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튜토리얼 - 8층
"두 번째로 하겠습니다."
내 선택에 한동안 고민하던 나연은 에파토스에게 말했다.
"저, 저도 두 번째로 하겠습니다.
"저도 오빠랑 같은 걸로요."
나와 나연 자매는 모두 두 번째 선택을 골랐다.
"좋아. 그럼… 어디 보자. 나연. 정령사군. 자네는 이거다."
에파토스는 관리자답게 수련자의 상태 창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곧바로 나연이 정령사임을 알아챈 그는 나연에게 줄 것을 선택했는지, 나연을 향해 손짓했다.
곧이어 과거 1층에서처럼 빛무리가 생기더니 나연 앞에서 모양이 변했다. 빛은, 지팡이가 되었다.
'저 모양은….'
나무로 된 지팡이. 나연은 한동안 아이템 정보 창을 보는 듯하더니 말했다.
"엘프목… 슈퍼 레어?"
슈퍼 레어. 무기.
나는 확실히 두 번째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보 레벨 60이 고를 수 있는 무기는 슈퍼 레어까지. 방어구가 6천 포인트였다. 무기는 더 나간다.
대략 만 포인트 근처. 즉, 나연은 2500포인트를 투자해서 1만 포인트짜리 무기를 얻은 거나 다름없었다. 거의 4배 수준의 이득.
저 정도 등급이면 중층에서도 쓸 수 있다. 나연은 한동안 무기걱정이 필요 없다는 뜻이다. 물론 아이템 성능에 맞는 실력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지금의 나연은 슈퍼 레어급 장비의 힘을 제대로 끌어내기가 어렵다.
"그대에게는 조금 과분한 무기일 거다. 무기에 어울리는 실력을 갖춰라. 그때야 비로소 지팡이의 힘을 제대로 쓸 수 있을 거다. 물론, 지금 수준이어도 충분히 쓸만하긴 할 터. 마력이 상승하고 마력 회복속도가 증가할 거다. 아마 지금 그대라면… 정령 하나와 더 계약할 수 있을 것 같군."
나연은 놀란 표정이었다.
"그럼 다음은… 나서윤. 자네 차례다."
나서윤을 향한 손짓. 나연과 마찬가지였다. 작은 빛덩이가 날아가더니 나서윤 앞에서 검 한 자루가 되었다.
한껏 기대한 표정을 짓던 나서윤은, 눈앞의 검을 잡더니 곧바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 저도 2500p였는데, 이거 일반 무기인…데요?"
히죽.
에파토스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잘 보관하도록. 언젠가 너에게 큰 도움이 될 거다."
"…일반 무기라고? 나도 한 번 볼 수 있을까?"
"얼마든지요. 오빠."
나는 나서윤에게 무기를 건네받았다.
곧바로 정보창이 나타났다.
[봉인된 작은 격노]
-등급 : 일반
-알 수 없는 봉인이 되어있다. 무척이나 튼튼하다.
-공격력 : 15
-정보 공개 : 진명 - ??? (정보 레벨이 낮습니다.)
일반 등급의 검으로써는 무척이나 높은 수준의 공격력. 하지만 고작 이걸 얻자고
'작은… 격노?'
이름에 붙어있는 봉인된 이라는 특성이 눈에 띈다. 심지어 자세한 정보 공개도 되지 않는다. 정보 레벨 60이면 슈퍼 레어급은 다 확인이 되는데… 그 위면 적어도 전설.
나서윤의 스킬과 능력치를 볼 수 있는 에파토스가 이상한 무기를 줄 리가….
잠깐.
나서윤의 스킬은 전설급 마력 친화와 슈퍼 레어급 이도류(二刀流)다. 그녀에게 검을 준다는 것은… 작은 의심, 그리고 가능성.
나는 곧바로 한 전설의 무기를 떠올렸다.
작은 격노. 베갈타. 큰 격노 모랄타를 찾을 수 있는 열쇠.
