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튜토리얼 - 6층
저주의 계약서.
신성 계약서의 다른 버전이다. 신의 이름으로 공증하는, 신전에서 판매하는 신성 계약서와는 다르게 저주의 계약서는 마법사들이 만든다.
계약을 어길 시 나눠 가진 계약서에 부여된 저주가 위반자에게 향한다.
보통 이 저주의 계약서는 만들기가 무척이나 까다롭고, 신성 계약서에 비해서 기간도 무척 짧으며, 걸 수 있는 저주마저 그다지 강하지 못하다. 게다가 신성 계약서에 적용되는 허점이 그대로 적용된다. 대표적으로 거짓을 말하지 말라는 조건일시 애초에 그렇게 믿고 있거나 잘못 알고 있는 정보일 경우 계약서는 '진실'을 말했다고 판단한다. 어디까지나 대상이 실제로 그리 믿고 있는데 어쩌겠는가? 게다가 이건 마력을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이면 아예 쓰지도 못한다.
제한이 많고 까다로운 조건이 많은 이 계약서는 그 정도 성능임에도 불구하고 한 세트를 만드는 데 재료비만 수십 골드에 가까운 돈이 들어간다. 마법사의 공임을 제외한 재료비만이다. 게다가 만들기는 더럽게 어려워서 하층의 마탑을 기준으로 한 해 생산되는 양이 수십 세트에 불과하다. 그런데 웃기게도 이게 없어서 못 판다. 한 세트에 수백 골드, 심할 경우에는 천 골드도 넘는 가격에 팔려나간다.
왜냐면 이건 상대를 강제하는 용도보다는, 대게 거짓말 탐지기로 사용되며, 신관의 참관이 필요한 신성 계약서와는 다르게 신관이 없는 상황, 즉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도 쓸 수 있기에 비밀스러운 곳에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신성 계약서는 상급 신관 이상이 되어야 신성 계약서를 만드는 데 참관할 수 있다. 그 이하는 작성도 못 한다. 만드는 게 비싸서 그렇지 사용 자체는 신성 계약서보다는 저주의 계약서가 더 쉽다.
그런데 이런 좋은 것을 왜 이제야 쓰냐고? 말했듯이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다. 가보가 걸린 만큼 아낄 상황은 아니지만, 이 계약서는 한 세트에 한 명에게만 쓸 수 있다. 효과가 다하면 그저 종이 찌끄레기에 불과하다. 일회용이라는 소리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 마력을 다룰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쓰지도 못한다.
용의자는 많은데 계약서는 단 한 세트. 게다가 마력을 다룰줄 아는 사람은 극소수. 끽해야 영주 본인과 기사들 정도뿐이다.
근데 그걸 나에게 쓰겠다고 한다. 내가 한 달 만에 이룬 업적도 업적이지만, 현재 내 가치가 얼마나 높고 영주가 날 얼마나 아까워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단 한 세트. 단 한 세트뿐이다. 우리 가문이 소지한 저주의 계약서는."
노집사를 시켜 가져온 저주의 계약서. 그 반쪽이 지금 내 앞에 있었다.
조건은 질문 세 개에 진실만을 답할 것.
어길 시 걸리는 저주는 탈모의 저주. 그것도 즉시 빠지는 종류다.
저주 중에는 그리 강한 저주가 아니다. 게다가 일회성 저주. 다 빠진 머리가 다시 자라면 그만인, 하찮은 저주다. 질문 세 개에 저주도 하찮은 이 종이 쪼가리가 무려 한 세트에 수백 골드라니.
"어떻게 쓰는 겁니까?"
나는 일부러 영주에게 사용법을 물었다.
1회차에서도 많이 보지 못했던 물품이다. 내심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이게 튜토리얼에 있었을 줄이야.
"그대의 마력을 계약서에 집어넣으면 된다. 그러면 계약서가 알아서 반응할 것이다."
나는 곧바로 계약서에 마력을 집어넣었다.
웅웅.
계약서가 떨리더니 곧바로 검은 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저주의 계약서.
영주 또한 계약서를 사용했다. 계약서가 멀쩡히 사용되는 것을 확인한 영주는 내게 절차를 설명했다.
"간단히 절차를 설명하지. 그대는 내가 질문이라는 말을 붙인 말에 대해 반드시 대답할 의무가 있다. 동시에 대답 시에는 각 순서의 질문에 대답하겠다는 말을 붙인 이후 말해야 한다. 대답하겠다는 말 뒤에 하는 말들은 모두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주의하도록. 대답이 끝나면 대답이 되었는지 되물어라. 내가 긍정하면 계약서가 진실을 판별할 것이다. 내가 부정하면 더 자세히 대답해야 한다. 이해했는가?"
"예. 이해했습니다."
"그럼 시작하겠다."
후우.
잠시 한숨을 내쉰 영주는 질문을 시작했다.
"첫 번째 질문이다. 그대, 유신후는 멜리드 가문의 가보를 훔쳤는가?"
