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44화 (44/317)

# 44

미궁 돌입

[11층에 진입하였습니다.]

[미궁을 돌파하세요.]

11층에 진입하자 곧바로 메시지 창이 나타났다.

이제부터는 튜토리얼이 아니다.

따라서 층 미션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 미궁을 돌파하라는 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별 상관은 없었다.

앞으로 탑을 오르는 것은 권장되지만, 강제가 아니기 때문에 탑 진행을 포기하는 이들이 생긴다.

탑을 오르지 않고 탑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 탑을 오르는 것을 포기했기에 탑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동시에 도전을 포기하고 자신이 충분히 살 만한 곳에서 버티는 것 뿐이기에 죽지도 않는다.

인간의 뛰어난 적응력을 선보이며 지옥 같은 탑 안에서조차 적응해 살아가는 이들을 '낙오자'라 불렀다.

탑은 낙오자들에게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으며, 길드는 이런 낙오자들을 착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오자들은 결코 탑을 오르지 않는다. 그저 노예처럼 순응하며 살아갈 뿐.

그러나 나는 가이아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이런 낙오자들은 탑이 제 역할을 끝냈을 때,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탑 밖으로 쫓겨난다는 것을. 그 위치는 그들의 고향, 지구다.

나는 가족을 볼 생각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구를 구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길드처럼 강력한 착취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들을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줄 생각도 없다.

나는 그들에게 생존만을 원한다면 그만한 대가를 치루게 할 생각이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낮은 가능성만을 믿고 최전선에서 싸울 이들을 지원이라도 해야지. 그들도 수련자다. 비록, 본의로 끌려온 것은 아닐지라도 그들에게는 자신의 고향 차원을 구할 의무가 있었다.

낙오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들을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다. 물론, 과거 길드처럼 강력한 착취는 어렵지만, 거래라는 명목으로 충분히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명목상 대의와 명분을 세우고 갑이 되어서 갖가지 이권을 틀어쥐고 있다면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이다.

"이번엔 미궁이라네요. 음… 시련이… 없네요?"

"튜토리얼은 끝났으니까요. 이제는 저희 스스로 올라가야만 하는 듯합니다."

"그렇네요. 스스로, 라…."

올라가지 않으면 어찌 되냐는 물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물어도 확실히 알 방법은 없으니까.

그녀도 그저 추측만을 할 뿐이었다. 그리고 은연중 내가 멈출 생각이 없음을 눈치챈 듯했다.

주변을 둘러보자 평범한 공동에 우리는 서 있었다.

사방에서 빛나는 발광석은 주변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이 공동은 그다지 안전하지 못하다. 잠시만 비어져 있을 뿐. 곧 몬스터들이 쳐들어올 예정이다.

미궁은 마치 개미굴과 같은 형태였다. 공동 - 통로 - 공동과 같은 모습으로 수없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게다가 한 공동에 통로가 하나만 붙어 있는 경우가 드물다.

마치 거미줄처럼 한 공동은 여러 공동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범위가 어마어마하다.

11층부터 20층까지는 NPC도, 거주민들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수련자들이 알아서 헤쳐나가야 하는 끔찍한 구간이다.

식량과 물, 휴식, 수면, 하다못해 무기 손질이나 빨래 등도 직접 해야만 한다.

그러나 아주 죽으라고만은 하지 않는다. 미궁 자체가 시스템이 만든 던전 취급이라 몬스터를 사냥하면 식량 정도는 얻을 수 있고, 때때로 물을 얻을 수 있는 공동이 존재한다. 게다가 미궁에는 안전 구역이라는 곳도 존재했다.

시스템상으로 지정된 일부 공동인데, 그곳에는 절대 몬스터가 쳐들어오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안전 구역이, 제일 먼저 들어간 놈이 선점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시스템상 규칙이 그렇다.

그것을 이용해 수많은 악행이 이루어졌다.

선점자는 생각 이상으로 권한이 막강했다. 내부 거주 시간이나 거주할 인원을 제한할 수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인원은 쫓아내는 것까지 가능하다.

그로 인해 선점자가 왕처럼 군림하며 수많은 수련자들을 노예처럼 부려먹었다.