한 쌍의 검인 큰 격노 모랄타와 작은 격노 베갈타. 베갈타를 이용해 찾게 되는 모랄타는 '대 격노'라는 특수 스킬이 존재하는데, 일격에 전방을 쓸어버리는 참격을 발사한다. 그 참격은 목표 지점에서 폭발까지 일으킨다.
둘의 등급은 전설. 하지만 모랄타 만큼은 준신화나 다름없는 성능을 지녔었다.
검임에도 높은 마력을 요구하다 보니, 그 위력을 제대로 쓰기가 힘들었을 뿐.
1회차에서는 되려 마법사들이 호신용으로 사용했던 검이기도 하다.
참격은 마력의 영향을 받는 만큼, 옵션 대 격노만 노린 사용법이라고나 할까? 그마저도 마지막 사용자였던 마법사 파티가 전멸하며 인벤토리에 묻혔는지 사라져버린 비운의 검이다. 대개 그런 경우 시스템 상점에 다시 등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모랄타는 그렇지 못했다.
"이거, 잘 간직해라."
"…오빠?"
"봉인을 풀어봐야 알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왠지 범상치 않은 무기 같아. 그렇지 않습니까?"
외형이 좋은 티가 나는 무기는 아니지만, 일단 봉인이 풀리면 달라진다.
히죽.
에파토스는 여전히 의미심장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마지막, 나를 향해 손짓했다.
"그대는 뭘 줘야 할지 모르겠더군. 근데 마침… 딱 좋은 게 보여서 말이야. 자, 일단 받게."
[알 수 없는 힘이 랜덤 스킬 카드에 깃듭니다.]
['랜덤 스킬 카드'가 '강화된 랜덤 스킬 카드'가 되었습니다.]
"10층에 가면 직업이라는 것을 얻는다네. 그때 쓰게나. 아주, 아주 좋은 일이 일어날 걸세."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둘 모두 좋은 결과를 얻었다. 어차피 운.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일행들은 내심 내가 받은 게 무엇인지 궁금한 표정을 지었지만, 스킬 카드는 이미 썼다고 말했었기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마침 에파토스가 말을 이어 관심을 돌려주었다.
"자, 그럼. 자네들은 어찌하겠나? 바로 9층으로 갈 텐가? 9층은 던전이라네. 던전은 모두 한 번씩만 깰 수 있기에 선택은 선착순이지. 바로 갈거면 보내…."
"저기, 에파토스 님?"
"…무슨 일인가?"
"저는 두 개라고 들었습니다만? 지금 주신 게 다입니까?"
"응?"
"시스템 상점 말입니다. 기회가 두 번이라고 들었는데, 이거 나중에 아무때나 쓸 수 있습니까?"
"그건 아닐세 그건…."
에파토스는 아차한 표정을 지었다.
"…실수를 했군. 포인트를 몽땅 써버렸으니… 이거 원. 12레벨은 처음이라 나답지 않은 짓을 해버렸어. 두 개를 줬어야…."
그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물품만 받는 대신, 정보를 받을 수 있습니까?"
솔직히 하나만 주길 바라기도 했고. 포인트가 나뉘어 애매한 둘을 받는것 보다야 아주 확실한 하나가 낫다.
물론 그냥 7010p가치에 해당하는 선물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래도 난 저 스킬이 슈퍼 레어 이상만 나오면 별 상관없었다.
영 별로면 익히지 않고 훗날 거래소가 생겼을 때 팔면 그만이고, 쓸만하면 내가 쓰면 된다.
쓸만한 스킬은 많이 알고 있으니, 강해져서 직접 찾으면 그만이다.
"…정보라, 어떤 정보를 원하지?"
"그건…."
내가 조금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그는 곧바로 손을 휘저었다.
나는 마력이 주변을 감싸는 기척을 느꼈다.
"소리는 차단되었네. 말해보게."
"히든 퀘스트를 받았습니다."
어차피 그는 상태 창을 볼 수 있다. 정보 레벨만 봐도 내가 평범한 수련자는 아니라는 것을 알 터.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게, 2년 후에 다시 7층으로 소환되는 퀘스트인데… 이거 퀘스트 끝나면 바로 원래 층으로 복귀됩니까?"
