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52화 (52/317)

# 52

푸른 바다 파티

일행을 이끌고 중앙을 가로지르게끔 방향을 잡았다. 우연인 척 고정 안전 구역에 도착할 수 있도록.

상성이 앞서다 보니 오히려 진행 속도는 14층보다 15층이 더 빠를 정도. 거기다 경험치 또한 여기가 더 좋다.

일행은 고정 안전 구역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원 레벨 15 상태가 되었고, 나는 레벨 16이 되어버렸다.

"경험치 효율도 나쁘지 않은데, 속도도 더 빠르네요. 이거… 빨리 16층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16층은 이전처럼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여긴 중간 보스 층이라 그럴 뿐. 나는 주하연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 남은주 씨를 생각하면 여기가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갑자기 왜 남은주가 나오는가. 주하연과 당사자인 남은주까지도 의아한 모습이다.

"안전 구역을 확보하고 저희가 빨랐다면 푸른 바다 파티를 찾아볼 생각입니다. 그래도 나쁜 사람들 같지는 않았는데… 죽게 둘 수는 없죠."

끄덕.

주하연과 나연은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서윤과 남은주도 크게 반대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고 나면 남은주 씨도 저 미노타우로스와 싸우게 할 생각입니다."

"…네에에에?!"

남은주는 깜짝 놀란 정도가 아니라 아예 경악하고 있었다.

"최근 남은주 씨의 성장이 무척 두드러집니다."

"맞아요. 어느새 육체 능력은 저보다 앞서기 시작했죠."

"…뭐 나를 따라잡은 지는 한참 됐지만."

"은주 언니가 엄청 빨리 강해지고 있기는 했어요."

"아무래도 남은주 씨는 위기 상황에서 빨리 성장하는 거 아닐까 싶어서요. 다수의 어그로를 관리하고 지키는 것은 제법 해 보셨으니 이번에는 강한 상대와 1:1을 해볼 생각입니다."

"과연. 확실히 일리가 있네요."

남은주가 강한 상대와 1:1로 맞서는 경험은 사실상 없었다.

나와의 대련 정도가 다였는데, 그건 논외. 아무리 긴장해도 한계가 있었다.

"그, 그럴 수가…."

남은주는 진짜 겁먹은 표정이었다.

이해가 가는 게, 현대인인 시절에도, 탑에 들어온 이후에도 저런 4m 크기의 괴물과 만난 적은 없을 거다.

끽해야 있는 가능성은 코끼리를 직접 본 정도뿐. 곰도 보통 4m는 안 된다. 그러니 저런 괴물과 1:1로 맞설 생각이면 신체 능력을 보정 받는 탑에서라도 공포에 질릴 만하다.

하지만 어차피 해야 할 일.

남은주는 못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한창 길을 막는 외뿔 미노타우로스 환영을 처리하고 다시 다음 공동으로 향하던 중, 이번에는 몬스터 대신 웬 신전이 나타났다.

5-15 공동. 내가 목표로 했던 장소다.

"…건물?"

"와, 오빠. 이거 그거 아니에요? 그 그리스의 신전!"

나서윤의 말대로 고난의 신전은 마치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다른 점은 마치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건물처럼 깨끗하고 파손이 없다는 점과 신비로운 은은한 흰빛을 내뿜고 있다는 것이었다.

2층에서 이름만 신전이고 낡은 교회 건물을 닮았던 잊혀진 신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일단 확인을 좀 해보자."

나는 곧바로 고난의 신전 내부로 향했다.

조심스러운 발걸음. 하지만 나는 이미 알다시피 이 주변에 위협이 될만한 것은 없었다.

신전 내부로 발이 들어가는 순간 메시지 창이 나타났다.

[고난의 신전에 입장하셨습니다.]

"…고난의 신전?"

내가 의아하다는 듯이 시스템 메시지를 읽자 일행이 반응했다.

"고난의 신전요?"

"네. 고난의 신전이라고 나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고난의 신전 내용은 간단하다.

중앙 제단으로 향하면 특수한 공간으로 이동되며, 거기서 자신의 수준과 비슷한 적들과 만난다. 적은 하나일 수도, 다수일 수도 있었다.

거짓된 공간인 그곳에서는 죽어도 죽지 않으며 죽음 즉시 공간에서 쫓겨난다.

빠져나오는 방법은 반대편에 등장하는 적을 모두 사살할 것. 그러면 죽을 때와 마찬가지로 공간에서 추방되며 보상을 받는다.

대게 보상은 식량과 금전 약간이지만, 10회 이상 클리어 하다 보면 능력치가 오른다. 단, 경험치는 전혀 주지 않아 레벨이 오르지 않는다.

근데 문제는 한 번 클리어 하기가 쉽지 않고, 고난의 신전을 이용하면 상상 이상으로 체력이 떨어져 연속적인 도전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 게다가 고난의 신전을 통해 능력치를 올리면 올린 만큼 더 강한 적이 나타난다.

