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튜토리얼 - 9층
나는 에파토스의 질문에 대답했다.
"지구입니다."
숨길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그는 수련자들을 도왔으면 도왔지 해를 끼치는 이들이 아니니까. 애초에 상태 창이 모두 까발려지고 있는데 숨겨봤자 의미도 없다.
"…지구? 거긴 지금…."
"네. 침공 받고 있는 곳이죠. 현재 수련자들의 고향입니다."
"…도대체 왜 벌써부터? 계약자 만들기가 쉬운 일은 아닌데? 지구의 관리자는 제정신인가?"
에파토스는 어처구니없어하더니, 곧바로 분노를 드러냈다.
내가 60층에서 죽고 난 이후에야 선택을 받을 수 있듯, 대부분의 경우는 탑에서 나가면서 계약을 맺는다. 자격이 되지 않는 이와 계약을 맺으려면 차원 관리자 입장에서는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하고, 힘을 부여할 때도 손해가 많다.
지금 에파토스가 보기에는 안그래도 지구가 위험한 상황에서 지구의 관리자라는 놈이 애매한 재능을 가진, 자격도 되지 않는 놈에게 자신의 힘을 낭비해가며 힘든 계약을 한 걸로 밖에 안 보인다는 뜻이다.
그만큼 나처럼 처음부터 계약을 맺고 오는 이들은 드물었다.
차원 관리자와 특별한 인연이 있거나, 아니면 아주 재능 넘치는 놈을 성장시킬 목적으로 타 차원의 관리자가 탑이 열린 시점에 탑에 투자하고 성장을 목적으로 집어넣는 경우가 거의 전부. 이 외에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된다.
아마 에파토스는 후자를 예상했으리라. 그래서 계약한 차원 관리자가 지구의 관리자라는 말에 분노한 것이고.
"…상대가 거인입니다. 그리고, 방법이 이거밖에 없었어요."
"…설마. 자네, 회귀자인가?"
끄덕.
내가 회귀자임을 밝히자 에파토스는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딴 말도 안 되는 짓을! 차라리 타 차원에…!"
나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 뜻을 짐작한 듯 에파토스는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아무도… 돕지 않았나…?"
"저희 문명은 한 달 만에 무너졌습니다. 탑의 시간으로는 1년이 채 안 됩니다. 그 시간 만에 상층으로 돌입한 인원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쳐들어온 거인은 100체. 그중 한 거인은 왕자 중 하나입니다."
"왕자… 어째서 그 작은 차원에 왕자가… 지구의 관리자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군."
"저만이 고향으로 돌아갔으니까요."
"…경의를 표하지."
"부디, 제가 회귀자인 것을 다른 이들이 알지 않았으면 합니다."
"물론일세. 플로어 마스터들은 입이 무겁지. 걱정 말게. 이번 탑은 난리가 나겠군. 보상이니 뭐니 하며 날뛸 차원 관리자 놈들이 한둘이 아니겠어."
플로어 마스터, 에파토스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콧등을 꾹꾹 눌렀다.
가이아에게 들었다. 아주 난장판이 될 거라고.
본래 차원 관리자, 자칭 신들과의 계약은 탑을 나가야만 가능하다. 그쪽이 효율이 좋고, 탑은 중간에 용사들을 빼 가는 것을 용인하지 않으니까. 예외로는 미리 계약을 하고 들어오던가, 탑에 어마어마한 투자를 한 이들이 극히 일부를 대상으로 미리 선점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이런 경우는 극소수고, 정식으로 계약한 관리자의 차원으로 가는 것은 상층에 도달한 이후. 그들을 제외한 대부분은 본 차원으로 향한다.
우선권을 행사할 경우, 다른 차원의 관리자는 엄청난 대가를 치루지 않는 이상 용사를 빼내기가 힘들고, 용사 본인들이 원하기까지 해야 했으니까. 그러나 이미 망한 지구는 예외였다. 우선권을 행사할 수도, 용사들의 마음을 돌릴 수도 없었으니까. 아예 내가 픽을 당할 당시에 가이아는 등장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번 회차는 다르다. 아마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직업들을 뿌리며 수많은 이들을 꼬시겠지.