내 말에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음… 확실히 한 개의 물품만 준 것은 내 실수일세… 하지만, 내 멋대로 알려주기에는 정보 가치가 제법 되는군. 으음… 그래, 내가 실수한 것도 있으니. 좋네. 간한한 시련을 주지. 이 시련을 통과하면 정보를 내어 주겠네."
[서브 퀘스트가 부여됩니다.]
-8층 숲 주변에 존재하는 고블린 로드를 잡아오세요.
-목표 : 고블린 로드 살해 0/1
-보상 : 정보
무려 히든 퀘스트에 관한 정보다. 그 대가로 고블린 로드 하나 잡기는 무척이나 간단하다. 여기가 7층처럼 고블린들이 수천, 수만 단위로 우글우글한 곳도 아니고. 정확히는, 그렇게 조직적으로 뭉친 곳이 아니다.
"알겠습니다."
확실히 가능성을 보인 대가가 있었다. 재능 있는 인간에게 호의적인 관리자와 탑의 특성이 여기서 발휘된다. 그냥 포션 하나만 더 던져주고 끝내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미안해하며 기회를 준다. 관리자인 그가 1p도 없을까. 조금만 수를 써도 되는 일에 최선을 다해준다.
곧바로 마력으로 가렸던 가벼운 결계가 풀린다.
일행은 우리의 대화가 궁금한 눈치였지만, 숨기기까지 하는 것이라면 뭔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 듯, 묻지는 않았다.
나서윤조차 눈치를 조금 볼 뿐이었다.
나는 일행을 향해 말했다.
"제가 작은 서브 퀘스트를 받았습니다."
"서브 퀘스트요?"
"네. 사냥인데, 고블린 로드 하나만 잡으면 됩니다."
"고블린 로드!?"
7층에서의 기억이 떠올랐을까, 일행의 표정에 불안함이 번져간다.
"아, 걱정 마세요. 여기 고블린 로드는 그렇게 많은 고블린과 함께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을 하나당 한 마리는 존재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마을 규모도 크지 않다고 하네요."
나는 마치 에파토스에게 들은 것 마냥 주절주절 정보를 뱉어내야 했다.
"…분위기가 그러니, 저 혼자…."
"같이 갈 거에요!"
늘 그렇듯 나서윤이었다. 내가 사람 팔 하나 자르는 모습을 봐도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하는 모습. 만족스러운 기분이었다.
"…그래. 좋아. 다른 분들은 쉬시겠습니까?"
"…아니, 같이 가."
"저도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신후 씨와는 떨어지고 싶지 않네요."
"저도, 같이 갈래요."
일행은 내가 조금 꺼림칙하면서도 떨어지고 싶지는 않은 듯했다. 확실히 안전을 생각하면 현명한 선택이다.
"좋습니다. 바로 가죠. 그럼, 에파토스 님,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그러게. 그대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오면 바로 찾도록 하지."
말을 마친 에파토스는 자리를 떠났다.
우리는 마을, 2구역을 천천히 벗어났다.
이미 우리에 대한 소문이 조금 퍼진 듯했다.
2구역 내에 남아 우리와 4명의 남자들의 싸움을 본 이들은 감히 더는 우리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어차피 마을 내부의 놈들은 쉬고 있는 이들을 제외하면 나가기조차 겁나하는 패배자들. 여길 벗어나는데 얼마나 걸릴까.
나는 곧바로 숲, 사냥터로 향했다.
사냥터는 제법 많은 수는 사람들이 싸우고 있었다.
문제는 앞서 말한 적 있듯, 우리보다 빨리 온 놈들은 하나같이 쓰레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아니나 다를까 역겨운 광경이 사방에 펼쳐져 있었다.
"씨발 똑바로 안 해!"
쾅!
"끄억!"
여러 무리의 남자가 한 남자의 머리를 방패로 내려친다.
남자는 머리가 찢어졌는지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씨발 니가 똑바로 안 하니까 우리한테까지 오잖아! 최대한 죽여 놓으라고!"
