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튜토리얼 - 8층
"그, 그렇게 된 겁니다, 아, 아는 것 다 대답했습니다. 제발, 제발…."
"그럴 수가… 그게 모두 허상이라니…."
일행은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들을 무시한 채 내게 빌고 있는 놈을 향해 말했다.
"왜 그러시죠? 제가 꼭 죽인 것 같잖아요? 모두 회복 포션 받으신 거 쓰시면 충분히 사실 수 있습니다만? 봐요, 다 쓰고 있잖아요."
하지만 떨어진 팔이 다시 붙지는 않는다. 내가 일부러 마력을 이용해 절단면을 조져놨으니까.
저 정도로 절단면이 박살 나면 중급 포션으로는 힘들다.
그들은 우리보다 빨리 도착해 플로어 마스터를 만났다고 한다. 거기서 튜토리얼의 이야기를 들었고 미션을 받았다고.
여기는 제2구역. 1구역은 이미 다 찼다고 한다.
2구역이면 충분히 빠르다. 과거 나는 46구역이었다.
한 구역당 인원은 200명 남짓. 탑에 소환된 한국 쪽 인물들 중 살아남은 인원은 만 명을 좀 넘는다.
그중 살아서 중층에 도달하는 인원은 그 반이 되지 않지만.
나는 아직 팔이 멀쩡한, 마지막 한 놈에게 물었다.
"그럼 플로어 마스터라는 분은 어디 계십니까?"
"기, 기다리면 찾아오실 겁니다. 보통 새로 오신 분들께 찾아오는데… 아무래도 먼저 소환된 이들이 있어서… 얼마 안 걸릴 겁니다."
"그렇군요…."
내심 뽑아낼 정보는 다 뽑아냈다. 후환은 남겨두는 게 아니긴 한데… 고민은 잠시였다.
"근데, 요한이랑, 애들 얘기 하시는 거 들어 보니까… 그쪽 분들은 남자 넷인데 어떻게 통과하셨어요?"
"그, 그게… 그, 도, 도망쳤습니다. 그러니까…."
"그 실력으로요? 기사들한테 순식간에 잡혔을 거 같은데?"
"그, 그, 그게…."
"그게?"
"죄, 죄송합니다! 그게! 그냥! 죽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잘못했습니다,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안 죽입니다. 걱정 마세요."
내 말에 잠시 안도한 표정을 짓는 놈을 상대로 나는 검을 휘둘렀다.
푹!
"으아악! 왜! 왜!"
나는 팔 대신, 다리 한쪽의 아킬레스건을 잘라버렸다. 다른 셋처럼 중급 포션으로는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솔직히 죽이는 게 맞다. 하지만 벌써부터 그랬다간 일행들은 나를 반쯤 싸이코로 볼 거다. 특히 나연이.
이제는 풀어줘야 할 때.
나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가세요."
눈물로 얼룩진 표정들.
"저희는 살인자들이 아니라서요. 보내는 드릴게요. 하지만, 복수하겠다고 하시면… 그때는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기만이다. 저들은 이번 층에서 죽을 확률이 높았다. 아니, 어쩌면 운이 좋아서 살지도. 그렇다고는 해도 그게 언제까지 갈지는 모른다.
나는 그들을 풀어줬다. 부디, 다시 재회하기를 빌면서.
'그땐, 제대로 처리하지.'
후환은 없는 게 최고다.
양아치들이 모두 도망간 이후, 일행의 어색한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나서윤만이 내게 다가왔다.
"오빠, 괜찮아요?"
"…조금 힘들긴 하네."
주로 정신적으로.
"아."
내 말에 일행은 그제서야 나 또한 이런 일이 처음일 거라는 생각이 든 듯했다.
사실과는 다른 오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왜, 왜 그런 거야…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다음에 또 오면? 그땐 어쩔건데? 더 많은 인원을 데리고 올 수도 있어. 나는… 차라리… 지금이라도 쫓아가서…."
"안 돼! 신후야, 그러지 마."
"…나도 그러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다음에 왔을때 내가 지면? 그때는…."
'제길 성격에 안 맞네.'
그제서야 우리가 약했을 때를 생각한건지 여성 진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그럴만하다.
만약 우리가 더 약했다면? 여성 진은 저들의 노리개가 되었을 테고, 나는 저들의 기분에 따라 죽었을 수도, 불구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처음 말한대로 순순히 놔 줬다면 어쩌면 몸 멀쩡히 살았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저들의 말을 신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행은 마음이 복잡한 듯했다. 내가 손을 쓴 것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내가 말했던, 우리가 졌을 때 당할 일들을 생각하면 과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러는 동안 계속 힘든 연기를 해야만 했다.
내게 다가온 나서윤을 쓰다듬으며 너도 고생했다고 말하며 벌써 이런 못 볼 꼴을 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 쉴 곳을 빨리 찾았으면 한다고 말하는 둥 약간 평소답지 않게 일관되지 않는 말을 쏟아냈다.