대부분의 안전 구역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소멸하고 다른 곳에 생긴다. 하지만 극히 일부, 무척이나 크고 물이 샘솟으며 휴식하기 좋은데 영구적이기까지 한 안전 구역이 존재한다.

각 층에 대개 하나에서 두 개 정도가 있는데, 이곳을 중심으로 일종의 카르텔이 생겨난다.

물을 팔고, 안전 구역에 잠시 거주하는 조건으로 식량을 받으며, 새롭게 생기는 안전 장소의 위치를 보고 받아 카르텔 휘하에 넣는다. 후에는 카르텔이 너무 커져 카르텔 소속이 아닌 다른 인원이 안전 구역을 차지하면 구역이 해제된 후 차지했던 놈을 죽여버리기까지 한다.

그렇게 안전 구역을 이용하는 대가로 식량, 전투 노예, 실력자는 카르텔 인원으로 끌어들이고, 반반한 여성이나 남성은 성노로 지내며 힘겹게 다음 층으로 나아간다. 일부는 거주하는 대가로 하루 100대 맞기라는, 일종의 인간 샌드백을 지시하는 놈들도 존재했다.

다행히 다음 층으로 향하는 입구는 15층과 20층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랜덤으로 생겨나기에 탈출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다음 층으로 인원이 계속 올라간다는 것은 카르텔의 먹이가 줄어든다는 것이기에 카르텔들은 그런 것을 필사적으로 막지만, 다음 층으로 가면 되돌아오지 못한다. 그걸 이용해서 도망치는 인원이 많았고, 하층의 카르텔은 서서히 붕괴한다.

문제는 위층을 가도 그런 카르텔은 금방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미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는지 알아챈 이들이 재빨리 선점하며, 그 폐단은 수많은 이들의 죽음으로 완성된다.

그러므로 내가 해야 할 일은 이 고정 안전 구역을 내가 선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규칙만 설정하고 다음 층으로 향하면 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믿을만한 사람에게 관리를 맡기는 거지만, 아직 인맥이 부족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선을 지킬 줄 아는, 비교적 덜 쓰레기들과 성정이 괜찮은 이들, 재능 있는 이들과 인맥을 만들고 내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그래도 선점으로 조건만 설정해 놔도 악용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고, 아직 초반에는 선한 이들도 제법 된다. 과거에는 맥없이 졌지만, 지금은 다를 터. 그리고 11층이나 12층은 아직 괜찮다. 13층 이후부터가 본격적으로 카르텔화 되니까.

나는 내가 소환된 공동에 연결된 통로를 확인했다.

3-28

찾았다. 이 통로는 3-28구역으로 가는 길이다.

목표인 고정 안전 구역은 1-1구역. 아무리 미궁이라고 해도, 하층의 미궁이다. 시스템이 약간의 힌트 정도는 준다.

목표를 확실히 정한 나는 일행을 향해 말했다.

"그럼, 탐험을 시작하죠. 일단 대형을 갖춘 뒤로 어떤 몬스터가 있는지 확인합니다."

현재 구역에서 연결된 공동은 3개. 그중 2구역에 가까운 쪽을 선택해 이동했다.

진형은 나를 선두로 약간 뒤에 나서윤, 그 뒤로 후열인 나연과 주하연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뒤로 조금 가까운 위치로 남은주가 최후방 키퍼를 맡는다.

현재로써는 나서윤이 키퍼 겸 근접 딜러로 상황에 맞춰 행동한다. 나서윤의 최우선 행동 방침은 후열을 보호. 그녀 또한 키퍼에 가깝다.

사실상 전열은 나 혼자다. 주하연이 사제가 되면서 전열이 부족해졌다.

나서윤은 아직 마법은 쓰지 못했지만, 천천히 스킬로 얻은 개념들을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당분간은 순수 전사처럼 싸워야 하겠지만.

약간은 긴 통로를 따라 이동했다. 다음 공동에 거의 도착하자 나는 일행을 뒤에 둔 채 앞서 정찰을 시도했다.

공동 내부는 여전히 발광석으로 인해 적당히 밝은 상태였다.