"하, 하지만 수가…."
"씨발, 이쁜이가 뭔 꼴 나도 좋다 이거지? 어째 레벨업이 늦다? 이러다가 이쁜이로 채워야 할 것 같단 말이야?"
"죄,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할 테니 제발…."
파티 시스템은 경험치가 공유된다. 튜토리얼에서는 아직까지 공헌도 시스템이 없어서 경험치는 균등 분배. 그런 만큼 자신들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안전하게 있고 다른 사람을 부려서 경험치를 먹는, 소위 쩔 작업 중이다.
자신들의 수가 더 많다면 어차피 강해져 봐야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에 저리 행동하는 것. 레벨이 올라도 능력치는 오르지 않고, 여기서 조금 강해져 봐야 숫자에는 답이 없다.
8층 시련은 레벨업이고, 10만 만들면 되는 만큼 자신들의 안전을 챙기기 위한 한 방편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인간을 죽이는 것. 같은 수련자를 죽이면… 경험치가 오른다. 아마 여자 친구 내지 동료 정도가 인질로 잡힌 것 같았다.
물론, 저런 방식은 그대로 경험치만 먹으니 훗날 역전당할 가능성이 높은, 병신같은 방법이다. 말 그대로 멀리 보지도 않고 코앞만 쳐다보며 뒤져가기 딱 좋은 방법이랄까.
나는 그 꼴을 보며 지나치려 했다.
어차피 저것들은 쓰레기. 나중에 도태된다. 한 20구역 정도 넘어가면 제대로 된 인간들의 파티가 존재하는데, 10층 이후 이런 이들이 일어나서 싸우면서 한차례 대거 쓸려나간다. 게다가 여기서 저런 걸로 싸우면 한도 끝도 없다.
살펴보니 쓸만한 재능도 아니고. 나는 그냥 지나치려 했다.
"…신후야."
"왜?"
"…저거, 도와주면 안 돼?"
"응. 안돼."
"…어째서…."
"책임져 줄 수 없으니까."
나는 차갑게 대꾸했다.
"하지만…."
"나는 네 생각만큼 좋은 놈이 못 돼. 내가 너희를 도운 건 할 수 있기 때문에 한 거야. 저들? 도울 수 있겠지. 아마 우리 정도면 모두 쓰러뜨리고 해방도 가능할지 몰라. 그런데? 쟤들이 원한을 갖고 복수하겠다고 하면? 어쩔건데? 우리가 더 위험해져. 그리고, 어차피 구해줘 봤자 우리가 계속 지켜주지도 못해. 다른 놈들 손에 비슷한 꼴을 겪겠지. 저들은 스스로 강해져서 알아서 자신들을 구하는 수밖에 없어."
나는 내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며, 차갑게 대꾸했다.
내 이런 모습은 처음이기 때문일까. 나연은 조금 기가 죽은 듯했다.
일행은 별말 하지 않았다. 슬쩍 살펴보자 오히려 주하연은 생각의 정리를 마쳤는지 안심한 표정이었고, 남은주도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나서윤마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이쪽에게 해코지를 할까 봐 지나가면서도 경계 섞인 눈으로 저들을 쳐다볼 뿐.
그런 일행들의 모습에 나연은 더욱 충격을 먹은 표정이었다.
우리는 숲으로 나아가며 저런 일행을 한둘 본 것이 아니었다.
고기 방패를 미끼로 도망치거나 함정으로 유인하는 놈들, 협박하는 놈들, 갑옷 하나 없이 무기만으로 전방으로 몰리는 이들도 있었고, 알몸으로 싸우는 여자를 바라보며 낄낄거리는 놈들도 존재했다.
그러나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었다.
대부분 큰 무리라는 것.
최소 5명 이상이 한두 명을 괴롭히는 꼴이었으며, 여자까지 끼며 갖고 노는 무리는 최소 20명이었다.
나연은 점점 하얗게 질린 표정이 되어갔다.
그런 놈들을 지나쳐 숲에 다다랐을 때, 우리를 막는 놈들이 있었다.
