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튜토리얼 - 6층
밖으로 나온 나는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순찰자들의 눈을 피했다.
1회차의 경험, 마력 사용자, 압도적인 신체 능력.
이 삼박자는 내가 성을 제집처럼 움직이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난이도에서 기사라고 해 봐야 수준 이하다. 나는 여유롭게 요한의 방에 들어갔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준비한 단검을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도축용이긴 하지만,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이상 충분하다.
나는 곧바로 위치를 보고는 요한의 침대 기둥 중 하나를 조심스럽게 갈랐다.
그러고는 익숙하게 내부를 파 비밀 공간스럽게 만들었다. 일종의 잔재주다. 과거 검술에 좋다는 말에 조각을 잠깐 했었는데 그때 심심풀이로 익혔던 일종의 공예다.
작은 서랍형 구조. 동시에 티가 거의 안나면서도 은근히 흔적이 남도록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곳에 아티팩트 하나를 숨기고, 곧바로 서랍을 뒤져 요한이 자주 들고 다니는 주머니에 하나의 아티팩트를 더 숨겼다.
아티팩트 감지기를 사용하면 충분히 발각될 거다. 얘들이 은폐 기능까지 달린 고급품은 아니니까. 과거 전수 조사 때는 안 걸렸다가 이제 와서 걸리는 게 이상하긴 하겠지만, 글쎄, 내가 할 일은 이게 다가 아니라서.
나는 곧바로 요한의 방을 뒤져 요한이 쓴 글씨들을 확인했다. 요한의 필체를 그대로 베껴 편지 한 장을 작성한다. 받는 사람은 주변의 귀족 중 한 명.
내용은 대강 내부에 일이 생겨 계획을 앞당겼다 정도면 충분하다. 단순하고 탑에서 흔히 쓰이는 암호화를 거치는 꼼꼼함까지 발휘했다. 전문가가 본다면 하루 안에 풀 수 있는, 간단하고 쉬운 과정만 거친다.
'좋아.'
그러나 이걸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나는 곧바로 사냥꾼들이 사냥해온 짐승들이 저장되는 창고로 잠입했다.
곳곳에는 짐승들의 사체가 가공되고 있었다. 나는 그중 아직 덜 가공된 이들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사실 대부분은 즉시 가공되기 때문에 제대로 된 것들은 없지만, 최근에는 전수조사다 뭐다 하면서 바빴는지 일부 사냥감들이 남아 있었다.
상하지 않도록 가공 처리된, 가죽이 벗겨진 시체들이 이곳저곳 걸려 있었다.
그중 요한이 가져온 것들을 확인한다. 각자 할당량이 있는 만큼 요한을 뜻하는 표식이 있는 사냥감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슴, 새, 멧돼지 등 제법 양이 되었다. 관리직이 되면서 할당량이 줄었다고 알고 있는데, 아무래도 비밀 창고를 다녀오는 과정에서 숨기기 위해 사냥을 조금 더 해 왔나 보다. 성의 식량 사정이 나쁘니 자기 이미지를 생각해서일 수도 있고.
나는 곧바로 요한이 사냥한 사슴 앞까지 이동했다. 밤인 만큼 아무도 없었기에 행동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나는 골동품 중 하나를 인벤토리에서 꺼내 사슴의 항문에 쑤셔 넣었다.
비위가 조금 상하긴 하지만, 나는 꾹 참고 다른 골동품들을 각각 사냥감들의 몸에 하나나 두 개 정도씩 넣어 두었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어떻게 변명할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다. 아니, 이정도로 작업해놨는데 변명을 내뱉을 수나 있을까?
아예 대놓고 이렇게 증거가 나오면 골치 아플 거다. 그래도 평판이 있으니 조사 정도는 해줄지도. 그래 봤자 끝까지 무죄를 증명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실제로 가보를 훔친 놈이기도 하니까.
나는 재판 날을 기대하며 감옥으로 복귀했다.
