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49화 (49/317)

# 49

푸른 바다 파티

'빌어먹을 에파토스.'

하필 에파토스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조언이 정말 도움이 된 것은 남은주나 주하연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건 정말 고맙다. 하지만 마지막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섹… 후, 아 진짜 이것밖에 없나?'

생각나는 핑계가 없었다.

잘 지내다가 갑자기 선을 긋는다. 이걸 최대한 신뢰에 금이 가지 않도록, 후폭풍이 가장 적을, 효과적으로 둘러댈 핑계가….

"어, 흐, 흠. 그, 그게 말입니다."

무척이나 어색한 표정. 그리고 급변한 말투.

주하연은 더욱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게 뭔데요?"

"그, 아, 후…. 진짜 민망하긴 한데요… 별거 아닌 이유라… 이미 해결하기도 했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전 알고 싶어요. 별거 아닌 이유라면, 밝혀 주실 수 없을까요? 지금도 신후 씨를 믿고 있지만, 그래도 확신까지 얻고 싶어요. 제게 조금 더 믿음을 주실 수 없을까요?"

진지한 주하연의 표정.

나는 망설이는 기색을 지울 수 없었다.

점점 흐려지는 주하연의 표정에 나는 결국, 이미지 손상을 각오하고 입을 열었다.

"…그게 말입니다."

"네."

"그, 꿈을 꿨는데요…."

"…네?"

"꿈, 꿈이요."

"네."

의아하다는 듯한 주하연의 표정.

나는 정말 말하기 싫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 꿈에요… 저희 일행이 나왔거든요?"

"…………네?"

잠시 이해를 못 하는 표정이던 주하연의 표정이 점점 변해간다.

의아함, 미묘함, 이해했다는 듯하는 표정과 반쯤 웃는 표정이 뒤섞이더니 곧바로 볼이 약간의 홍조를 띤다.

"아, 몽…."

"아, 아뇨.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냥, 꿈에 나왔는데 그게 말이죠?"

주하연은 이제야 납득이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런, 그런 이유셨구나… 하긴 그런 이유면 확실히 어색해질 만…."

나는 반쯤 포기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꿈에 나오긴 했는데,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진짜입니다. 그래서 뭔 방법 좀 없냐고 에파토스 님과 상담한 결과, 마력을 이용하면 억누를 수 있다고 하더군요."

"…네?"

"성욕이요, 성욕."

거울로 내 표정을 보면 해탈한 얼굴이지 않을까. 이게 무슨 짓인가. 내 이미지가….

참고로 진짜다. 성욕은 마력을 운용하면 억누를 수 있다. 특수한 방법으로 마력을 돌리면 가능하긴 하다. 어렵지도 않고, 알고도 있다. 지금도 가끔 쓰고 있기는 하고.

응용하면 조루를 개선하는 데도 쓸 수 있다. 성관계 중에는 어지간한 마력 운용 능력이 없는 이상 흥분 상태라 어렵긴 한데,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다. 평시에는 어렵지 않고.

"…그거 부작용 같은 거 없나요?"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만, 심각한 건 아닙니다."

그냥 오래 쓰면 한동안 발기부전이 되는 정도?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니까 별거 아니다.

"그런, 참으면 몸에…."

말을 하던 주하연이 입을 다문다. 탑에 갇혀 있는 상황에, 뭐 어쩌라고? 그녀도 답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혼자만의 시간이라도 보장해 드릴까요?"

"필요 없습니다."

"성욕은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 자연스러운 건걸요. 몽정도…."

"아니, 아니라니까?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요?"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어요. 정 힘들면 제가…."

주하연은 말하다말고 입을 막았다.

그러더니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 아니, 방금은…."

"…네? 뭐라고 하셨죠? 잘 안 들렸는데…."

나는 그냥 못 들은 걸로 하기로 했다. 여기서 주하연이랑 그런 관계가 되었다간 나머지, 특히 나연 자매와 어색해질 수가 있었다.

"못, 못 들으셨다면 괜찮아요. 별 얘기 아니었어요. 그, 그렇네요. 그런 이유라면 그럴 수 있어요. 완전히 이해했어요."

"…다른 일행 중에, 제 행동 때문에 지금까지 앙금이 남은 사람 있나요?"

"아뇨, 나연이는 자기가 전에 했던 행동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해서, 변한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은주는 최근 실력이 늘어서 불안감이 조금 줄어든 것 같더라고요. 서윤이는… 괜찮은 것 같아요. 아니,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본인이 뛰어나다는 것을 인지해서인지 그다지 불안해 보이지는 않네요."

"…부디 다른 일행에게는 비밀로 부탁드릴게요."

"그래야죠. 특히 서윤이는… 미성년자인걸요."

그래. 그렇다. 젠장.

"흠, 흠. 그래도 말씀해 주셔서 고마웠어요. 말하기 정말 힘드셨을 텐데…."

