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튜토리얼 - 8층
8층에 오자마자 1회차와는 전혀 다른 상황을 마주했다.
'하긴, 1회차보다 빨리 나오기는 했지.'
3층과 6층, 7층은 기간이 정해져 있지만, 2층부터 5층까지는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 하기 나름인 셈. 2층은 과거와 같이 하루 만에 해결했지만, 4층과 5층은 수련자들의 능력에 달렸다.
정찰에서 대충 발견하고 빨리 돌아올 수도 있고, 5층 던전도 우리는 3일만에 끝냈지만 이전 회차에서는 1주일 이상 걸렸다.
그런 우리들보다 빨리 여기에 왔다는 것은 쓰레기일 가능성이 높았다.
2층의 시험은 2층에 존재하는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
대부분 처음 만나는 사람이 요한이라 그렇지, 다른 NPC도 있기는 있다. 그리고 그들은 요한처럼 뒤통수를 치는 이들이 아닌 경우가 많다. 단지, 가장 가까운 존재가 요한이라는 것이 문제일 뿐. 그럼에도 내가 요한과 만나서 행동한 이유는, 만약 다른 NPC를 만났다간 다른 이유로 죽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요한이 우리를 팔아 북문으로 향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활약할 여지가 거의 없어진다. 4층의 영주 의뢰는 정찰이 아닌 고용 되어 일정 기간 방어가 될 테고, 다음 층 미션도 어렵지 않은 던전을 찾아 해결할 가능성이 높았다. 성 내부 던전의 수준은 뻔하니까.
그러면 경험치는 고사하고 아무 정보도 모른 채로 성안에서 허송세월하다가 7층 고블린의 대 습격 때 다 죽는다.
즉, 내가 요한을 선택한 것은 요한에 대해 잘 알고만 있다면 오히려 가장 생존률이 높고, 대가도 가장 좋은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근데 이놈들은 요한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나보다 일찍 8층에 도달했다.
이놈들, 요한과 협력한 거다. 그런 루트가 아닌 이상 우리보다 빨리 나오기는 힘들다.
아마 파티원 중 일부를 팔아버리고 생존해 이득을 취했겠지. 대가를 받고 성에서 나온 거다. 그런 루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놈들과 같은 파티였던 애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실제로 상당수의 생존자는 저렇게 살아나온다. 4층, 또는 5층에서 요한과 협력할 몇 번의 기회가 있기는 하다. 내가 3층부터 활약해 상당한 부분이 달라졌어도 결국 김인실과 박남영이 요한에게 붙었듯이.
1회차에서 우리 파티 중에는 김인실이 저 루트로 빠져나갔었다. 사실상 유죄 확정이라 결정적인 증언이랍시고 배신한 후에 도망친 것. 물론, 너무 늦었고, 결국 죽었지만. 나는 저 방법 대신 그냥 4층에서 의뢰 완수하고 던전 의뢰를 거절한 이후 일행과 성에서 빠져나가려고 했었지만, 어쩌다 보니 비밀 창고의 위치를 알게 되어 뒤통수 쳐버렸다. 덕분에 두 번째 히든 퀘스트도 받았고.
오히려 중간에 눈치채거나 다른 루트로 생존하는 경우가 더 적은 편. 극히 드문 예중 하나는, 요한을 만나자마자 '부탁'을 들어준답시고 죽기 직전으로 만들어서 '살려달라'는 부탁을 하게 만든 후 살려준 다음, 3층으로 이동하자마자 죽이는 놈도 있었다. 생존 루트는 여러갈래가 있는 법이다.
"뭐 하냐? 쫄았냐?"
눈앞의 병신들 덕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병신들이었다.
어디에 양아치 교과서라도 존재하는 걸까? 고작 저 정도 위협은 위협으로 느끼지도 못해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차라리 덤볐다면 반사적으로 죽이거나 반병신으로 만들었을 테지만, 그것도 아니다.
그냥 말로만 위협한다.
그냥 적당히 손봐주고 플로어 마스터를 찾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관리자의 눈동자로 잠재력과 능력치를 살펴보았다.
평균 레벨 4. 잠재력 평균 중하.
…내 정신력이 아까워졌다.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아니 솔직히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나연이 아직 탑에 적응을….
'응?'
파티 원들을 살펴보자 하나같이 어딘가 긴장하고 겁먹은 기색이었다.
'아차.'
얘들은 우리가 얼마나 엘리트 코스를 밟았는지 모른다.
