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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53화 (53/317)

# 53

푸른 바다 파티

"제발! 제발 우리 바다 좀 살려주세요!"

나는 주변 공동을 확인했다.

미노타우로스의 환영은 없다.

아무래도 겨우 처치한 후 의식을 잃은 듯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제발, 제발 관리자님… 뭐든지 할게요, 바다, 바다 좀 살려주세요. 제발…."

궁수는 반쯤 이성을 잃은 듯 보였다.

나는 우선 한바다에게 접근해 상처를 살펴보았다.

…상당한 중상이다.

궁수는 여러 잔상처가 많았지만, 생명에 큰 지장은 없어 보였다.

"음…."

고개를 돌려 살펴본 도적 또한 상처가 제법 위중하다. 이곳저곳 잔 상처도 상처지만, 허벅지와 복부에 제법 큰 상처가 보인다. 내장까지 다치지는 않은 듯했지만, 그렇다고 그냥 둬도 될 정도도 아니다. 저런 상처로 검을 들고 있는 것부터가 신기했다.

"다른 이들은 어디 있습니까?"

그래도 그나마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듯한 도적에게 물었다.

궁수는 여전히 '제발… 제발…'거리며 한바다를 끌어안고 있었다.

"…도망쳤습니다. 정확히는 저희를 배신했습니다."

"배신이요? 어차피 도망쳐봐야 죽을 텐데요?"

그들 넷의 실력으로는 15층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도망칠 수단은 있습니다. 그리고 고정 안전 구역은 찾지 못했지만, 한 달짜리 안전 구역은 하나 찾았습니다."

과연. 그나저나 도망칠 수단이라… 9층 던전의 보상인가?

"언제 다친 겁니까?"

"…몇 시간 되었습니다."

몇 시간. 용케 리젠이 안 됬다. 슬슬 미노타우로스의 환영이 다시금 나타날 시간이다. 차라리 다른 공동 하나를 청소하고 거기서 치료를 하는 것이 낫겠다. 정확히는, 방금 우리가 온 곳으로 돌아가면 된다. 막 미노타우로스를 처리한 상태니까.

"…우선 응급 처치만…."

"이거, 이거 드릴게요. 더 필요하신 거 있으면 제가…."

그때 헛소리를 계속하던 궁수가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건…."

물건을 손에 쥐자 정보 창이 나타났다.

[하급 신체 클리너]

-과거 먼 시대, 건강 관리 차원에서 사용된 신체 클리너. 몸속의 노폐물을 일부 제거할 수 있다. 본래 질이 좋지 못했던 물품인 데다 오래된 물품이라 효과가 미미하다.

-사용 가능 횟수 2/5

-정보 추가 : 일부 마력 회로와 신체의 노폐물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관리자의 눈동자와 연계됩니다.]

-정보 추가 : 잠재력 '중하' 이상의 존재에게는 효과가 거의 없습니다. 잠재력이 '최하'인 존재에게 사용 시 잠재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9, 9층 던전에서 얻었어요. 효, 효과는 적지만 분명 도움이…."

그러더니 궁수는 허겁지겁 말을 이었다.

"이, 이거 말고는… 돈, 돈이라도 드릴게요. 필, 필요하시면 제가 뭐라도 해서 갚을 테니까 제발, 제발 바다를…."

부족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1인분은 하는 궁수라며 도움이 될 거라 말하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잠재력 상의 궁수긴 하니까.

그래도 나는 이 궁수가 뭐 때문에 이리 필사적인지 모르겠다. 지구에서도 친구 관계였던 걸까. 그래도 일단 주는 것은 받아 챙겼다. 그리고는 궁수를 향해 말했다.

"알겠습니다. 도와드릴 테니, 우선 진정하세요."

내 힐스킬이 레어이긴 하지만, 한 번에 회복될 상처는 아니다. 한바다의 상처는 당장에 죽을 정도는 아니어도 이대로 방치한다면 며칠 내에 사망할 가능성이 높았다. 충분히 중상이다.

우선 궁수를 안정시킬 목적으로 한바다에게 힐을 사용했다.

곧바로 밝은 빛이 한바다의 몸에 스며들었고, 눈에 띨 정도로 상처가 아물었다. 완치는 아니더라도, 오랜 시간 정양하면 회복할 수 있을 정도. 두어 번 더 사용하면 완치도 가능하지만, 일단 여기서 멈춰 두었다.

나는 조금 지친 기색으로 말했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다음 치료는 안전한 장소를 확보한 뒤에 하도록 하죠."

내 직업 중 하나가 사제긴 하다. 하지만 주하연처럼 마력을 신성력으로 치환하지도, 기초 신성 마법 이론을 익히지도 않은 상태라 효율이 나쁘다. 나라도 3번 정도가 한계. 그 이상 사용했다간 마력이 바닥난다. 함부로 남발하기에는 현재 장소가 좋지 못했다.

"아… 아아…. 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무는 모습에 궁수는 이전보다 조금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바다에게서 떨어지지는 않았다. 아직 불안감이 남은 듯했다.