과거 용사를 하나라도 계약했던 이들은 기회가 생긴다.
탑은 공평하니, 보상을 줄 터. 1회차에서 계약했던 용사들의 수, 그들의 수준에 맞춰 권한을 줄 테고, 그것을 바탕으로 탑에 조금씩 간섭할 거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직접적인 간섭은 불가능.
어디까지나 허용받은 선에서 아이템이나 스킬 등을 직업에 맞게 선물하는 정도다. 그마저도 그냥은 힘들고 탑이 정한 퀘스트를 완료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탑은 난장판이 될 거다. 지구를 위해 용사를 빌려준 관리자는 없었다. 이번 회차에서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지구의 수련자들을 빼내어 자신들의 용사로 키우려 할 터.
그나마 다행인점은, 관리자들은 정보를 이용할 수 없다는 것 정도일까. 그건 오직 나만의 특권이다.
관리자들은 애초에, 알고 있어도 다른 수련자에게 어떠한 정보도 줄 수 없다. 그것은 간섭할 권한이 생긴 지금도 마찬가지.
히든 퀘스트, 보상 좋은 던전, 올바른 공략 방법, 전설 이상의 스킬을 얻는 길 등. 이런 걸 전달할 수는 없다. 탑이 틀어막는다.
"탑의 역사에 회귀자가 자네 하나만은 아니었네. 그런 선택을 한 관리자는 수없이 많았지. 그러나 성공한 자는 극히 드물다네."
"…그렇습니까."
대강의 이야기를 들어 알고는 있었다.
"대부분은 그냥 자신의 간섭력을 이용해 좋은 아이템이나 권능을 부여하거나 정 안 되면 타 차원에 대가를 건네고 지원을 요청하지. 시간을 돌려 탑에 재 입장시킨다? 다른 차원 좋은 일만 하기 십상일세. 왜인지 아는가?"
"…재능있는 수련자들을 몽땅 뺏길 테니까요."
대표적으로 랭커들.
"맞는 말이네. 지구의 관리자는 많은 이들을 키워야 하지만, 타 차원의 관리자들은 재능 넘치는 한 둘에게 적은 간섭력이라도 모조리 부어서 한 둘만 빼가면 충분하니까. 하지만 지구의 관리자는 그처럼 특정 누군가를 편애할 방법이 없지."
애초에 지구 출신 수련자들은 가이아와 가계약 상태다. 그것을 유지하고 탑에 들어가게 하는 것만 해도 가이아는 더이상 간섭력의 여유가 없다. 지구는 강대한 차원이 아니니까.
자신 차원의 수련자고, 우선권도 있는 만큼, 유리하기는 하다. 예를 들어 다른 이들이 탑에 대가를 치뤄 비효율적으로 10의 자원을 가질 때, 가이아는 같은 양으로 1천에 가까운 자원을 소유한다. 하지만 지원해야 할 대상이 천 명이 넘는다면? 개인이 지원받는 것은 1인데, 타 차원의 관리자 아래로 들어가면 10의 지원을 받는다.
당연히 타 차원의 관리자 밑으로 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만큼 대우를 받으니까. 그렇게 되면 선택의 순간 아예 자신의 차원을 버리는 이들이 생기기도 한다.
그렇기에 나는 플로어 마스터와 협력해야만 한다. 타 차원의 관리자들이 손쉽게 수련자들을 빼가도록 둘 수는 없었다. 보다 적극적으로 플로어 마스터가 그들을 방해하도록 해야 했고, 가이아가 해주지 못하는 지원을 내가 대신해야 했다. 미래의 지식을 이용해서. 그렇게 재능있는 이들을 끌어모아야 한다.
"후우, 이번 탑은 무지하게 험난하겠군."
