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튜토리얼 - 6층
영주는 기쁘면서도 조금 의아한 기색이었다.
영주가 예상한 범주에 들어가기는 했을 거다. 일단 그들을 엿먹이고 복수하기 위한 질문이기는 하니까. 그러나 조금 다르기도 할 터. 계약서는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행동한다. 그가 예상한 질문에 가보에 관한 내용은 없을 터였다.
"…계약서는 진실을 판별할 뿐이기는 하다. 그대가 그리 믿고 있다면 진실이라 판단할 수도 있지만, 오로지 악감정만으로 그걸 진실이라 믿는다고 해서 계약서가 진실이라 판단하게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근거가 없다면 아무리 그대의 감정이 강하다고 해도 쉽게 진실로 인정받지는 못할 터다. 그럼에도 그 질문을 하길 바라나?"
영주는 내게 호의를 베풀었다. 그대의 감정이 상했음을 알지만, 그런 질문에 잘못 대답하면 그대에게 저주가 내릴 수도 있다고. 비록 단순하고 일회성인 저주일 뿐이지만 일단 머리가 자랄 때까지는 대머리가 되어 버리니까.
"아마 괜찮을 겁니다. 단순히 감정만으로 이런 대답을 드리는 것은 아니니까요."
"…뭐라? 근거가 있다는 말인가?"
영주의 표정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예. 저는, 얼마 전에 요한의 주머니에서 영주 님의 인장이 찍힌 반지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그게 무슨!"
"그 입 닥쳐라!"
요한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외쳤지만, 영주의 일갈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영주는 나를 바라보며 급하게 말했다.
"그게 사실인가?"
"아직 질문이 하나 남았습니다. 이보다 확실한 방법이 있겠습니까? 저도 얼마 전에 우연히 보았을 따름이고, 제가 말해 봤자 아무도 믿지 않을 것 같아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이처럼 기회가 되었는데 입을 다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이 안 되는 핑계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을 거라는 말에 영주가 조금 움찔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다급하게 계약서의 질문을 사용했다.
"세 번째 질문이다! 그대, 유신후는 멜리드 가문의 가보를 훔친 범인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대답하겠습니다. 저는 멜리드 가문의 가보를 훔친 범인은, 요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근거로 첫째, 얼마 전 요한이 사용하는 주머니에서 멜리드 가문의 인장이 새겨진 반지 하나를 보았습니다. 둘째, 작정하고 저를 범인으로 몰아갔으며, 과정에서 알게 된 것으로 보이는 아공간을 이용, 단시간에 가보를 찾지 못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을 만들어내려고 했습니다. 셋째, 그 과정에서 말도 안 되는 거짓을 작성해 영주 님마저 속이려 들었습니다. 인벤토리 일족이라는 것은 없으며, 제가 아공간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한 달이 채 되지 않습니다. 이상, 대답이 되셨습니까?"
내 말이 계속될수록 다급했던 영주의 표정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 보인다. 내 말이 끝날 무렵에는 영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는 완벽한 무표정이 되어 있었다. 영주는 조용히 내게 반문했다.
"인벤토리 일족이… 없다?"
"예. 없습니다. 그런 일족, 이전에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저희는 어떤 시련에 휘말렸습니다. 저희는 시련 완수했고, 그 대가로 '인벤토리'라는 이름의 아공간을 얻었습니다. 그 시련을 마치자 저희는 알 수 없는 장소로 강제 이동되었으며, 그때 요한을 처음 만났습니다."
영주는 생각에 잠겼다.
인벤토리 일족. 우리를 단순한 도둑으로 만들려고 했다면 중간에 거짓으로 만들 필요가 없는 일족이다. 문제는, 이 일족을 만든 이유가 우리가 타 영주의 첩자라는 근거로 들기 위해 만들어진 가상의 일족이라는 거다.
요한 피셜에 의하면 인벤토리 일족이 누군가에게 멸망되었고, 우리는 겨우 도망쳤으며, 영주에게 의탁했다. 그런 주제에 이미 타 귀족에게 의뢰를 받은 스파이 집단이고 타 귀족에게 멜리드 귀족 가문을 팔아먹으려는 놈들이다. 순서상으로 본다면 일족의 멸망, 도주, 타 귀족에게 의탁, 고용된 상태로 멜리드 성에 우연을 가장하여 들어 왔다, 가 된다.