"여기는 우리 구역이다. 꺼져."
"…사냥터에 구역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나는 차갑게 반문했다.
"우리가 있다면 있는 거야. 그냥 꺼져."
세 명의 남자가 무기를 꼬나든 채 말한다.
뒤에는 30명가량의 무리가 서 있었다. 이제껏 본 무리 중 가장 큰 무리. 그들은 하나같이 긴장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사냥을 마치고 돌아가는 듯했다.
"이미 사냥 끝난 거 같은데, 왜 막는 거지?"
"내일도 쓰니까. 말을 못 알아듣는군. 꺼지라고. 마지막 경고다."
나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그래도 써야겠는데?"
"하, 하하… 재덕 놈들 쓸어버렸다고 간이 커졌나? 우리가 그딴 놈들과 비슷한 수준인 줄 아나?"
"…재덕?"
"네놈들이 마을에 들어오자마자 쓰러뜨린 놈들이다."
얼마 되지도 않은 일을 여기 있는 놈들이 안다고? 아무래도 마을에 있던 놈 중 일부가 이놈들 무리에 속한 모양이다. 우리들의 등장에 곧바로 달려가 알렸겠지.
장비 상태를 보면 조금 좋은 편. 밖에서 낄낄거리는 놈들보다는 더 센 듯 보였다.
확실히 레벨 평균은 7이 넘는다. 능력치도 평균 9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그래 봐야 나서윤이 작심하면 반은 죽이고 도망까지 칠 수 있는 수준이다만.
포섭 대신 밀어내는 이유도, 우리가 자기들보다 훨씬 세다는 것을 알기에 그러는 걸 거다. 힘이 지배하는 곳이라는 것을 빨리 깨달은 무리들. 잡아먹힐 수 있다는 생각일 거다.
나는 긴장된 그들을 향해 말했다.
"알면 방해하지마. 팔 잘리고 싶지 않으면."
우리가 갈등을 일으키고 있자,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다른 패거리들이 접근한다.
그러자 우리 앞에 선 세 명이 조금 당황한 눈치로 뒤를 바라본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 그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다른 곳을 써라. 여긴 안 돼."
얕보이고 싶지 않겠지. 아직 탑은 초기. 혼란스러운 때다. 특히 앞쪽 구역들은 하나같이 쓰레기들이라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다.
그러나 알 바 아니다. 아니, 오히려 싸움이 나면 좋을지도. 차라리 지금 몰아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나연을 위해서는, 그게 낫다.
"신, 신후야, 그냥 가자. 저쪽으로 가라고…."
스릉-
나는 무기를 꺼내 들며 남자에게 말했다.
"비켜."
"신, 신후야?"
나는 나연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변을 봐. 늦었어. 물러나면 우리한테 관심 가질 놈들 투성이다. 약한 모습 보이지 마. 지금까지 봤으면 알잖아? 그런 꼴 나고 싶어?"
여자가 넷. 그것도 나연 자매는 무척 예쁜 편이고, 주하연도 스스로 관리를 잘했는지 제법 미인이며, 하다못해 남은주조차 제법 귀여운 외모다.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일.
남자 하나에 여자 넷. 시간이 좀 흘러 경험이 쌓였다면 모를까, 아직 현대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수련자들에게는 우리가 맛 좋은 먹이 정도로 보일 테지.
남자 무리 또한 마찬가지다.
얕보일 수 없다.
스릉- 꽈악.
그들 또한 무기를 꺼내 들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일행도 서서히 진형을 잡고 있었다.
"안, 안돼… 안돼는데…."
'안돼 긴 개뿔.'
앞으로 흔한 일이 될 거다.
솔직히 벌써부터 사냥터를 통제할 줄은 몰랐다. 그냥 깔끔히 서브 퀘스트만 끝내려고 했는데… 저들이 자초한 일. 애초에 사냥터 통제라니. 나는 어이가 없었다.
덕분에 나연을 길들일 기회를 얻었으니 조금 고마워 해야 하나?
일촉즉발의 상황.
먼저 공격을 해온 것은 저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