협력하겠다는 뜻.
"감사합니다."
"이 탑의 목적은 위기에 처한 차원의 구원이니까 말이지. 선을 넘으면 재제좀 강하게 먹어야겠어."
그는 골치 아픈 표정을 지운 채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마 이제 나는 모든 플로어 마스터로부터 조금씩 호의를 받을 거다. 탑이 정한 선에서 아슬아슬하게 나를 지원하겠지.
그거면 충분하다. 아니, 엄청난 지원이다. 그 정도 지원이면 충분히 헤쳐나갈 수 있었다.
"그럼 저도 다음 층으로 가야겠군요."
"그래. 본래라면 10층을 끝으로 볼 일이 없겠지만… 그대는 다르겠지?"
빙긋.
그는 나를 보며 웃어주었다.
"그럴 겁니다."
"그때를 기대하지."
"그럼, 다른 분들께도 말씀 잘 부탁드립니다."
"오냐. …힘내라."
앞날의 험난함. 그는 그걸 예견한 듯했다. 어쩌면 그는 과거에도 나 말고 다른 회귀자를 본 적이 있을지도.
"꼭, 성공할 겁니다."
"…그래."
"그럼 던전을 선택하겠습니다. 저는 '마도사의 던전'으로 가겠습니다."
씨익.
에파토스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회귀자 답다는 듯이.
"오냐. 잘 가거라."
꾸벅.
나는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9층으로 이동되었다.
***
[9층에 입장합니다.]
[9층의 시험이 부여됩니다.]
[9층의 시험]
-던전을 클리어하라! 8층의 자격을 증명하고 스스로 선택한 9층의 던전을 클리어하세요.
-목표 : 스스로 선택한 던전 - 마도사의 던전 클리어 0/1
-보상 : 다음 층으로 이동.
애초에 9층의 보상은 선택한 던전을 클리어함으로써 얻는 것이다.
그렇기에 따로 보상은 없었다.
이번 던전은 내가 각별히 신경 쓰는 곳이다. 여기가 알고 보면 진짜 엄청난 던전이다.
난이도도 그만큼 헬이지만.
입장 조건은 레벨 12달성.
선택할 수 있는 던전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조건이다. 8층 클리어 조건인 10을 찍고도 던전 선택을 거부하고 계속 사냥을 통해 레벨을 2나 올린 이후에야 선택할 수 있는 던전이라는 뜻이니까.
거기 최고 몬스터가 고블린 로드라 11 찍고 난 이후에는 거의 고블린 로드만 주구장창 찾아다니면서 사냥해야 레벨이 오른다.
아니면 수련자들을 죽이던가.
말로만 들었지 마도사의 던전을 입장한 것은 처음이다. 나는 1회차 때 만만한 던전을 클리어했으니까.
어두컴컴한 동굴. 시작부터 분위기가 우중충하다.
나는 가볍게 동굴 안쪽에 발을 내딛었다가 곧바로 뒤로 빼버렸다.
핑! 퍽!
화르륵!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화살 한 발이 내 앞을 지나간다. 그리고는 곧바로 동굴 내부에 불이 켜진다. 내부는 무척이나 넓었다.
"마도사의 던전인데… 첫 함정이 화살… 참 나…."
이거에 당해 시작부터 목숨을 잃어 기회를 넘겨준 놈들이 많았다.
입장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입장 가능이 떴기에 이상한 상황에 어리둥절한 이들이 많았다. 9층의 던전들은 누군가 클리어하면 더는 도전할 수 없지만, 그렇지만 않다면 몇 명이고 도전할 수는 있었다.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풀고는 다시금 진지한 얼굴로 동굴 내부로 들어가며 기억을 떠올렸다.
마도사의 던전은 총 10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확히는 9개에 지하에 숨겨진 방이 하나. 9개만 깨도 클리어 메시지가 나오기에 모를 수도 있지만, 1회차에 이곳을 클리어한 놈은 이 숨겨진 방까지 발견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클리어 보상과 숨겨진 방의 보상들.