"우선 따라오세요."

나는 일행에게 눈짓해 이 파티를 둘러쌌다.

호위 목적이긴 하지만, 허튼짓을 차단하는 효과도 있었다. 솔직히 그럴 기력도 없으니 괜한 걱정이지만.

나는 우리가 방금 미노타우로스를 처리한 공동으로 향했다. 리젠 시간은 불규칙하다. 짧으면 한두 시간이면 되지만, 길면 하루가 걸릴 수도 있었다.

공동을 옮겨 궁수가 진정할 시간을 주었다. 그사이에 나는 도적의 몸까지 치료해 주었다. 잔 상처들은 물론이고 복부와 허벅지의 상처까지 거의 아물었다. 조심할 필요는 있겠지만, 전투도 가능할 수준. 레어 스킬은 귀한 만큼 그 값을 했다.

덕분에 마력이 반 이상 날아가 버렸지만.

"감사합니다. 신세를 졌습니다."

끄덕.

나는 지친 기색을 내비치며 고개만 끄덕였다.

티를 내는 의도도 있었고, 말보다 효과적일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 궁수가 진정하자 도적과 함께 불러들였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조연은 이라고 합니다. 직업은 궁수고 레벨은 13이에요."

"저는 이윤형이라고 합니다. 직업은 도적, 레벨은 13입니다."

둘 다 15층에서 레벨이 오른 듯했다.

능력치 평균은 조연은이 민첩만 21, 나머지 신체 능력치는 19정도에 마력은 15정도. 이윤형은 평균적으로 18에 마력은 14였다.

15층에 어울리지 않는 수준. 조연은은 14층 정도, 이윤형은 그 아래에서 한참 사냥하고 있을 수준이었다.

그나저나….

'둘 다 히든 클래스가 아니군.'

아무래도 관리자 놈들의 눈이 높아진 듯했다.

그럴 만도 하다. 나와 나서윤을 보고 다음 본 애가 한바다다. 조연은 정도는 눈에 차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도 나름 잠재력 상급에 스킬 슬롯이 7개나 되는 인재인데… 배가 불렀다. 아니, 어쩌면 원하는 직업이 없었을 수도.

우리 일행은 남은주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히든 클래스가 등장했던 것과는 대조된다.

"먼저 15층에 가시고는… 어떻게 된 겁니까?"

"…15층이 험난할 거라고는 예상했었지만… 설마 몬스터가 미노타우로스 하나 뿐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고블린이나 놀이 더 강해져서 나올 거라고 생각했죠."

도적, 이윤형이 내 말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 미노타우로스와 만났을 때, 정말 최악이었습니다. 진상수를 비롯한 전사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려 도망치기 급급했고, 사실상 바다 님 혼자서 어그로를 다 끌었습니다. 공격은 저와 연은 님이 다 해야만 했죠."

그때만 생각해도 짜증 난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래 놓고는 약속이라면서 보상은 다 챙기더군요. 식량은 물론, 뭔 용도인지 모를 철쪼가리까지 꼭꼭 챙겨갔습니다. 그래 놓고는 다음 공동에서도, 그다음 공동에서도 미노타우로스가 나오자 거의 전투를 방관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가끔 어그로를 끌기는 했지만 도망치기 급급하더군요."

"…속도가 빠른데 그들이 어그로를 어떻게?"

"빙 둘러싸서 무기를 던지고 연막탄을 사용해 도망쳤습니다."

"…연막탄이라뇨?"

"9층 던전의 보상입니다. 저희가 클리어한 곳은 고요한 안개의 숲이라는 곳이었습니다. 거기 중심부의 유적까지 가는 거였는데… 거기 보상이 연막탄입니다. 저까지 합쳐 다섯이서 100개 정도 받았습니다. 제 것은 15층에서 그놈들에게 모조리 뺏겼으니 아직 넉넉할 겁니다. 공로가 큰 바다 님과 연은 님은 다른 물품을 받았습니다."

이윤형은 자신의 연막탄을 대가로 내놓고 나서야 그들이 조금씩이라도 어그로를 끌어 줬다고 말했다.

조연은이 그때 받은 것이 저 클리너인가 보다.

세 번 쓴 걸 봐서는 자신과 한바다, 이윤형까지 한 번씩 써 봣겠지. 그래 봐야 효과는 미미했을 터다. 그럴 만도 한 게, 셋의 잠재력은 각각 상, 상, 중상이다.

"처음 떨어진 구역은 3구역이라 금방 갈 줄 알았는데… 공동 하나하나를 클리어하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상성이 정말 최악이라…. 게다가 중간에 한 달짜리 안전 구역까지 만나는 바람에…. 진상수 파티는 고정 안전 구역을 포기하자고 하더군요. …신후 님 파티가 오기 전까지 그냥 버티자고. 만약 저희 파티가 앞장선 덕분에 관리자 자리를 차지하지 못 했으면 진짜 그렇게 될 뻔했습니다. 그런데."