잠재력 '하'수준인 남은주가 능력치 평균 10에 레벨 10이다. 얘들은 지금 지들이 얼마나 센지를 모른다. 아예 비교할 대상이 없는 거다. 끽해야 가능한 건 우리끼리 비교인데…. 나는 아예 논외 수준. 혼자서 네 명 다 죽일 수 있는데다, 나서윤은 잠재력 최상의 괴물, 나연은 그 희귀한 정령사다. 총 일행 중 반 이상이 비교 대상이 되기에는 적절치 못한 이들이다.
상대 능력을 짐작하기에는 경험이 부족하고. 나서윤은 그래도 긴장한 와중,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짓는 걸로 봐서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혼자서도 쓸어버릴 놈들이라고 알고 있는 듯했다. 경험이 부족하기에 확신은 하지 못하는 상태. 시간이 해결할 문제다.
나는 아이디어가 번득이는 것을 느꼈다.
'이거… 잘하면….'
나는 곧바로 연기를 시작했다.
"갑자기 뭐 하는 짓이시죠?"
"하,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이거 8층까지 온 놈 맞아?"
"여기가 아직도 지구로 보이는 샌님이시네. 왜 명문 대학 다니시는 미대 오빠이신가? 아니면 교회? 여자 넷이랑 다니는 걸 보면 아주 능력 있는가 본데 말이야."
저들끼리 낄낄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지들이 지금 뭔 짓을 하는 지도 모른다는 게 어떤 건지, 무지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해 준다.
저들은 지금 사자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이쁜이들 너만 먹지 말고 우리한테도 나눠 달라고 새끼야. 너만 재미 보냐?"
"그런 거 아닙니다. 함께 생사를 같이한 동료입니다."
"그럼 그럼. 낮에도 밤에도 함께 했겠지. 서로 살 부대껴가며 말이야. 킥킥."
'아 씨발. 그냥 죽일까?'
점점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억누르며 일행의 기색을 살핀다.
음담패설에 기분이 나쁘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들의 허리에 찬 무기를 의식하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몸. 확실히 긴장, 아니 조금 겁을 먹고 있었다.
저들이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에 반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더이상 다가오지 마십시오. 더 가까이 오신다면 해할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가면? 가면 니들이 어쩔건데? 응?"
"어이쿠 무서워라. 사람 하나 잡겠다? 응?"
저들의 인원은 넷. 우리는 일곱. 그러나 김인실과 박남영은 고문으로 인해 반병신 상태. 애초에 이젠 일행도 뭣도 아니다. 전력은 다섯. 그런데 웃긴 건 제일 약한 남은주도 혼자 둘은 손쉽게 이길 거라는 거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는 나로써는 덩치 큰 사자 다섯을 향해 달려드는 토끼 네 마리를 보는 기분이랄까.
그리고 더 웃긴 건 사자 쪽이 더 겁을 먹었다는 거다. 객관적인 전력이 앞서는 것을 모른다는 점, 그것을 모르기에 남자 넷이라는 존재가 현대인 입장에서는 충분히 무서울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아무리 우리가 무장을 했어도… 상대 또한 인간이라는 점이 되려 일행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유일하게, 나서윤이 움찔거리는 것이 보인다.
나연은 그걸 겁먹었다고 생각했는지 자신 뒤로 나서윤을 숨겼다. 내가 보기에는 아니었지만.
"어떻게 8층까지 오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희도 만만한 시련을 헤쳐온 것이 아닙니다."
"아하, 요한 말이지? 어휴, 그걸 정면 돌파하셨어요? 아니, 그게 될 리 없지. 애들 팔았냐? 허긴, 요한 그 양반이 여자 하나는 진짜 변태같이 밝히긴 했어. 취향 참."
"킥킥, 여자 넷 다리 벌려주고 올라온 거 아냐? 이거 완전 포주…."
그때였다.
스륵-
퍽!
"끄악!"
"뭐, 뭐야!"
나와 일행을 가리개 삼아 숨었던 나서윤이 순식간에 돌아가 한 명을 때려눕혔다.
스릉-!
"미, 미친년! 뭐야! 뭔데 이렇게 빨…!"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나서윤은 즉시 무기를 꺼내든 놈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고는 무기를 채 휘두르기도 전에 손목을 긋고 다리를 쳐 균형을 무너뜨렸다.
압도적인 신체 능력과 마력의 차이로 인한 육체 증폭이 이뤄낸 결과였다.
텅!
"끄아!"
"컥! 커억!"
손목이 베인 남자는 무기를 떨어뜨린 채 손목을 움켜쥐고 물러났고, 다리를 친 남자의 명치에 단검 손잡이를 박아 넣어 단숨에 쓰러뜨린다.