아직까지 간수는 일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다시 독방 안으로 들어간 채 모르는 척 바닥에 누워 요한의 설득을 엿들었다.
내가 나갈 무렵에는 주하연과 남은주를 설득하더니 지금은 나연과 나서윤을 설득하고 있었다.
주하연과 남은주는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흔들렸을까? 궁금하긴 했지만 이 둘은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나연 자매다.
다행히 둘은 절대로 배신할 수 없다며 소리를 질렀고 우리는 무죄로 나갈 것이며 당신은 죗값을 치를 거라는 나연의 목소리가 감옥을 울렸다.
나서윤 또한 평소 내게 보여주던 모습과는 다르게 증오로 가득 찬 목소리로 당신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까지 하고 있었다.
나는 내심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이 둘을 도저히 설득할 수 없다고 느꼈는지 요한은 처음에는 구슬리는 듯하더니 중간부터는 협박을, 마지막에 가서는 재판이 끝나고 두고 보자며 아주 걸레로 만들어주겠다는 욕설을 내뱉고는 면회를 끝내버렸다.
그들은 밖으로 나오다가 한 시간째 기절하고 있는 병사를 보더니 깜짝 놀라 달려왔다.
"이봐!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간수 하나는 급하게 다른 간수를 깨우더니 곧바로 작은 창을 열어 독방 안을 살폈다.
내가 멀쩡히 누워있자 그는 위협적인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어디서 죄인 주제에 간수에게 손을…!"
"내가 무슨 짓을 했다는 겁니까. 여기서 나가지도 못하는데."
과연 요한에게 포섭된 놈답게 내게 무척이나 적대적이었다.
"네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다는 거냐!"
"거 목말라서 물 좀 달라고 할 생각에 불렀는데 오다가 저 혼자 넘어져 기절하는 걸 어쩌라는 겁니까? 깨워도 안 일어납니다. 물이나 좀 주시죠?"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고 확실히 문이 잠겨 있는 것을 확인한 간수는 욕설을 내뱉으며 작은 창을 닫아버릴 뿐이었다.
물은 안 줄 모양인 갑다.
다행히 간수는 무사히 깨어났고, 기절 시킨 게 워낙 순식간이라 기억이 잘 안 나는지, 혼자 넘어졌다는 말에 얼떨떨해하면서도 못내 수긍했다.
이로써 완전 범죄 성립이다.
갑자기 작은 창이 열리면서 요한의 얼굴이 나타났다.
"음?"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요한이 비웃음을 띤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도둑놈 아닌가."
솔직히 광대놀음이 따로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방금 뭔 짓을 하고 왔는지 알면 저런 얼굴로 쳐다보지는 못 할 텐데?
나는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무슨 일이지?"
여기까지 온 마당에 말을 높일 생각은 없다. 요한은 신경 쓰지 않았다.
"비참한 꼴 그만 보이고 순순히 포기하라고 말해주고 싶어 왔다. 하, 자매 년들이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주 갸륵하던데?"
그렇게 크게 소리를 질러댄 만큼, 이 둘이 포섭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들켰다고 생각하겠지. 그만큼 자매의 반응은 격렬했다.
"뭐, 우리 나연이랑 서윤이가 나를 좀 생각하긴 하지."
"순순히 포기하고 가보를 내놓는 게 어떤가?"
아주 대놓고 나를 농락할 작정인 듯했다. 안 그래도 나연 자매 때문에 짜증도 났겠다 요한은 나를 이용해 화를 풀 생각인 듯했다.
"있어야 주지. 나는 훔치지 않았다니까."
"영주 님께서도 네 말을 믿어 주실까? 인벤토리를 숨긴 너를? 하, 빠져나올 구멍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없는 걸 어떻게 주냐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죽여도 안 나와."