이윤형은 분노를 억누르느라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겨우겨우 하나씩 공동을 개척해 나가는 와중, 진상수 파티가 점점 소극적으로 변해가더군요. 연막탄이 점점 줄어들어서 불안하다면서요. 결국 바다 님이 더 무리를 하게 되었고… 피로가 충분히 누적되자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배신했어요!"

조연은이 갑작스레 끼어들었다.

"뒤에서! 뒤에서 바다를 찌르고 도망쳤어요. 고정 안전 구역에 도착하기 전에 죽게 생겼다면서! 여기서 그냥 죽으라고! 위험하면 당신들이 미끼가 되기로 하지 않았냐면서, 자신들은 신후 님 파티에 붙어서 살아남을 거라고 말했어요!"

"…아무래도 한 달짜리 안전 구역의 관리자 권한을 노리는 것 같았습니다. 한 달이면 신후 님 파티가 여기 올라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니까요. 안전 구역은 일단 2구역에 속해 있기도 하니 만날 가능성은 높았죠."

우리 파티는 자신들보다 우수하고 고정 안전 구역을 향해 갈 거니, 그 과정에서 합류를 노린 듯했다. 중간 합류가 불가능하더라도 한 달이면 우리와 한 번은 마주칠 거라 생각도 했겠지.

조금 운에 기대긴 하지만, 안전 구역이 2구역에 있으면 가능성이 제법 되기는 한다.

'받아줄 생각 없는데.'

아무래도 14층에서 한바다와 주하연의 대화 때문에 우리도 한바다마냥 호구 새끼라고 생각한 듯했다.

"그런데 배신당하고도 용케 살아남으셨군요."

"운이 좋았습니다. 한바다 님이 목숨을 걸고 붙잡았고, 저도 힘겹게 급소를 노렸으니까요. 미노타우로스의 뿔이 조금만 더 깊게 들어왔다면 저는 죽었을 겁니다."

복부의 상처. 그게 미노타우로스의 뿔이 들어온 흔적이었던 듯했다.

대충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알겠다. 이번 전투에서 운 좋게 살아남기는 했지만, 사실상 그들의 죽음은 시간 문제였다. 미노타우로스가 리젠되는 순간 이들은 확실하게 죽을 테니까. 만약 우리가 여기에 나타난다는 변수가 없었다면 이번 회차에서도 이들을 보기는 힘들었을 터다.

나는 이윤형과 조연은에게 물었다.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허락만 해 주신다면 회복할 때까지 동행을 요청드리고 싶습니다. 폐가 된다는 것은 압니다. 지금은 힘들지만… 신세는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염치 불구하고 부탁드릴게요."

둘은 내게 고개를 숙여왔다.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며 받아들였다. 애초에 이들 셋이면 받아들일 의향이 있었다. 쓸데가 있기도 했고. 20층까지의 임시 동행이지만.

"…뭐 좋습니다. 치료와 식량 정도는 지원해 드리겠지만, 전투에서 나오는 전리품 분배는 없을 겁니다."

"네. 당연합니다. 필요하시다면 전투도 돕겠습니다."

"아뇨, 당장은 괜찮습니다. 회복을 우선하세요."

이들이 합류하면 이 '이상한 철 조각'을 더 빨리 모을 수 있다. 이게 20층에 가면 무척 귀한 아이템이 되는 재료이기에 더 빨리, 더 많이 모을 필요가 있었다. 심지어 이건 누군가가 20층의 보스를 클리어하면 더는 드롭도 되지 않는다.

'한바다에게는 안 됬지만… 나한테는 좋은 상황인데?'

나는 내가 20층 위로 향하는 동안, 한바다를 미궁의 질서를 잡을, 관리자로 쓸 계획이었다.

한동안 한바다에게 맡기고 나중에는 한바다를 통해 믿을 만한 사람에게 다시 넘기면 상당수의 수련자들이 허망하게 죽지 않을 터. 수련자의 질도 올라갈 테고, 과거처럼 쓰레기들이 미궁의 권력을 틀어쥐지도, 나아가서는 탑의 상층부가 쓰레기로 가득 차는 현상을 막을 수 있을 거다.

나는 마력을 대강 회복하고 나서 우리가 확보한 고정 안전 구역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런 나에게 조연은과 이윤형은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쪽은 1-1구역으로 향하는 길이 아닙니다만…."

"아. 고정 안전 구역은 이미 저희가 확보했습니다. 5구역에 있더군요."

"네에에에?"

조연은의 반응은 극적이었다.

"그, 그럴 수가…. 그럼 저희는…."

헛고생한 거지 뭐.

"그래도 그 상태로 1-1구역 까지 가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강제로 통과라도 했다간 큰일 나실 뻔했어요. 무모한 선택을 하지 않으신 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이들이 1-1구역만 가면 된다는 생각에 강제로 공동을 통과했다면 소 떼들에게 쫓겼을 테고, 1-1구역에 안전 구역 따위는 없으니 그대로 끔찍하게 죽었을 거다.

내 말에 조연은과 이윤형은 허탈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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