동시에 조금 나서윤에게 기대어 있었다.
그런 내 모습에 심정을 짐작했는지 나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런 충격은 필요하다. 타인을 돕는 것은 우리가 안전한 이후고, 어디까지나 가능한 선에서여야만 한다.
우리에게 해를 끼치면 용서 없이 베어야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방해가 된다면 싸울 수 있다.
공정, 정의, 정직, 양보, 도덕 같은 것은 현대에서 꼭 필요한 것이었다. 물론 지키지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선호되고 바른 것이라 인식을 받았겠지.
여기서도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걸 최우선으로 둘 수는 없다.
현대와 같이 법이 강하게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다. 힘. 오직 힘만이 스스로를 증명하는 곳.
그렇기에 나연을 비롯한 일행들은 탑에 적응하고, 변해야만 한다.
어느새 시간이 지나 주위가 조용해졌을 무렵.
어느샌가 우리 일행들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이제 진정들 좀 됐나?"
부드러운 목소리.
고개를 들자 미형의 젊은 남성이 우리들 앞에 서 있었다.
깔끔할 로브로 몸을 감싼 남성은 부드러운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단숨에 경계 태세로 돌입했다.
방금 겪은 일이 일이다 보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고작 8층에서 내 감각을 속일 수 있는 존재는 하나뿐이다.
플로어 마스터.
마침내 그를 만났다.
***
"내 이름은 에파토스, 튜토리얼을 관리하는 플로어 마스터라네. 1층부터 10층을 담당하고 있지."
플로어 마스터.
나는 그를 바라보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신후라고 합니다."
"흐음… 호오. 그래. 유신후라… 반갑네."
플로어 마스터, 에파토스는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8층에 왔으니 시련을 주긴 해야 하는데 말이야. 흐음… 그대들은 통과일세."
[8층의 시험을 통과하셨습니다.]
[보상 - 입장권이 지급됩니다.]
곧바로 나오는 메시지.
입장권. 9층은 일종의 던전이다. 8층에서 시련을 통과해 얻은 입장권으로 입장, 던전을 클리어하면 10층으로 이동한다.
"…네?"
일행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이곳의 시련은 레벨 10을 만드는 것이지. 그대들은 이미 합격. 기나긴 탑 역사 속에서도 드문 경우지."
그는 우리 일행을 슥 훑어보며 말했다.
"어디보자, 남은주, 주하연. 레벨 10. 나연, 나서윤 레벨 11. 유신후 레벨 12. 흐음… 레벨 12라니. 탑 역사 속에서도 손에 꼽히는 수준인데? 도대체 아래서 무슨 일을 한 건가?"
"…업적을 세웠습니다."
"대단하군."
그는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이었다.
성공이다. 플로어 마스터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그가 내게 흥미를 갖게 만든다면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플로어 마스터는 마치 탑과 같이, 재능있는 수련자들을 우대하니까.
그러나 일행은 하나같이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하다. 업적이란 것이 얼마나 대단한 건 줄 모르니까.
"하하. 아직 잘 모르나 본데, 업적이란 것은 앞으로 그대들이 이 탑에서 죽을 때까지 하나를 더 세우지 못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네."
죽을 때까지.
일행은 그 말에 움찔한 표정이었다.
"이런, 너무 겁먹지 말게나. 죽지 않고 탑을 오르면 살아서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으니 끝까지 노력해 보게. 업적까지 세운 이들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에파토스는 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런 업적을 세운 이들은 추가 보상이 있었지. 어디 보자…."
업적. 업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시스템 창은 나타나지 않았다. 업적이라도, 어지간히 커서 시스템이 직접 보상을 주는 업적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업적이 확인되는 경우는 적었다. 그저, 기록에 남아 훗날 용사가 되었을 때 가산점을 받을 뿐. 대가는 그때 돌아온다고 들었다.
1회차 때는 상층에 들 정도가 되긴 했었지만, 탑에는 내가 모르는 것들이 정말 많았었다. 가이아와 계약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몰랐겠지.
8층에서 레벨 10을 빠르게 달성하면 입장권과 더불어 던전을 먼저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된다. 이거, 생각보다 중요하다. 애초에 나는 노리는 던전이 있었기 때문에 이 특권이 필요했다.
8층에서 레벨업을 해도 가능하리라 생각하기는 하지만, 의외로 여기 경쟁이 치열하다. 성가신 일은 피하고 싶었다. 게다가 사냥 중에 눈에 띄고 싶지도 않았고.
그런데 거기다가 만약, 8층에 올라온 시점에 레벨이 10을 초과했다면? 추가 보상이 존재한다.
1회차 중층에서, 딱 한 명이 레벨 11을 달성한 채 8층에 입성했다고 들었다. 유명한 얘기였다.
그 사람은 훗날 랭커가 되었으니까.