그게 정말 절실하게 필요했다.
나는 동굴 내부를 걸으며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내부는 자연적으로 켜진 횃불과 드문드문 보이는 마법 등의 영향으로 무척이나 밝은 상태였다.
시야 자체는 문제가 없는 상태.
그러나 보인다고 딱히 좋은 것만은 아니다.
동굴 내부를 걷기를 잠시, 곧바로 동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풍스러운 문이 보였다.
첫 번째 방이다. 각 방은 목적에 따라 이름이 지어져 있었다. 연구실이나 식량 창고, 재료 창고, 개인 공간 등. 게다가 각 방마다 몽땅 키메라가 채워져 있기 때문에 난이도가 높고, 각 방마다 함정도 즐비하다. 괜히 조건이 12레벨이 아닌 셈.
후우.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다음 문을 열었다.
끼이익-.
번쩍!
문을 열기 무섭게 밝은 빛이 시야를 가린다.
이미 알고 있었던 나는 손을 들어 시야를 가림과 동시에 문 옆으로 물러났다.
"쿠어어!"
문지기. 입구의 오크 키메라.
오크를 보려면 중층은 가야 하는데, 벌써부터 나온다.
개개가 강력한 전사임에도 불구하고, 키메라가 됨으로써 육체적인 능력은 상승했을지언정 그 전투 센스와 용맹은 사라졌다.
겁 없이 그저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모습. 용맹은 단순 무식한 것과는 다르다.
쿠쾅!
내가 서 있던 자리에 오크 키메라의 대검이 꽂힌다.
나는 오른손에 든 검으로 키메라의 손목을 그었다.
까깡!
그러나 키메라의 피부는 생각 이상으로 단단했다.
단순 방어력이면 나와 별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
나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공격이 무의미하게 돌아가자, 오크 키메라는 즉시 자세를 바꿔 대검을 옆으로 휘둘러왔다.
후웅!
아슬아슬하게 휘둘러오는 검을 피하고는 마력을 일으켜 단숨에 품에 파고든다.
촤악!
오크키메라의 상반신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상처가 생겼다. 이전과는 다른 결과.
마력을 사용한 대가다.
그 틈으로 흘러나오는 푸른 피. 단순한 생명체가 아닌, 인조 생명체에 가까운 키메라의 증거다.
"쿠으으어어어!"
보통의 생명체라면 치명상이지만, 저것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키메라. 오크키메라는 목숨을 도외시한 채 내게 달려들었고, 나는 어렵지 않게 그를 유린했다.
휘두르는 공격을 간단히 피하고 틈을 파고들어 상처하나. 다시 휘둘러오는 공격에 맞춰 또다시 상처하나. 오크의 정교한 기술을 잃어버린 대가로 얻은 강력한 힘. 그걸 이용할 생각으로 대검을 준 거겠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이편이 더 쉬웠다.
나는 문 내부로 들어가지 않고 복도로 오크 키메라를 끌어들여 하나씩 하나씩 상처를 늘려갔다.
마침내.
쿵.
10개 이상의 상처가 났을 무렵에는 이미 움직임이 둔해질대로 둔해져 맞아 주려고 해도 맞아주기 힘들 정도의 속도밖에 내지는 못했다.
첫 번째 키메라를 죽임과 동시에 레벨이 올랐다.
개조당해 어떤 의미로는 약해졌다고는 해도 중층의 몬스터.
고작 9층에서 쓰러질만한 놈이 아니다. 애초에 이전에 클리어한 놈은 되려 이 던전의 함정을 역이용해 잡았다고 했으니까.
이곳은 던전. 나는 오크 키메라의 시체가 사라지길 기다렸다.
파앗.
곧바로 오크 키메라의 사체는 천천히 빛의 입자가 되어 분해되었고, 그 자리에는 한 자루의 대검이 남아있었다.
나는 곧바로 그 검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