10회 이상 클리어하면 능력치가 오른다고 하지만, 효율상 그냥 몬스터 잡고 레벨업하면서 능력치 계발하는 것이 몇 배는 더 빠르다.

효율이 극악이라고나 할까. 그렇기 때문에 차마 쌍뿔 미노타우로스의 환영을 잡지 못하는 이들이 16층으로 가기 위해 잠시 이용하는 것이 다인 공간이었다.

그렇기에 수련자들 사이에서 잊혀진 공간이 되었지만….

'2대 권왕의 등장으로 난리가 났었지.'

2대 권왕이 등장하고 그가 레벨은 10대 중반임에도 능력치가 평균 90을 훌쩍 넘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난리가 났었다.

그는 말했다. 자신은 '고난의 신전'에서 수련을 해 왔다고.

고난의 신전은 효율이 최악이지만, 레벨과 상관없이 능력치를 꾸준하게 올려주었던 것. 물론 그마저도 상한이 있어서 100은 찍지 못한다고 한다. 각 능력치별로 상한이 있어서 95쯤 되면 슬슬 메시지로 더는 능력치를 올릴 수 없다 한다고.

1~2 정도의 오차는 있다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정 수준이 되면 능력치의 성장이 사실상 정체되기 시작하는데, 고난의 신전은 그런 것이 없었던 거다.

분명 느려지기는 하지만, 정체라기보다는 둔화 정도의 느낌. 즉, 초반에는 효율이 최악이지만, 뒤로 갈수록 효율이 최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한계치가 낮은 재능 없는 이들 입장에서는 빨리 가 봐야 끝이 정해져 있으니 고난의 신전이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물론.

'나서윤 처럼 괴물은 해당 사항 없지만.'

진짜배기들은 쳐다도 보지 않을 장소였다. 그냥 만나기 힘든 몬스터들을 만나 경험 좀 쌓고, 죽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서 새로운 기술을 연습하는 정도의 의미밖에 없는 장소다. 이것도 굉장한 거긴 하지만.

나는 고난의 신전 탐색을 후로 미루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일단 이것보다는 다른 일이 급합니다. 여길 떠난다고 이 신전이 도망갈 것도 아니니 우선 다른 것부터 해결하죠."

"네.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는 곧바로 다음 공동으로 향했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는 메시지에 일행은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15층 고정 안전 구역을 발견하셨습니다.]

[현재 관리자가 없습니다. 관리자로 등록하시겠습니까? Y/N]

히죽.

예상대로 푸른 바다 파티는 15층 고정 안전 구역을 찾지 못했다.

나는 바로 Y 버튼을 누르고는 일행을 향해 말했다.

"찾았습니다!"

"네?"

"여기가 고정 안전 구역이에요!"

"…여긴 아직 5구역인데요?"

"하하. 모든 고정 안전 구역이 1-1 구역인 것은 아닌가 봅니다."

곧바로 다른 일행은 고정 안전 구역에 입장했고,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체감했다.

"와, 그럼 15층까지 우리 거예요?"

"그래. 뭐, 고정 안전 구역뿐이긴 하지만."

"…진짜 운이 좋네요. 이 길을 통하지 않았으면 저희도 헛고생을 할 뻔했어요."

상상만 해도 두렵다는 듯, 주하연은 몸을 살짝 떨었다.

그럴만하다. 어딨는지도 모르는 고정 안전 구역을 찾겠답시고 한동안 강행군을 해야 한다면 나라도 싫을 거다.

수련자들이 소환되는 구역은 1~10구역 사이에서 랜덤으로 결정된다. 하지만 그것이 구역의 끝을 말하지는 않는다. 구역 자체는 10구역을 넘어서도 존재했으니까.

나는 15층 고정 안전 구역의 설정도 이전과 같은 규칙을 적용했다. 푸른 바다 파티 말을 들어 설정을 바꿀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랬다간 1회차와 같은 부작용이 생길 수 있으니까. 만약 이번 회차에도 부작용이 여럿 생긴다면 바꿀 의향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최근 11층에 도착하는 파티들이 하나둘 늘고 있었다. 슬슬 상위권과 중상위권 이들이 하나씩 합류하는 모습.

중요한 시기였다.

원했던 목표를 달성하자 일행은 하루를 푹 쉴 수 있었다.

예상 이상으로 빨리 목표 중 하나를 달성했고, 쉴 때가 되긴 했으니까.

나는 휴식을 취하는 일행에게 말했다.

"쉬면서 들어 주세요. 어쩌다 보니 저희가 운 좋게 고정 안전 구역을 확보했습니다."

운 좋게. 나는 현 상황을 운으로 포장했다.

하지만 일행들이 보기에는 진짜 행운이기 때문에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정말 운이 좋았죠."