'역시 콕 집어 물어보는군.'
영주는 두루뭉술하게 가문의 비밀 창고를 털었냐 같은 질문보다 콕 집어 가보에 대해서 물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만큼 지금 상황에 가보가 중요하기에 저리 물은 것일 뿐. 계약서도 완벽하지는 않다. 최대한 변수를 차단하고 질문의 범위를 좁혀 빠져나갈 구멍을 막은 거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대답하겠습니다. 아니요. 저는 멜리드 가문의 가보를 훔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대답이 되셨습니까?"
"그렇다."
나는 대답에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는 말을 덧붙였다. 사실이다. 1회차에서도, 2회차에서도 나는 가보의 그림자조차 구경하지 못했으니까.
굳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 대답 외의 말이라더라도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걸 이용하면 재밌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계약서는 여전히 검은 빛을 뿌리고 있을 뿐, 반응하지 않았다.
즉, 내 말이 진실이라는 뜻.
주변에서 탄성이 터졌다.
영주는 무척이나 흡족스러운 표정이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아쉬움이 남은 느낌이다. 그럴 만도 하다. 결국 저주의 계약서로 가보를 찾는 것은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두 번째 질문이다. 그대, 유신후는 타 귀족 가문의 첩자인가?"
"대답하겠습니다. 아니요, 저는 어느 가문의 첩자도 아닙니다. 저희 파티가 멜리드 성까이 오게 된 경위는 어디까지나 어딘지도 몰랐던 숲에서 길을 잃은 상태에서 우연히 요한을 만났고, 그가 시킨 모조 성배를 가져다주는 조건 하에 가장 가까운 성인 멜리드 성으로 안내를 받았을 뿐입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춘 이후 다음 말을 이었다.
"대답이 되셨습니까?"
"뭐,라?"
"다시 대답하면 되겠습니까?"
"…모조 성배가 무엇인가?"
그는 그게 모조 성배라는 것까지는 모르는 듯했다. 아니, 어쩌면 지금은 제대로 된 이름이 있을지도. 우리는 그냥 탑이 알려준 이름 대로 부르는 거니까. 아마 처음에는 그냥 예풀품이거나 골동품이라 모은 거겠지. 확실히 창고에서 보았던 때를 벗겨낸 모조 성배의 외향은 무척이나 예술적이고 아름다웠다.
"제가 요한에게 안내의 대가로 넘긴 것입니다. 그는 그냥 '그릇'이라고 부르더군요. 영주 님이 시키신 의뢰로 알고 있습니다."
"그걸 자네가 가져왔다?"
"정확히는 저희 파티원 전체가 함께 움직여 가져왔습니다. 그 대가로 제대로 안내 또한 받았습니다. 아쉽게도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물품을 모두 잃어버린 덕분에 성에 입장하지 못했지만… 요한이 신원을 보증한 덕에 조건부로 성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영주는 말없이 요한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내건 의뢰의 수행을 도왔던 인원을 고작 신분증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쫓아낼 뻔 한 거다. 신분증이 무척이나 중요하긴 하지만, 귀족인 그의 입장에서는 별거 아니기도 하니까.
"아공간이 있는… 큭."
영주가 말을 이으려 했으나 계약서가 밝게 빛나자 영주는 즉시 말을 멈추었다. 계약서의 제지. 더이상의 질문은 허락되지 않는다. 계약서는 지금까지의 문답으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고 판단한 듯했다. 아마 트리거는 내가 처음 대답한 것과 관계가 멀어진 질문이 나왔기 때문이 아닐까. 중간까지는 추가적인 설명으로 받아들인 거고.
기초적인 판단을 스스로 하는 계약서. 현대 문물로 따지자면 종이 쪼가리에 AI가 탑재된 거다. 비쌀 만하다.
계약서는 내 말의 진실을 판단했고, 내게 아무런 제지를 가하지 않았다.
즉, 내 말은 모두 진실이라는 거다.
영주의 기세가 일변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요한을 바라보았다.
요한의 얼굴은 이미 새까맣게 죽어 있었다.
상대는 영주이며, 귀족이다.
고작 한낱 사냥꾼에 불과한 그는 이 대화에 간섭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대화는 하나같이 자신에게 치명적인 내용이다. 아마 처음 저주의 계약서가 등장한 순간부터 미칠 것 같았을 터다. 이런 계약서가 있다는 것은 아예 몰랐거나 소문만 들어 봤겠지.
내심 쾌재를 불렀다. 나름 서서히 요한을 몰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찌 된 게 종이 쪼가리의 힘을 빌리자 단순 명쾌하게 내게 유리한 상황들이 만들어졌다.
영주는 요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게 어찌 된 건가?"
"그, 그게 말입니다, 영주 님…."
"의뢰를 공동으로 수행한 자들이 있었나? 근데 왜 말을 하지 않았지? 그랬다면 입구에서 신분증 검사 따위는 간단하게 지날 수 있었을 텐데?"
"그, 그래서 제가 대신…."