그게 추궁한 사람이 할 말인가.

"…아닙니다."

"그래도 신후 씨가 사람이긴 했네요. 솔직히 더 친근해진 기분이에요."

"…저도 사람 맞습니다만?"

"하지만 제가 본 신후 씨는 그냥 초인이었는걸요. 1층은 함께 하지 않았지만, 연이랑 서윤이에게 들은 바로는 혼자서 절반 이상의 고블린을 처리하고 사람들을 구한 데다, 2층에서는 기지로 저희를 살려주고, 3층에서는 상태 창도 없는데 혼자서 초인처럼 활약하고, 4층에서는 자기 몸 버려가면서까지 파티원들 살리겠다고 마지막까지 남아 희생하고…. 그 외에도 이제껏 신후 씨가 보여준 모습들은 하나같이 같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말 그대로 특별한 무언가 같았어요."

주하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런 얘기 들으니 신후 씨가 더 가깝게 느껴지네요. 가끔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어떻게 보면 좋은 기회가 된 것 같았다. 이런 인간적인 면모를 안다는 것은 더 가깝게, 정이 든다는 뜻이니까. 정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섭다고 하지 않던가.

그 대가가 너무 커서 그렇지.

내가 약간 풀죽은 기색을 보이자 그것도 귀엽다며 주하연이 웃는다. 조금 더 친했으면 머리라도 쓰다듬을 기세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주하연에게 말했다.

"그럼 이야기는 충분히 한 것 같군요. 목표는 14층입니다. 거기서 레벨과 능력치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신후 씨. 다른 애들한테도 말해 놓을게요."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꾸벅.

주하연은 내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이후에 떠나갔다.

…한 번 실수한 게 오래도 간다. 결국 이미지까지 말아먹었다.

비밀로 해 달라고 하긴 했는데, 여자의 우정은 공유라고 저렇게 친한데 비밀이 지켜질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지금 당장은 몰라도 훗날 분명 밝혀진다.

빌어먹을.

나는 고개를 젓고 휴식을 취했다.

식사 중에 주하연의 묘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간단히 무시했다.

다음 날이 되어 분노의 사냥을 시작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날뛰었다. 그 때문일까. 하루 만에 다음 층으로 향하는 통로가 발견되었다.

이번 층은 묘하게 빠르다는 생각을 하면서 14층으로 이동, 마찬가지로 고정 안전 구역을 확보하고 사냥에 매진했다.

내 예상은 적중했다. 남은주의 실력과 스텟은 빠르게 성장했다.

잠재력에 걸맞지 않는 속도. 저 정도면 잠재력 '중'보다도 빠르다. 마력 스텟을 제외하면 잠재력 '중상'인 주하연보다도 오히려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절박한 걸까? 바른길을 알려 주기는 했지만, 그대로 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일 텐데….

생존 욕구는 어지간한 재능보다 더 위대하다더니 딱 그짝이다. 그녀는 어느새 마력을 제외한 신체 스텟 3개가 20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꾸준한 사냥을 통해 일행의 레벨은 어느새 13이 되었고, 나는 14에 근접한 상황이었다.

둔화 속도를 본다면 슬슬 다음 층을 향할 때. 15층은 중간 보스 지점이라 조금 까다롭다. 게다가 그 신전도 존재하는 장소.

'고난의 신전.'

15층에 존재하는 이 신전은 상상 이상으로 대단한 장소다.

내가 만약 재능이 '중'이나 '하'수준이었더라도 회귀만 했다면 랭커는 못 되도 어지간한 랭커에 가깝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것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이 고난의 신전 때문이다.

'권왕.'

이 신전을 이용해 탄생한 2대 권왕. 랭커에 근접했다는 1대를 때려죽이고 그 칭호를 빼앗았던 2대 권왕은 이곳에서 수련을 마치고 단숨에 하층과 중층을 돌파, 당시 최전선까지 순식간에 따라온 괴물이다.

그래도 랭커에는 닿지 못했다. 그는 결국 다른 랭커의 손에 죽었다.

단지, 이 고난의 신전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2대 권왕이 이곳에서 수련한 시간은 10년 정도. 그 시간이면 탑의 상층에 거의 도착한 시점이라 어지간한 보상을 선점할 수 없다.

그래서 난 이곳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다. 그게 아쉬운 점이었다. 훗날 성장의 한계치에 달했을 때, 몇 달만이라도 이 고난의 신전을 쓸 수 있다면 나는 최단 시간 내에 랭커가 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이 미궁은 21층에 도달하는 순간 되돌아갈 수 없는 장소가 된다.

21층 이후로는 쉽게 이전 층으로 돌아가거나 할 수 있지만, 1층부터 20층은 예외다. 권왕 이후 고난의 신전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알게 된 사람들이 하나같이 20층 이전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오늘치 전투를 마치고 고정 안전 구역으로 향했을 때, 진상수 일행이 13층 고정 안전 구역에 도착했다.

