨우 잠들었었는데…."
아련하다는 표정.
나연은 어두운 얼굴이다.
"나연아?"
"아, 그게… 저는 지구에서 영 힘들게 살아서… 엄마도 아프고, 학비 때문에 대학도 결국 중퇴하고… 그냥 공장에서 일했어요."
씁쓸한 표정.
나서윤도 그런 나연을 위로하듯 손을 마주 잡았다.
'역시 가정환경은 좋은 편이 아니었나?'
나연과 나서윤은 나이 차이도 심하다. 그래서 더 서로 잘 지내는 걸지도. 무려 8살 차이다.
나서윤이 늦둥이인 셈.
더 자세히 물을 분위기는 아니었다.
"저, 저는 대학생이었어요! 요새 취업이 잘 안 돼서 1학년 때부터 학점 관리하느라…."
허둥지둥 분위기를 바꾸겠다고 남은주가 평소답지 않게 나서고 있었다.
그런 남은주의 모습에 나연은 조금씩 미소를 되찾았다.
가족과 헤어진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동생이라도 같이 있으니 다행인 지경. 그 사실을 눈치챈 듯했다.
어느새 신전 주변을 한 바퀴 다 돌아버렸다. 역시 볼 것은 없었고, 정해진 수순처럼 고난의 신전 내부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자 익숙한 메시지가 튀어나온다.
[고난의 신전에 입장하셨습니다.]
[고난의 신전에서는 자신과 수준이 맞는 적의 환영과 싸울 수 있습니다. 환영과의 싸움에서 죽거나 상처를 입어도 현실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고난에 도전하시겠습니까? Y/N]
이전에도 봤었던 메시지다.
여기서는 초반 효율이 극악이다.
이겨도 레벨은 안 오르고 능력치도 거북이처럼 오른다. 그렇다 보니 다들 포기하게 되는 장소.
나는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왕 온 김에 한 번 해볼까?"
"네!"
일행은 기다렸다는 듯이 동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