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43화 (43/317)

# 43

해소

"…균열…이라뇨…?"

에파토스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히 자네 일행은 자네를 중심으로 기형적인 의존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네. 그나마 나연과 나서윤은 서로 혈연이라는 특성이라도 존재하지만, 최근에는 그것도 서서히 금이 가는 듯하더군."

"…어째서…."

"나서윤은 나연보다 자네를 더 의지하기 시작했네. 이유는 나도 모르지. 그저 난 내가 본 그대로를 자네에게 전할 뿐일세."

에파토스는 추측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말했다.

"아마 이전부터 무슨 감정이라도 있던 듯하네. 8층 때의 사건이 나연에 대한 나서윤의 반감이 터져 나오게 된 시발점이 된 듯허이. 그래도 자네와 잘 풀었고 자네 말을 잘 듣기로 했으니 넘어가는 듯하더만… 이번에 자네가 틈을 주지 않는 것을 보고는 그게 나연 탓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묻는 걸세. 자네, 왜 여성 진들에게 틈을 허락하지 않는 겐가? 나연은 어찌할 줄 모르고 있고 나서윤은 불안에 떨고 있네. 남은주는 불안을 넘어 아예 공포를 느끼는 수준이지. 제가 부족한 것을 아니까. 버려질까봐 아예 덜덜 떨고 있어. 가장 이성적인 주하연마저도 요즘은 간혹 염려를 드러낼 정도니… 어떤 상황인지 알겠는가?"

나는 한참을 침묵했다.

내가 만든 관계다. 나에게 의지하도록, 나를 떠나가기 힘들게 되도록 유도했다. 그런데 이제는 다시 호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1회차를 답습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내가 만든 관계를 스스로 흔들고 있었다. 어쩌면, 이게 1회차보다 더 최악의 행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한참을 고민했고, 생각해 봤지만 이 사람 말고는 털어놓고 조언을 받을 사람이 없었다.

누구에게 말한단 말인가? 일행에게? 턱도 없다. 다른 모르는 사람에게 말한다? 말하고 죽여야 할 판이다. 그런 의미로 에파토스는 객관적으로 날 봐줄 수 있고 이렇게 조언을 해 주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나서며, 나를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다. 그렇기에 나는, 고민 끝에 내 생각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기로 결정했다.

"…제 1회차는 정말 호구같았습니다."

에파토스는 내가 입을 열자 조용히 경청했다.

나는 조용히 1회차의 내 행적을 천천히 풀어내었다. 자신이 주체가 되지 않는 삶. 조연에서 단역으로 단역에서 엑스트라로 갈수록 추락해갔던 내 1회차의 기억을 담담히 읊었다.

"그래서 제 위로 아무도 없게 되었을 때, 다시금 주연이 되겠다고 최대한 발버둥 쳐 보았습니다."

해체나 다름없는 길드의 잔여 인원을 끌어들이고, 다시 파티를 창설하고, 실력을 올리고 아이템을 구하고 그렇게 상층에 도전했다.

그리고 한 층을 오르지 못했다. 그저, 상층을 밟아 보았을 뿐.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죽인 존재는 거인이었다.

"결국 아무 의미 없이 실패했죠. 그리고 진실을 알아버렸습니다."

지구는 망했다. 그것도 한참 전에. 그 진실에 나는 자포자기 해버렸다.

"제가 선택된 것은 제가 잘나서도, 용감하고 사명감이 넘쳐서도 아닙니다. 그냥, 저 말고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 내 상황이나, 생각을.

그리고 나는 9층에서 했던 고민을 에파토스에게 털어놓았다.

"두렵습니다. 이번 회차는 정말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것도 존재할 줄도 몰랐던 마지막 기회요. 에파토스 님도 말씀하셨지만, 회귀자들이 성공하는 경우는 정말 드뭅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정에 쉽게 휘둘린단 말입니까? 저도 인간이니 감정이 있습니다. 생길 수는 있어요. 하지만, 거기에 휘둘려선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정에 휘둘려서 1회차보다 못한 결과가 나올까 봐, 그렇게 다시는 제 가족을 보지 못할 까봐 그게 너무 두렵습니다."

1회차의 자신을 반복할까 봐. 나서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그냥 퍼주기만 할까 봐. 또 도망치고 마지막 기회마저 허무하게 날려버릴까 봐. 그게 너무나도 무서웠다.