그때 받은 추가 보상이 있다고 들었다. 나는 그걸 기대하고 있었다. 솔직히 얻지 못해도 상관은 없었다. 나연과 나서윤이라는 존재를 발견하기도 했고, 어차피 그 보상은 원한다고 얻기가 힘들기도 한데다, 운이 너무 큰 영향을 준다.
"여기 있군. 자, 상점을 개방하도록 하겠네."
상점. 그것도 시스템 상점이다. 한 번 이용하기 위해서는 이용권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훗날에도 한 번 들어가기 힘들었던, 그런 곳이었다.
"레벨 11이 된 두 명은 단 한 개의 품목씩을, 12레벨을 달성한 유신후는 두 개의 품목을 구입할 수 있네. 필요한 포인트는 시스템 상점에 물건을 팔거나 업적을 이룩하면 쌓인다네. 물론, 시스템 상점에 팔 수 있는 물건은 거의 없지만."
입장하고 나서도 포인트를 구매해야만 사용 가능하다.
그리고, 팔 수 있는 물품은 한정되어 있었다.
"자, 그럼 개방하겠네."
[시스템 상점이 오픈되었습니다.]
카테고리를 선택하세요.
-무기
-방어구
-영약
-스킬
-소모품
-재료
…
…
…
카테고리는 많았다.
희귀 광물이나 마법 시약 등은 재료에, 소모품에는 포션부터 시작해 수많은 물품이 공개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도 볼 수 있는 물품은 슈퍼레어까지 였다.
정보 레벨의 부족.
시스템 상점은 그 목록을 보는 데도 정보 레벨이 필요했다.
나는 쓴웃음 지으며 내 포인트를 확인했다.
보유 포인트 - 7000
'…???'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7000P라니? 이건 과거에도 만져본 적 없는 포인트다. 기회가 있는 족족 써야만 했기 때문. 대부분 소모품으로 사용했었다.
나는 과거 내가 챙겼던 [중급 방어구 교환 티켓]을 시스템 상점에 팔아보았다.
보유 포인트 - 7010
…미친.
가격은 1회차와 똑같다.
1P면 중급 포션을 살 수 있다. 시스템 상점이 취급하는 제일 질 낮은 물품이 중급 포션이다.
그래서 과거 1층에서 방어구 교환 티켓을 2장 챙겼던 거고. 팔 수 있는 물건이 제한되어 있는 만큼, 이런 거 하나씩 쌓아 놓으면 나중에 더 좋은 물품을 구입할 수 있다. 고작 1P지만, 악착같이 모아야 한다. 10P면 상급 포션을, 100P면 최상급 포션을 구입할 수 있다. 최상급 포션은 시스템 상점이 아닌 한 돈을 주고도 사기가 힘들다.
지금 내가 살 수 있는 것은….
-마력 상승의 영약(50이하) - 5000P
-정령이 깃든 갑옷(슈퍼레어) - 6000P
물품은 많지만, 그나마 나은 것은 이 둘 정도. 정보 레벨 60으로 볼 수 있는 물품은 슈퍼레어가 한계였다.
게다가 가격도 진짜 비싸다. 포인트로 저런 물품을 사는 것은 거의 낭비에 가까웠다.
나는 곧바로 나연 자매에게 물었다.
"…목록 보여?"
"…아니오. 아무것도 안 보여요, 오빠. 소지 포인트는 2500P라고 나오는데…."
나연은 아직 어색한 듯, 대답하지 않았다.
업적 덕분에 2500포인트나 있었다.
차라리 포션이라도 사게 했으면 했지만, 정보 레벨이 없는 이상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에파토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역시 이러면 보상이 안 되겠지?"
은근한 목소리.
"뭐, 알아야 살 수 있으니까요."
"…자네는… 음. 아닐세."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결과는 알고 있다. 과거 랭커가 그랬으니까.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다.
"흠흠. 그렇지 이렇게 되면 보상이 안 되지. 그렇기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네. 하나는 무작위로 5가지 물품 목록을 개방해 주겠네. 그중 하나를 구입할 수 있다네. 물론, 주어진 포인트로 살 수 있는 물품만 공개할 거고. 다른 하나는 현재 소유한 포인트를 모두 소모해서 '플로어 마스터'가 추천하는 아이템 하나를 구입할 수 있다네.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플로어 마스터가 추천하는 아이템. 물론 그들은 플로어 마스터인 이상, 그리고 우리가 재능을 입증한 이상 우리에게 해가 될 선택을 해주지는 않는다. 탑의 재제가 있으니까.
그리고 재미있는 점은, 훗날 랭커가 되었던 녀석이 했던 말이다.
지금도 자신이 그 아이템을 얻은 이유를 모르겠다고. 자신이 당시 소지했던 포인트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아이템을 당시 얻었고, 그 덕에 자신은 랭커가 되었다는 말을 했었다.
즉, 저건 함정이 아니다. 오히려 기회지.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두 번째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