최근 11층 고정 안전 구역에 파티들이 하나둘 입장하고 있었다. 슬슬 상위권 이들이 치고 올라오는 시기다.

어느 순간이 되면 중위권부터 폭발적으로 미궁에 진입하겠지.

우리 파티와 진상수 파티를 제외하면 12층의 고정 안전 구역에 도달한 놈들도 없을 지경이다.

확실히 우리 파티를 제외하면 상당히 우수하다.

그 사실을 일행에게 밝히자 의아하다는 기색이었다.

"저희가 예외적으로 강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맞다. 에파토스도 그리 말했고.

"실제로 8층에서의 전투라던가, 다른 사람들을 보면 저희가 명백하게 앞서 있는데… 벌써 13층이라니…."

주하연이 말을 흐리자 나연이 말을 이어받았다.

"정말 세상은 넓네. 신후 같은 사람이 또 있는 걸까?"

없다. 나중에라면 모를까, 지금 당장은 랭커들도 나만큼 강하지는 못하다.

내 전적인 지원을 받은 나서윤도 그 압도적인 재능과 고유 특성으로 마력 30대 후반을 바라보고 있을 뿐, 신체 스텟은 30대 초반에서 놀고 있었다.

레벨이 부족한 거다.

상급 재능인 나연이 이제야 마력 30을 달성했고 나머지 신체 스텟은 여전히 10대다.

최상급 재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건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예이며, 현재 내 스텟 상태가 얼마나 규격 외인지 알 수 있는 예이기도 했다.

나처럼 이끌어주는 자가 없는 랭커는 결코 내 상대가, 아니 나서윤의 상대조차 되기 힘들 거다.

나연의 말에 주하연이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건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사냥보다는 그냥 빨리 층을 올라오려는 것 같아요."

"…왜요?"

"…우리가 목적일지도."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는 모른다는 말을 덧붙였다.

주하연의 말에 일행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뭐, 어디까지나 예상이니까요. 그래야 할 이유도 모르겠고요."

"…안전 구역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혹시 몰라 첨언했다.

"안전 구역이요?"

"다른 안전 구역을 손에 넣어 봤다면 관리자의 권한이 얼마나 큰지 알 테니까요. 그게 목적일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그게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진상수. 한때 푸른 바다 길드의 전신인 푸른 바다 카르텔의 보스였던 놈. 1회차의 경험 때문에 의심이 간다.

그 잠재성을 깨달아 일찌감치 선점하려고 달려드는 것이 아닐까? 15층은 중간 보스 구역이라 1-1 구역에 고정 안전 구역이 없지만, 저들은 모르니까.

내 예상에 일행은 이제 걱정을 넘어 분노하고 있었다.

"…오빠한테 손대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글쎄, 굳이 우리랑 싸우려고 할까? 다음 층으로 가서 선점하려고 할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맞아. 신후야. 방심하지 마. 만약 우리를 찾아오면 뒤로 가 있어."

"…내가 전위인데?"

"그래도. 혹히 모르니까."

"맞아요 그러시는 게 좋을것 같아요 신후 씨."

"저도 조금 성장했어요. 파티장 님을 위해서라면 전위로 설 수 있어요."

일행은 한걱정을 했지만, 나로써는 솔직히 걱정이 되지 않는다. 실제 목적이 그런 거면, 7명이라도 우리가 확실하게 이긴다.

애초에 저들 중에는 마법을 쓰는 놈들은 아예 없을 가능성이 높다.

실력도 우리가 훨씬 뛰어날 테고. 그래도 시작부터 따라오는 놈들이 저딴 쓰레기면 기분이 좋지 않기는 하다.

빨리 20층에 도달해서 아래층을 돌며 쓸만한 인맥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입은 그때 해도 늦지 않다.

주하연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진상수 일행. 그들은 레벨업이나 스텟을 올려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대신, 빠르게 미궁을 오르고 있었다.

우리가 레벨 14에 도달해 15층으로 향하기 위한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공동을 청소하던 와중, 우리는 그들을 마주칠 수 있었다.

진상수 파티. 아니, 푸른 바다 파티였다.

그, 아니 그녀가 그렇게 소개했다. 자신들은 푸른 바다 파티라고. 그리고는 우리를 향해 물었다.

"당신들이 유신후 파티야?"

"…그렇습니다만?"

일행은 다른 파티가 나타나자 곧바로 경계하며 나를 후열로 밀어버렸다. 그리고는 주하연이 나 대신 앞으로 나섰다.

"당장 고정 안전 구역 조건 풀어!"

강렬한 외침. 한 여성이 우리 파티, 정확히는 파티의 유일한 남자인 나를 보며 외쳤다.

그녀는 푸른 바다 파티의 리더, 한바다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