"고작 그걸로 대가를 마칠 거라 생각한 게냐? 네가? 무슨 권리로 그딴 판단을 내린 거지? 그리 공을 세우고 싶었나? 하, 우습게 되었군. 내 꼴이 우습게 되었어."
영주의 말에 나는 다른 것도 필요 없이 이것만으로도 요한이 제대로 엿됫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층은 신분제가 공고한 사회다.
귀족이, 그것도 성주가, 자기 아랫사람 때문에 면이 상했다. 아니, 얼굴에 티끌이 묻었다. 정말 별거 아닌 일이다. 어찌 보면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일이고. 그런데 그게 지금 자신의 가신들이 보는 앞에서 일어났고, 자신의 체면이 상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문제다.
그는 자신의 명예가 정말 별것도 아닌 일 때문에 도마에 오른 상황 자체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화를 참을 수도, 참아서도 안 되는 상황에 처했다. 귀족의 명예는 어떤 것보다 중요했으니까. 영주의 기분은 최악이고, 요한은 그 앞에서 별거 아닌 한낱 평민일 뿐이다.
영주는 지금 당장 요한을 작살내고 싶은 심정일 터다. 그러나 아직 한 가지 질문이 남아있었다.
"그래. 일단 묻지. 아, 이건 계약서의 질문이 아니다. 딱히 진실을 말할 필요는 없어."
"제가 영주 님께 어떻게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피식.
"그래, 그대의 말은 모두 사실로 판명이 났지."
물론 내가 한 말 모든 게 진실은 아니지만. 영주 또한 짐작은 할 터다. 대표적으로 인벤토리. 내게 불리한 점이 될 수 있기에 숨겼다. 그러나 영주에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성의 영웅인 내가 첩자도, 도둑도 아니라는 게 중요하지.
'도둑은 맞지만.'
"그럼 하나만 묻겠네. 자네는 내가 할 마지막 질문이 뭐였으면 좋겠는가?"
첩자 의혹과 가보 도둑 의혹. 그 두 가지 의혹이 모두 벗겨진 이상, 세 번째 질문은 그저 덤이다.
그렇기에 그는 세 번째 질문을 내게 넘겼다.
나는 진실만을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 내게 질문을 정하라 한다.
어째서 이런 것을 묻는 건가?
영주의 질문에 대해 숙고하는 척하며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머리가 빠르게 회전한다.
내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냥 질문을 하면 그만이다. 그런 내게 질문이 뭐가 좋겠냐고 묻는다고? 이건 오히려….
'그렇군.'
지금 영주는 에둘러서 사과를 한 거다. 확실히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무죄가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고, 이렇게 되면 앞선 요한의 거짓말과는 차원이 다른 결과가 생긴다. 무려 성의 안위를 위해 최선을 다한 우리를 핍박한 그림이 되는 거다. 이건 명예에 먼지가 뭍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먹칠을 하게 되는 것. 물론 최악의 경우가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그 정도 까지는 아니다. 저 비싼 저주의 계약서를 사용해 무죄를 증명하는 데 일조했고 어디까지나 유죄로 확정시킨 것도 아니고 재판을 한 번 한 거니까.
영주는 지금 내게 에둘러 사과를 하며 기회까지 주는 거다. 나를 배신하고 속인 요한과 김인실, 박남영에게 복수할 기회를. 그리고 동시에 그들을 처단하고 우리를 대우함으로써 나와 끝까지 가지 않으려는 걸 거다. 없던 일이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뭐 현명한 판결을 내렸다 정도로 소문이 퍼지지 않을까?
그 정도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단순히 복수만을 위해 이 기회를 쓸 생각이 없었다. 말했다시피 다음 층까지 이곳에서 신세를 진다. 다음 층의 미션은 무려 한 달간의 생존. 이런 상황이 된다면 조금 더 뽑아먹을 수 있다.
물론 영주가 준 기회를 엉뚱하게 써 애써 그의 호의를 날려버릴 생각도 없지만.
"만약 저라면, 지금의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할 것 같습니다."
"어떤 질문이지?"
요는 저들이 자신에게 거짓을 증언했다는 것을 저주의 계약서로 말미암아 증명하고 저들을 처단할, 아주 확실한 증거를 남기라는 뜻이겠지. 그러면 자신이 완전한 복수를 해 주겠다고.
하지만 나는 가보를 훔친 범인이 저놈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영주는 아마 거기까지는 모를 거다. 의심 자체는 하고 있겠지. 애초에 시작이 생명의 반지였으니. 내가 수를 써 놓았으니 재조사가 들어가면 간단히 궁지에 몰릴 거다. 거기에 재조사할 명분까지 준다면?
애초에 우리 파티를 여기까지 몰아붙인 것도 도저히 성 내의 사람들에게서 혐의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이리된 거다.
나는 영주에게 내가 듣고 싶은 질문을 말했다.
"저라면, 저에게 가보를 훔친 범인이 누구라고 생각하냐고 묻겠습니다."
요한의 얼굴에 절망감이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