즉, 인벤토리 일족은 우리를 스파이로 몰고 가는데 쓰인 정보인데, 그게 애초에 거짓이라면? 아, 얘네는 스파이가 아니구나, 하고 끝나는 게 아니다. 대놓고 영주를 속였고, 그걸 위해 작정하고 공모를 했으며, 내가 가문의 인장이 새겨진 아티팩트를 요한에게서 봤다는 말까지 했으니 재조사는 기본에 귀족 능멸을 그냥 먹고 시작하는 거다.
나는 요한과 김인실, 박남영까지 엮어서 제대로 빅엿을 먹여버린 거다.
영주는 자신이 제대로 능멸당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마침내 무표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영주는 아슬아슬하게 한가지 질문을 더 섞었다.
"아공간 내부를 확인할 방법은 정녕 없는가?"
계약서가 흔들린다. 이건 네 번째 질문에 가깝다. 대답하지 않아도 알아서 진실 판별을 시작할 터. 하지만 나는 계약서가 반응하기 전에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없습니다."
지금은 없다. 질문의 의도는 저 셋이 작정하고 영주의 검을 인벤토리에 숨겼을 가능성 때문에 그런 듯했다.
그 순간 계약서가 진실을 판별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계약서는 아무런 저주를 내뿜지 않고 서서히 평범한 종이조각으로 되돌아갔다.
내 말이 모두 진실로 판명 난 것이다.
그 순간 마침내 영주의 무표정이 깨지며 시뻘개진, 분노의 화신과도 같은 얼굴로 외쳤다.
"쥘르! 길라함!"
"예! 영주 님!"
"신 길라함! 여기 있습니다!"
노집사와 기사 단장으로 보이는 자였다.
"당장 저놈들을 구금하라! 저들에 대해 낱낱이 조사하고 알아내는 정보가 생기는대로 즉각 보고하도록!"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노집사는 곧바로 병사를 시켜 요한을 포함한 김인실과 박남영을 포위했고, 기사들이 나서 그들을 모두 포박, 압송하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저는 아닙니다! 영주 님! 믿어 주십시오!"
"아니에요! 저희는 훔치지 않았습니다!"
"요한! 요한이 시킨 일입니다! 저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용한과 김인실, 박남영은 서로 무죄를 주장했으며, 박남영은 아예 요한이 시킨 일이라고 벌써부터 자백했다.
그러나 분노한 영주가 들어줄리가 없었다.
영주는 우선 우리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일행은 무죄 선고에 서로를 끌어안으며 기쁨을 나눴다.
"오해해서 미안했네. 상황상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나, 성의 은인들에게 실수를 한 것 같아."
"아닙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셨습니다. 영주 님의 과감하고 현명한 결단 덕에 무죄를 입증할 수 있어서 무척이나 기쁩니다."
"그간 고생했네. 일단 쉬게나 좋은 방을 내어 주도록 하지."
"감사할 따름입니다."
영주는 급한 일이 있다며 곧바로 자리를 피했다.
그럴 만도 하다. 아마 즉각 보고하라고는 했지만, 무려 잃어버린 가보에 대한 단서를 찾은 거다. 자리에서 보고만 기다리기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사안이다.
우리는 귀빈실에 안내되었다. 이전까지 지냈던 병사 숙소에 비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방에 도착하자 남은주가 물었다.
"그런데, 하루만 지나면 다음 층으로 가잖아요? 만약 2층 때처럼 다른 곳이 나오면…."
"그때는 갈라져야지. 저런 사람들이랑은 같이 못 다녀."
"맞아, 은주야. 절대 안 돼. 어차피 저런 몸이니 다음 층에서 살아남을 수나 있을까?"
주하연과 나연이 차례대로 말했고, 나서윤은 격하게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고생하셨어요, 신후 씨. 덕분에 어떻게 누명을 벗었네요."
'반은 누명 아닌데.'
일단 창고는 털었으니까. 가보는 안 훔쳤지만.
"운이 좋았습니다. 저주의 계약서라니… 그런 것도 있군요."
나는 처음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거의 거짓말 탐지기 같았습니다. 그것도 상당히 좋은 성능의."
"그러게요. 뭐, 덕분에 살았으니 괜찮았죠. 진작 썼으면 좋았을 텐데."
"뭐, 여러 조건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다 쓰고 난 뒤를 보면 아무래도 1회용인 것 같던데."
"어머, 그랬나요?"