나는 지형상 그림자가 지는 곳으로 향해 통로 끝에서 조심스럽게 공동 내부를 살폈다.

내부에는 갈색 털을 지닌 개와 닮은 형태의 몬스터가 존재했다. 특이한 점은 이족 보행이고, 손에 나무 방망이기는 하지만 무기를 들었다는 것.

놀이었다.

미궁 구간은 고블린과 놀, 그리고 우리 수련자들이 3파전을 치룬다. 고블린과 놀 또한 서로 반목하며 싸우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번에 온 공동은 마침 놀이 점령한 구간인 듯했다.

나는 곧바로 전투를 하는 대신 정보를 일행에게 알렸다.

"새로운 몬스터요?"

"네. 그렇습니다. 개와 닮았더군요. 특이한 점은 두 발로 서있다는 거고, 손에는 방망이를 들고 있다는 점 정도일까요."

이족 보행 하는 개라는 말에 일행은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나는 에파토스의 조언도 실천하고 딱딱한 분위기도 바꿀 겸 가볍게 말했다.

"별로 귀엽지는 않더군요. 은근히 침도 질질 흘리고…."

일행의 얼굴이 더 딱딱해진다. 역효과였다.

"뭐 그래도 그리 세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직감이랄까요.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봅니다."

"신후 씨가 그리 말한다면 아마도 맞겠죠."

내 몹쓸 농담은 아무래도 그냥 지나가기로 한 듯했다. …에파토스의 말을 실천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선을 없애는 건 알겠는데, 어떻게 친해지는 거지?

전투 직전이기에 잡다한 상념을 지우고 일행을 향해 말했다.

"우선 상황을 보는 게 중요합니다. 남은주 씨, 되도록이면 도발은 쓰지 마세요."

"…어째서요?"

"우린 아직 그 효과를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에 한 두 마리 남길 테니, 그때 실험하죠. 우선 적의 정보를 모으며 우리가 상대할만한 놈들인지 확인합니다. 수는 열 두 마리. 나연아, 카사 말고는 되도록 쓰지 마. 주하연 씨도 실드는 걸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는 나서윤을 향해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번에는 키퍼다. 후열을 무조건 지켜야 한다?"

"네, 오빠. 걱정하지 마세요."

나서윤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솔직히 일행 중 가장 어린 그녀가 제일 믿음직스러웠다.

"그럼 돌입합니다. 강해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을 우선 하겠습니다."

나는 제일 앞장 서 일행과 거리를 두었다.

일행은 내가 혹여나 잘못될 것을 걱정하는 듯했지만, 이전에 말했듯 최근에는 내 말을 무척이나 잘 따르고 신봉한다. 그렇기에 큰 반발은 없었다.

아마 내가 큰 실수를 해서 한 번쯤 사경을 헤매지 않는 이상에야 변하지 않을 듯했다.

너무 수동적인 것은 좋지 않지만, 솔직히 편하긴 했다.

공동으로 들어가자 아까와는 달리 금세 나를 발견한 놀들이 컹컹 짖어댔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아까는 잠시 살피고 갔을 뿐이라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그래도 개는 개. 내가 떠나고 나서 뒤늦게 남은 냄새를 맡은 듯했다.

나는 나연을 향해 외쳤다.

"먼저 쏴!"

"카사, 파이어 볼!"

내 지시에 나연은 곧바로 정령 마법을 사용했다.

콰앙!

마력이 늘었기 때문인지 과거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의 위력이 보인다.

"컹! 컹! 끼잉!"

단숨에 세 마리의 놀이 숯덩이가 되어 침묵했다.

"…어?"

나연은 스스로하고도 조금 놀란 듯했다.

그럴 만도 하다. 최근 마력이 한 번에 4가 올랐다고 했으니까. 그래도 10대의 4보다는 20대의 4가 편차가 크니까. 위로 갈수록 이런 현상은 심해지기도 하고.

나는 곧바로 앞으로 달려가며 방망이를 휘두르는 놀에게 마주 검을 휘둘렀다.

스걱-

약간의 마력이 깃든 검은 방망이를 손쉽게 잘라내었고 이내 놀의 몸까지 양단한다.