아니면 되려 너무 정을 준 나머지 일행을 위험에 집어넣는 것을 망설일 수가 있었다. 애초에 거인이 쳐들어온 지구에 돌아간다는 것 자체가 자신을 포함한 일행을 죽음에 몰아넣는 행위다. 정말 상상하는 최고 수준으로 스스로를 무장하고 성장한들, 조금만 삐끗하면 거인에게 죽는다. 거인은 그만큼 강대한 존재다.

"그래선 안 됩니다.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정말 무서워해야 할 것은 이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리는 겁니다. 전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 제 가족을 다시 보기 위해서는 뭔 짓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제가 정에 휘둘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선을 그었다. 더는 휘둘리고 싶지 않아서. 그런 내 말을 경청하던 에파토스는 내 말이 끝나자 담담하게 대답했다.

"바보 같은 짓이군."

나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렇게 해도 실패하기 십상이네. 자네에게 분명히 말하지. 혼자서는 결코 자네 세상을 구할 수 없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면서 그런 생각을 하나? 자네는 차라리 저들을 아예 믿을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야 했어. 거기서 선을 그을 필요는 없었다는 말일세."

"…하지만…."

"자네, 그렇게 스스로를 고립시키면 자네가 언제까지 버틴다고 보는가? 내가 아는 인간은 그렇게 정신적으로 강하고 튼튼하지 못해. 대부분이 그렇지. 그리고 자네는 그 대부분에 속하는 인간일세."

에파토스의 말에 반론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 짧은 시간에 벌써 정이 든 나다. 1회차의 기억 때문에 인격적으로 상당히 마모가 된 나다. 그리고 나는 그만큼 정, 친애, 우정, 사랑 등을 갈구하고 있었다. 가족에 집착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차라리 자네도 저들에게 기대게. 그녀들로부터 온기를 찾고 스스로를 충전해. 차라리 그게 더 낫겠군. 자네라는 존재가 마모되어 쓰러지는 것보다야 그게 낫겠어."

"제가 1회차와 같은, 실패의 길을 걸으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이미 그런 걸로는 안 된다는 걸 아는 자네가? 자네는 약하지만 멍청하지는 않네. 아니, 지금 하는 꼴을 보면 좀 멍청하군. 하지만 아주 바보는 아니라고 믿네. 자네는 안 될 걸 알면서 정에 휘둘릴 놈은 아니야.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에파토스는 말을 이었다.

"자네가 새로운 인연이 생겼다고, 과거의 가족을 버릴 놈으로도 보이진 않는군."

나는 이번에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렇네. 그러니 걱정 말고 새롭게 소중한 존재를 만들어도 된다네. 그게 자네에게도, 자네 일행에게도 좋은 일일 터. 그렇게 된다면 자네의 세계를 구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겠지."

마음이 안정되면 목표를 향해 더 빠르게 달릴 수 있다. 에파토스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응? 자네 일행들 마음도 받아 주고, 마음 터놓고 가까이 지내고, 불안도 해소하고, 섹스도 하고, 그러란 말일세."

…뭐?

"…네?"

"뭔 못 들은 척인가? 뻔히 들었으면서? 그 신체 능력으로 못 들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니 잘 나가다가 뭔 개소리야.

내 얼굴을 본 에파토스는 되려 자신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 지금 섹스 무시하나? 그게 사람 마음을 얼마나 안정시켜주는 줄 모르는 건가? 설마 이제껏 살면서…."

"아니아니, 경험은 있습니다만…."

"쯧. 뻔하군. 그냥 욕구나 풀자고 서로 짐승같이 엉겨 붙었겠지. 1회차가 왜 망했는지 알만하군."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인간은 나약해서 기댈 존재가 필요한 법일세. 자네들이 무슨 홀로 존재하는 드래곤 같은 존재인 줄 아는가? 인간에게 관계란 정말 중요한 것일세. 뭐 동료간 섹스가 내키지 않는다면 딱히 강요는 하지 않겠네. 하지만 마음은 터놓는 게 좋아. 지금처럼 대놓고 선 긋지 말고."

"…뭐 알겠습니다."

마지막이 이상하긴 했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 알고 있던 내용이기도 하고. 내가 나약하다는 것 정도는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선을 그으려고 했던 건데, 정면으로 부정당했다. 오히려 지금 내가 하는 것이 1회차를 답습하는 것이라고.

게다가 팀이 흔들리고 있단다. 확인이야 해 보겠지만, 사실이면 지금 내가 하는 것은 자폭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어떻게 키웠는데 흔들린단 말인가?

용납할 수 없었다.

확실히 내가 없을 때의 일행은 에파토스의 말대로였다.

어쩔줄 모르는 나연과 그런 나연을 못마땅해하면서도 불안해하는 나서윤, 공포에 질려 손톱을 물어뜯는 남은주와 긴장된 기색이 확연히 드러나는 주하연.