그것까지 볼 정신은 없었던 모양이다.
우리의 무죄가 증명되자 우리는 푹 쉬며 하루를 보냈다.
하루 동안 성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내가 숨겨 놓은 아티팩트 두 개가 요한의 방에서 발견되었고, 타이밍도 좋게 오후에 도축된 동물에게서 골동품이 발견되었다.
요한은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으며, 박남영과 김인실은 온갖 고문을 받으며 아공간 내부에 숨겨 놓은 것을 모두 꺼내 놓으라는 협박을 받았다.
더 웃긴 것은 요한이 우리에게 부렸던 수작들이 빠르게 들통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3층에서 우리를 돈 받고 위험한 장소에 용병으로 소개 보낸 것이나, 4층에서 우리를 죽이려 했던 요한의 계획 또한 밝혀졌다. 제흐가 조금 남아 있었는지 요한의 방에서 발견된 것.
요한이 이들을 포섭한 방법이 망가진 무릎과 팔을 고쳐주겠다는 거였단 걸로 밝혀졌는데, 그 원인이 요한이었다는 것이다. 의심했던 사항이지만, 확실히 밝혀졌다. 김인실과 박남영은 어떤 심정일까?
마침내 7일째가 되는 날.
우리는 7층으로 이동되었다.
***
[6층의 시험을 완료하였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7층으로 이동합니다.]
익숙한 감각과 함께 7층으로 이동된다.
이번 층은 1회차보다 위험할 가능성이 높았다.
혹시 몰라 나타나는 시험을 재빨리 확인했다.
[7층의 시험이 부여됩니다.]
[7층의 시험]
-30일간 생존하세요.
-보상 : 다음 층으로의 이동, 중급 포션 1개.
다행히 1회차와 달라진 점은 없었다. 아마 저 보상을 보면서 김인실과 박남영은 무슨 생각을 할까? 다쳤을 당시 저 포션이 있었다면 후유증은 남지 않았을 거다.
과거에는 이 시점에서 모든 희망을 잃고 다음 고문을 받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1회차 당시 상급의 잠재력을 갖고도 능력치가 부족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이때 받은 고문의 영향이 크다. 박남영이나 김인실처럼 심각한 후유증은 아니더라도, 이곳에서 고문을 받는 바람에 능력치들을 상당수 손실 당했었다.
아마 스킬 조합이 좋지 못했다면 상위권은 어림도 없었겠지. 만약 이때 얻은 후유증만 아니었으면 호구짓을 당하고도 아슬아슬하게 1군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늘 아쉬웠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손실은커녕 계승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특전으로 현재 능력치는 독보적인 수준이다.
그러나 그 정도로 만족살 생각은 없다. 나는 더, 더 위로 올라가 거인을 죽이고 가족을 되찾을 생각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 7층은 나름 기회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1회차와는 다르게 우리가 손쉽게 범인으로 몰리지 않았으며, 마침내 무죄마저 얻어내는 쾌거를 얻었다. 창고를 털어 얻은 부수입과 복수는 덤이고.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전수 조사라는 대대적인 범인 색출 과정이 있었다.
문제는 이게 5일 내내 이뤄졌다는 거고, 그로 인해 영주가 우리가 4층에서 정보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방비가 1회차에 비해 현저하게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물론 성이 위기상황이니 방비를 하기는 했을 터다. 그런데 전수 조사라는 대대적인 색출 중에 그게 제대로 돌아가기나 했을까?
나는 7층으로 이동되자 그걸 확인할 필요를 느꼈다.
7층을 이동해도 여전히 귀빈실이자 남은 일행 넷은 모두 나를 찾아왔다.
"이번 미션은 조금 낫네요. 한 달간 귀빈 대접이라니… 만약 무죄를 증명하지 못했다면 어땠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해요."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시험이 그리 순순할 리가 없어요."
내 말에 일행은 동의하면서도 조금은 풀어진 느낌이었다.
나는 한 번 더 강하게 말했다.
"4층에서 보셨지 않습니까. 저는 그게 지금 시련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4층의 시험. 정찰.
그때 보았던 엄청난 수의 고블린들이 떠오른다.
나는 일행을 향해 최악의 가정을 말했다.
"저는, 이번 층이 가장 위험하다고 판단합니다. 정말 최악의 경우, 저는 우리 모두가 이번 시련에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멸.
전멸을 예고하는 내 말에, 일행은 얼굴은 충격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