"그럼 나올 때까지 고문을 받겠지. 가보를 뱉을 때까지 죽고 싶어도 죽지도 못한 채 영원히 고문을 받을 거다. 네놈의 죄가 확정되면 그 빌어먹을 자매 년들을 네 눈앞에서 따먹어주지. 그때 그년들과 네놈의 반응이 무척이나 궁금하단 말이야?"
"호오, 자매만? 나머지 둘은 잘 꼬신 거냐?"
"…그럼. 아주 그냥 대놓고 벌려주던데. 살고 싶으면 그래야지. 암."
잠깐의 멈칫거림. 하지만 곧바로 이죽거린다.
애매하다. 넘어가진 않은 것 같은데, 나연 자매에 비하면 별다른 반응이 없다.
중립인가? 상황을 보겠다고 했을까? 주하연이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서로 존중하는 관계였을 뿐, 나나 그녀가 일정 거리 이상 서로 가까워지려고 하지는 않았었으니까. 살길이 있다면 의리보다는 실리를 선택할지도 모른다.
"아닌 거 같은데. 걔들 생각 이상으로 눈 높아. 너처럼 능력 없고 가난하고 못생기고 좆도 작은놈한테 붙을 거 같지는 않은데?"
나 또한 마주 이죽거려준다.
그러자 요한은 내가 아직까지도 기가 꺾이지 않은 모습에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아직도 네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물론."
나는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군. 그래. 내일 보자고. 하찮은 도둑놈아. 내일이 지나면 바닥을 기며 내 발을 핥게 만들어주지."
"와, 그런 취향이었어? 남자까지? 취향은 존중하겠는데, 나한테 강요는 하지 말자. 응? 너무 역겹잖아."
솔직히 동성애든 SM이든 나에게 피해만 안 오면 알바는 아니지만.
끝까지 한마디도 지지 않는 내 모습에 되려 더 짜증이 났는지 바닥에 침을 뱉은 요한은 창을 닫고는 나가버렸다.
다음 날이 되자 우리는 재판장으로 끌려갔다.
나는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영주를 바라보았다.
중년의 남성. 푸른 머리칼을 지닌 남자는 냉랭한 표정으로 우리를, 정확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가운 눈동자와는 다르게 그 시선은 집요하리만치 나를 망막에 새겨 넣고 있었다.
"재판을 시작하지."
"그럼 피고…."
"아니, 절차는 되었다. 그냥 내가 진행하지."
영주는 냉정한 얼굴과는 다르게 말투가 조금 빠른 것을 보아 어딘가 다급해 보였다. 동시에 어딘가 피로해 보였다. 그럴 만도 하다. 가보를 찾아야 하고, 고블린의 침략에도 대비해야 하니, 한동안 무척이나 바빴을 거다. 잠이나 제대로 잤을까?
그는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유신후 라고했던가?"
"네 영주 님. 처음 뵙겠습니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인사했다.
"…이런 상황에 인사라. 그래. 처음 보는군 반갑다. 나는 영주 이 성의 영주, 스페레스다."
스페레스 멜리드.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네가 가문의 가보를 훔쳤나?"
"…훔치지 않았습니다."
"그래. 이야기는 대강 들었다. 확실히 일리는 있더군. 첩자라기엔 너무 우수하고, 세운 공이 만만치 않지. 아마 그대들이 조금만 부족했어도 내가 그대들을 직접 볼 일은 없었을 거다. 덕분에 그대의 지난 행적에 대해 알아봤지. 네가 성을 돌아다니며 성을 조사한 적도, 특별히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 적도 없으며 그럴 시간도 없었다. 그래, 저 김인실이라는 자가 말한 성의 비밀 통로로 들어가는 것 말고는 말이야."
"거짓입니다. 저는 그게 어디인 줄도 모릅니다."
"당당하군. 그래 아공간을 갖고 있다고?"
"예 그렇습니다."
"왜 숨겼지?"
나는 미간을 살며시 찌푸리며 말했다.