하나 남은 남자는 겁먹은 기색으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막상 세 명을 단숨에 쓰러뜨린 나서윤은 의아하다는 듯이 이들을 바라보았다.
"…진짜 되네?"
나는 미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예상외로 나서윤이 사람을 공격하는 데 있어서 가장 거부감이 없었다. 적응이 무척이나 빠르다. 신기할 정도였다.
"서, 서윤아!"
"…왜 그래 언니?"
"사, 사람을, 아니, 위험하게…!"
"안 위험해. 이 사람들, 엄청 약해. 은주 언니도 1:1은 충분히 이길 정도인걸?"
그리고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인다.
"왜 이렇게 약하지? 오빠는 엄청 센데… 남자라도 다 같은 씨가 아닌가?"
큭.
웃음이 터질 뻔했다.
가까스로 억누른 채 나연을 바라보았다.
나연은 위기 상황을 헤쳐나갔다는, 그것도 나서윤 혼자서 해결했다는 상황에 깜짝 놀란 듯했다.
나서윤이 남은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나연이 나서윤을 막았다.
"잠,잠깐만 서윤아! 사, 사람한테 함부로 무기 휘두르면 안 돼!"
"왜 그래, 언니. 쟤들이 먼저 우리한테 다가왔는걸? 성희롱에다가, 오빠가 충분히 경고했는데도 위협했는걸? 쟤들이 나쁜 거 아냐?"
"그… 그건 맞지만… 그래도…."
'힘내라 서윤아. 조금만 더!'
"미, 미친년! 사람, 사람한테 칼을 휘둘러! 싹, 싹수가 노란 년이잖아!"
도망치려던 남자는 일행끼리 의견 충돌이 일어나는 상황이 오자, 곧바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차피 속도 차이로 봐서는 도망쳐도 금방 잡히긴 할 테니까.
웃긴 놈들이다. 자기들이 하려던 짓은 생각도 안 하고 나서윤의 행동을 탓한다.
"그쪽이 하려던 것은? 내가 어려서 뭘 몰라 보여? 성범죄자 새끼들아. 어디서…"
"나서윤!"
나서윤의 거친 말에 나연이 기겁한다. 원래 저런 성격은 아니었나 보다.
"너, 너 왜그래, 안 그랬잖아. 갑자기 왜…."
나연의 말에 나서윤은 아차 한 표정을 짓더니 곧바로 울상으로 변해 말했다.
"미, 미안해 언니… 그게, 나도 모르게…."
재밌는 장면을 본 기분이다.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저 모습. 나연이 아는 나서윤과 실제 나서윤이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연 자매 틈에 끼어들어 말했다.
"아니, 괜찮아. 잘했어 서윤아."
"신후…야?"
"서윤이가 나서지 않았으면 내가 나섰어. 위협은 저들이 먼저 했어."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에 마지막 남은 남성이 도망치려는 기색이 보였다.
나는 곧바로 마력을 다리에 쏟아부었다.
퉁-
푸확!
"끄아아아악!"
단숨에 내려친 일검.
그 일검에 남자의 팔 한쪽이 떨어져 나간다.
"으악! 으아아악!"
신체가 잘려나가는 고통은 엄청나다.
남성은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신, 신후야… 왜…."
경악하는 나연.
나는 나연 대신 나서윤을 바라보았다.
나서윤은… 놀란 듯했지만 겁먹은 기색은 아니다.
'그렇군.'
생각보다 일이 쉬워졌다.
나서윤은 정상이 아니다. 아니, 여기서는 이게 정상이다. 탑에, 딱 맞는 정신을 갖고 있었다.
나연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그쪽에 초점을 맞추느냐고 조금 늦게 눈치챘다. 자매라고 성격이 비슷하라는 법은 없었다.
나는 그녀들이 정상적인 가정환경에서 사랑받고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머리가 꽃밭이지. 그렇게 믿었다.
근데 아닌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단순히 나서윤이 돌연변이일지도. 조금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내 단호한 모습에 나서윤을 제외한 일행이 긴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바닥에 쓰르졌던 세 명도, 주춤거린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남은 세 명 중 두 명의 팔 한쪽을 베어버렸다.
"끄아아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발, 제발 살려… 으아악!"
"안돼! 오지마! 오지 말라고!"
남은 한 명에게 다가가며 나는 물었다.
"요한이라고 하던데… 저희가 만난 놈도 요한이거든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나는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일행은 모른다. 그렇기에 굳이 물었다. 대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 나서.
나는, 조금 빨리, 일행을 탑에 적응시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