열 두 마리 중 1/3에 해당하는 4마리가 순식간에 살해당하자, 남은 여덟 마리의 놀은 한껏 당황한 기색을 비췄다.

개들이 당황하는 기색에 반쯤 어이가 없었다. 개들도 저런 표정을 짓나? 의문도 잠시, 지금이 기회임을 알고 나는 곧바로 나서윤을 향해 외쳤다.

"별거 아니다! 고블린보다 약간 세! 전사 고블린 보다 약간 위! 서윤이는 나에게 합류해!"

"네!"

나서윤은 내 지시에 기쁘다는 듯이 달려왔다.

나는 그런 나서윤을 향해 말했다.

"두 마리는 살려 놔! 포메이션 2번으로! 나연이는 혹시 모르니 주변을 경계해!"

포메이션이라고 해 봐야, 아주 단순하다. 수비 우선인지, 공격 우선인지, 도주 우선인지에 따라 나눴을 뿐이고, 세부로 들어가도 순서에 약간 변화를 줄 뿐인 별거 아닌 행동이다.

하지만 급박한 상황이 있을 수도있고, 일행이 미리 전술적 움직임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해 도입했다. 지금 상황에 굳이 포메이션 어쩌구 할 필요는 없지만, 이럴 때부터 미리미리 연습을 시켜 놔야 한다.

포메이션 2번은 공격. 나서윤이 전위, 근접 딜러로 투입되고 주하연은 그런 나서윤을 주로 보호하는 것을 제외하면 별거 없었다. 나는 거기서 본래 포메이션에는 없지만 따로 지시를 통해 나연에게 공격 대신 주변 경계를 지시했다.

"히얍!"

촤악!

컹! 끼잉….

"약하네…."

나서윤은 단숨에 갈색 놀을 베어버리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서윤이 치열한 전투를 즐겼던가?'

미묘하게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면 어쩌면 쉬운 전투를 싫어하는 지도 모르겠다.

나서윤은 내 지시대로 두 마리에게 상처를 입혀 거동을 불편하게 만들었을 뿐, 죽이지는 않은 채로 싱겁게 전투가 끝났다.

일행의 수준이 너무 높아져 버렸다.

고블린 전사보다 약간 위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갈색 놀은 마력을 제외하고 평균 능력치가 10대는 된다.

우리 일행을 제외하면 12마리일 경우 5인 파티가 조금 버거워할 수준. 튜토리얼을 졸업한 평범한 수련자의 능력치는 마력을 포함해 평균 10~11수준. 마력이 문제라 그렇지, 신체상으로는 갈색 놀보다는 낫다. 수가 많아서 문제지.

그런 의미로 남은주의 성장은 우리 일행치고는 너무 느렸다. 내가 지원해줬는데도 이 정도라면 정말 절망적인 속도다. 곧 있으면 슬슬 다른 파티에게도 따라잡힐 수준. 이미 상위권이거나 잠재력 높은 이들은 이미 남은주를 추월했을 터다.

"둘 남겼어요! 오빠."

"그래 잘했다."

전투가 얼마나 일방적이었는지 나와 나서윤의 갑옷 위에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피가 튀는 것을 피하면서도 전투가 가능한 수준. 물론 평소에도 피를 피하기 위해서 쓸데없는 움직임을 보였다면 훈계를 했겠으나, 지금은 충분히 용인될 만큼 널널한 상황이라 그냥 지나가기로 했다. 내게 배운 나서윤이 그렇게 허술할 리도 없고.

가벼운 칭찬에 나서윤이 헤헤거리는 웃음을 짓는다.

나는 얼핏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아까 아쉬워한 이유가 전투가 너무 쉬우면 칭찬을 받기 힘들어서 그런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아닐 터다.

전투가 너무 쉬우니 나마저 긴장감이 흐트러진다. 솔직히 15층 전에는 위험이 없기도 하고.

"우선 새로 얻은 스킬 좀 시험하죠."

정보가 부족하다. 나야 다 알지만, 일행은 아직 체감을 하지 못하니까.

나는 잡생각을 지우고 일행을 향해 지시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