"어떤 물건이 사라진다면 바로 의심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니라고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흐음. 그런가? 그 아공간은 어떤 방식이지? 듣기로는 아공간에 물품을 넣으려면 손으로 잡으면 된다던데? 그냥 네가 집어넣고자 하는 것을 손으로 잡으면 들어가는 건가?"
"아닙니다. 소유자가 들고 있다면 집어넣을 수 없습니다."
주인 인증이 필요한 에고 웨폰이나 수련자들이 개인적으로 소유권이 인정된 물품들은 훔칠 수 없다.
예를 들어서 나서윤이 잠을 자기 위해 장비를 벗어서 침대 옆에 두었다고 치자. 그건 소유주가 나서윤으로 인정된 상태라 인벤토리에 넣을 수 없다. 그게 가능하면 수련자들은 하나같이 도둑으로 전직했을 거다.
그러나 반대로 수련자가 아니면 훔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이 비밀 창고. 소유주가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고, 소유주도 NPC다.
그 외에 자신의 마력을 불어 넣어 놓으면 그 마력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는 인벤토리에 넣을 수 없다.
나는 대강, 일행에게 의심받지 않는 선에서 내가 아는 인벤토리의 정보를 영주에게 넘겼다.
영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게 물었다.
"아공간의 크기는 모두 일정한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아니라고 하는 게 맞다.
어차피 맞다고 해도 요한이 저 둘을 이용해 다르다고 속여버리면 되려 성가셔진다. 영주에게 신뢰를 잃는 것보다는 낫다.
모두 일정하다고만 할 수 있으면 정말 편하기는 하다. 일정 양의 물품을 넣음으로써 아공간에 물품이 없음을 증명할 수 있으니가.
영주는 내게 인벤토리에 대해 묻고 우리의 행적과 요한 측, 우리 측의 이야기를 모두 들으며 끊임없이 질문하고 비교했다.
하지만 요한은 애초부터 준비를 잘 해온 듯 하나같이 우리에게 불리한 증언만을 고집했다.
서로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그나마 나온 것이라곤 내 방에서 나온 생명의 반지뿐인데, 그마저도 아공간 때문에 영주 또한 의아하다고 생각하는지 결정적인 증거로 선택되지는 않았다.
어느덧 질문의 타겟은 나를 넘어 일행에게까지 넘어갔으며 우리의 행적이 낱낱이 파헤쳐졌다.
결국 내가 마력을 쓸 수 있다는 것도 알려졌고, 고블에게서 도망치는 와중에 각성했다는 거짓까지 토해야 했다.
영주마저 놀란 표정이었다. 마력을 각성했다는 것은 내가 기사가 될 최소한의 자격을 갖췄다는 뜻이니까.
영주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러자 오히려 요한은 점점 초조해하고 있었다.
여러 증언, 상황은 그에게 유리하다. 전수 조사에서 없어진 물건들이 발견되지 않은 상황이다. 남은 거라곤 우리 아공간 뿐이고. 그런데 영주가 생각 이상으로 조심하고 있었다. 게다가 생각 이상으로 나를 지지하는 인원이 많았다. 저택의 하녀, 근처 숙소를 사용했던 병사와 과거 3층의 북문에서 내 뒤에서 고생했다 말했던 기사, 심지어 노집사와 우리를 찾아왔던 툴라 경까지 우리를 지지하는 말을 내뱉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도난 사건이 없었다. 그런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들은 단 한 번도 물건을 탐내지 않았다는 증언을 해 주었다.
그 때문일까. 영주가 고민하는 것이 보였다. 영주는 지금 우리를, 정확히는 나를 '아깝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심 내가 부디 가보를 훔치지 않았기를 바라고 있는 듯했다.
나도 대화 중간부터 이상함을 느꼈기에 요한을 몰아가는 발언을 일절 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자기 변론에 가까운 말들만을 반복했다.
그러자 한참을 장고하던 영주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주의 계약서를 사용하겠다."
뭐?
그게 있다고? 여기에?
나는 소리 없는 경악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