들었던 것보다 더 심한 것 같았다.

나는 따로 한 명씩 일행을 불러 조금씩 대화를 나눴다.

나연에게는 너는 지금 무척 잘하고 있으며, 지금 나는 만족스럽다고 말해줘야 했고, 나서윤과는 즐겁게 떠드는 것만으로 불안감이 확 줄어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매달리고 달려드는 것을 허용해준 덕분 같았다.

그리고 주하연에게는 앞으로 점점 난이도가 어려워질 테니, 긴장감 조성을 위해 일부러 그리했다는 말로 간단히 납득 시켰다. 실제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니까. 내심 파티 원들과 면담을 하면서, 다시 선을 치워버리자 내 마음도 더 편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문제는 남은주였다.

"제발 버리지 말아 주세요."

"……."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떤 짓도 안 했는데, 따로 불렀을 뿐인데. 처음 나온 말이 저거였다.

"뭐든지, 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요. 제발 버리지만은…."

"아뇨 안 버립니다."

"하, 하지만…."

"제가 왜 남은주 씨를 버립니까?"

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냥 최근 고민도 많아 보이시고 힘들어 보이시길래…."

"안, 안 힘듭니다. 저, 더 잘할 수 있어요!"

"그, 그래요?"

나는 남은주의 현재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함을 깨달았다.

…어쩐지 랜덤 스킬이 생존 본능이더라.

어쩌면 과거 요한에 의해 지하 감옥에 갇혔을 때 내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면 남은주는 나를 배신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알았기에 요한도 잠깐 주춤했겠지.

이건 상상 이상이다.

"저희를 잘 따라오지 못하신다고 하더라도 먼저 배신하지 않는 이상 버리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역할이 조금 달라질지는 몰라도 저희는 한 팀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먼저 배신하지 않는 이상. 나는 조금 떠보는 심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남은주는 조금 안도하는 듯하면서도 끝까지 불안감을 감추지는 못했다.

확실히 배신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아니, 애초에 지금 상황에 배신할 것이 없기도 하고. 나는 남은주의 자리를 조금 빨리 찾아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재능만 봐서는 버리는 게 답이긴 한데, 그래도 이미지 메이킹이나 나중을 생각하면 남은주는 상징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다른 역할을 줄지언정 버리는 것은 선택지에 없었다.

대략 일행의 불온한 분위기를 어느 정도 풀어준 이후에야 나는 11층으로 진입하겠다는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다행히 늦지는 않았군?"

"다음 팀이 언제쯤 옵니까?"

"자네들을 제외한 파티 중 제일 선두가 막 던전에 입장했네. 그리 어려운 던전은 아니니 5일 안에 깨긴 할 게야."

5일 그 정도면 충분하다.

주요 거점들을 점령할 시간은 충분하다.

얼마 전, 내가 나연의 저 성격을 충격 요법을 통해서 길들인 이유가 있었다. 탑은 올라갈수록 쓰레기들의 함량이 높아지는 곳이기도 했고, 언제나 도덕적이고 정의롭게 행동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연의 그런 성격을 완전히 꺾지 않은 것은, 탑이 그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1회차를 생각해 보라, 내가 가기 전까지 아무도 지구로 향하지 않았으며, 탑에 남은 놈들은 하나같이 약탈과 제 즐거움만 쫓는 쓰레기들 투성이었다.

그런 이들을 데리고 무슨 수로 지구를 구한다는 말인가?

그러니 탑의 인원을 물갈이하고,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무법자들을 모조리 몰살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수를 줄일 수는 있고, 세력이 약해진 무법자는 수련자들의 동기 부여가 될 수도 있다.

무법자들의 행태를 그대로 알려 정조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해 수련 의욕을 고취시키거나, 무법자들을 사로잡으면 노예로 쓰는 등 여러모로 쓸모가 있다.

그리고 11층부터 20층까지의 구간은, 그런 무법자들이 가장 활개 친 공간 중 하나였고, 동시에 가장 많은 수련자들이 죽은 구간이었다.

나는, 그 미래를 바꾸고자 한다.

"그럼, 바로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게나. 부디 무운을 빌지."

에파토스는 가벼운 손짓으로 우리의 앞에 포탈을 생성했다.

"지나가면 된다네."

"감사했습니다."

"그래."

가벼운 인사말. 서로 나중에 다시 볼 일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상, 격한 이별은 불필요할 따름이다.

'2회차는, 변화한다.'

나는 이번 미궁의 중요성을 다시금 뇌리에 새기며, 11층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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