"길 선택은 오빠가 했잖아요? 오빠 진짜 감이 좋은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그렇네. 파티장 님이 한 선택 중에 잘못된 것은 거의 없었던 거 같아."

남은주는 나서윤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말했다.

"…뭐 신후야 원래 신기했으니까."

나연 또한 반쯤 동의하는 모습. 내가 회귀자라서 상당히 옳은 선택이 잦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튜토리얼 층에서 있던 일을 보면 항상 옳은 선택만 보여주진 않은 것 같은데… 물론 그마저도 의도적이었고, 다 좋게 해결되기는 했지만.

"흠흠. 아무튼 생각보다 일찍 고정 안전 구역을 확보했습니다. 거기에 특이한 신전까지 발견했구요. 신전에 대해 알아보고 싶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저는 푸른 바다 파티의 구조를 우선하고 싶습니다."

구조. 일행은 내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도 대충 감이 올 터다. 나처럼 상태 창을 보지 않더라도 대충 그들이 이곳에 어울리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으니까.

마력과 신체 스텟의 증가로 인한 강자를 구별하는 감각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그래 봤자 진짜는 동급이 아닌 이상에야 그런 감각으로 알아보기 힘들지만.

"앞서 말했듯, 찬성이에요. 신전은 신기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바다 그 사람, 꽤나 아까웠어요."

"좋은 사람 같았어. 나도 찬성."

"오빠가 하자고 했으면 해야죠."

"파티장 님이 하자는대로 하겠습니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신전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일행은 푸른 바다 파티의 구조를 우선하자는 내 의견에 모두 찬성했다.

역시 기본적으로 내 파티원들은 마음이 착한 편이다.

내 영향 때문에 우리를 우선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도덕 관념은 있는 편. 그래도 대체적으로 비도덕적인 일이라도 내 말을 우선하기에 도덕적인 것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나서윤은 조금 예외 같기는 하다. 별로 도덕적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한참 예민할 시기에 이런 곳에 소환되고 나를 만난 것이 큰 영향을 끼친 걸까, 아니면.

'원래 그랬던 걸까.'

가장 중요한 안건이 끝나자 남은 것은 자잘한 것들이었다. 파티 구출 이후에도 한동안 15층에서 사냥을 할것과 신전에 대해 알아볼 것, 그리고 설령 파티를 구한다고 하더라도 그쪽 파티와는 같이 행동하기 싫다는 의견이 있었다.

구해놓고 나 몰라라 하자는 건데, 이유는 단순했다. 진상수 파티 때문이었다.

"우릴 보는 눈빛이 기분 나빴어요.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요."

"…솔직히 한바다 씨는 조금 나아도 나머지는 조금 그렇네요. 특히 다른 파티로 보이는 남자들 넷은 싫어요. …신후 씨가 굳이 함께해야겠다면 참겠지만…."

"아뇨. 저도 그들과 함께할 생각 없습니다. 확실히 같이하고 싶지는 않더군요."

나연은 좀 찜찜한 듯했지만, 그래도 일행이 반대하니 별다른 말은 없었다.

역시 내게 물들긴 했다. 착하긴 해도, 위험하다 싶으면 차단한다. 그들을 우리 파티가 받아주지 않으면 15층에서 살아남기 힘든데도 불구하고 같이 행동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나연 또한 반대하지 않았고. 확실히 여기가 상성 좋은 곳이라고 해도, 목숨이 걸린 마당에 위험 요소가 높은 이들과 함께하고 싶지는 않겠지. 당연한 거다.

나는 마침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구출을 한다고 한바다 쪽과 같이 다닐 가능성은 낮았다. 수준 차이가 났으니까. 게다가 아무리 진상수가 쓰레기라고는 해도, 아직 좀 이기적으로 굴었을 뿐 직접적으로 악행을 하지는 않았을 터다. 그랬다면 그 정의로운 벽창호가 같이 다니지는 않았겠지.

그렇다보니 한바다가 진상수 파티를 먼저 버리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경험치 효율도 생각하면 같이 다니는 것은 마이너스 요인.

뭐 한바다 쪽 파티 세 명 만이라면 미궁에서 임시 동행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다. 영구 영입을 하기에는 사사건건 부딪칠 것 같아 꺼려졌다.

정의로운 벽창호는 다른 쪽에 써먹는 것이 훨씬 좋다.

논의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짧은 논의가 끝나자 일행은 모두 풀어져 본격적인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자 이야기 했던대로 푸른 바다 파티를 찾기 위한 탐색을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구역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상상 이상으로 빠른 속도의 수색이었지만 하루 만에 푸른 바다 파티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현재 탑 내의 최고 수준 파티답게 우리는 탐색 이틀째에 2구역에서 푸른 바다 파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제발, 제발 바다 좀 살려 주세요!"

만신창이가 되어 검 한 자루 겨우 들어 올리는 도적과 이미 의식 불명으로 보이는 한바다.

그리고 그런 한바다를 끌어안고 울고 있는 궁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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