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튜토리얼 - 6층
요한과 함께 들어온 노집사는 간질에 걸린 사람마냥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정말로, 정말로 신후 님 당신이십니까?"
"무슨 말씀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노집사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말했고, 나는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했다.
"당신, 당신께서 영주 님의 가보를 훔쳤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노집사는 분기를 참지 못한 듯 점점 목소리가 커지더니 마지막에는 숫제 소리를 질렀다.
"저희가 창고를 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몇 번을…."
"인벤토리 일족!"
"풉!"
노집사의 뜬금없는 개드립에 주하연이 저도모르게 웃음을 뿜었다.
움찔.
이해한다. 나도 설마 저딴 병신같은 명칭을 당당하게 외칠 줄을 몰랐거든.
웃음을 참는 것은 성공했지만 얼굴이 움찔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그럴수가… 신후 님이… 정말이란 말인가…."
노집사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목격했다는 듯 절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노집사를 대신해 요한이 나섰다.
"정말 믿을 수가 없군. 이런 이들을 내가 성으로 데려왔단 말인가? 처음부터 가보를 훔칠 생각으로 성으로 왔던 게냐!"
"어이가 없군요. 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저희 파티가 성에 공헌한 것은…."
"닥쳐라! 감히 귀족 가문의 가보를 훔치고도 그런 뻔뻔함이라니!"
요한은 정말 얼굴 가죽이 두꺼웠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만, 저는 훔치지 않았습니다. 인벤토리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미 인벤토리라는 단어가 나온 시점에서 어느 정도 예상이 간다.
1회차에서 혼자 도망쳤던 김인실. 그가 어떤 이유인지 요한에게 붙었다.
"김인실과 박남영이 이미 다 실토했다. 너희가 인벤토리 일족 출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너희 일족은 하나같이 아공간을 선천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지? 얼마 전 일족이 멸망해 남은 이들이 너희뿐이라고 들었다. 그런 너희를 받아준 영주 님을 배신해?"
'시나리오 쓰고 있네.'
아주 거하게 썼다. 애초에 영주가 우리 능력을 알고 받아준 것도 아니고. 뭔 제대로 배신한 것처럼 말하고 있어? 그나저나 요한의 말에 따르면 아무래도 김인실뿐만이 아니라 박남영까지 배신한 듯했다. 고문이라도 당한 건가? 어째서? 왜 배신했지? 어차피 튜토리얼이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 뻔히 아는 주제에 붙었다면… 뭔가 이득이 있다는 뜻인데…. 상상 가는 것은 후유증 치료 정도다. 설마 치료해 준다는 말에 넘어간건가?
지금 시점이면 최상급 포션이나 상급 사제는 필요하다. 조금 더 지나면 이제는 포션으로는 답이 없고.
그나저나 이름 참 못 짓는다. 일족이 뭐냐 일족이. 우리가 무슨 뱀파이어냐.
나는 기세등등하게 호통치는 요한을 무시한 채 노집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후우, 저희가 아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더는 숨길 수 없었다. 잡아떼도 김인실과 박남영이 사용하며 우리도 쓸 줄 안다고 지목하면 아무리 잡아떼도 1회차처럼 나올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냥 밝히는 것을 선택했다.
"신후 씨!"
그런 내 행동에 주하연이 깜짝 놀랐다.
"뭐, 죽여도 이미 들어간 물건이 나오지도 않고 저희 아공간 내부를 확인시켜드릴 방법도 없습니다. 확인만 시켜드릴 수 있다면 정말 간단한데 말이죠."
그걸 위해서는 스킬이 필요하다. 지금은 구할 방법도 없고.
"이런 오해가 있을까 봐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저희가 무조건 범인이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당연한 말을! 그런 기술이 있다면 다녀올 수만 있다면 단숨에 해결되는 거 아닌가! 보관도, 빼돌리는 것도 간단하지!"
요한은 꿋꿋이 나를 향해 외쳤다.
"저희에가 그걸 가져갈 수단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창고가 어딘지도 모르고 조사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저희가 이 성에 와서 얼마나 지났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네놈이 타 귀족의 첩자라면 정보 정도는 이미 알고 있을 터! 어디서 말도 안 돼는 소리를 하는 거냐! 네놈이 영주 성 뒤편의 지하실로 들어가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
"…지하실?"
나는 요한을 더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둘이 자백했다고 했을 텐데! 둘은 너희들같이 뻔뻔한 놈들이랑은 다르더군. 차마 자신들을 위해 은혜를 베풀어준 영주 님을 배신할 수 없다며 네 행동을 소상히 전했지. 네가 지하 수로를 가기 하루 전,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지하실에 가는 것을 김인실이 봤다고 했다."
요한 피셜에 의하면 아무래도 우리 일행은 어느 귀족의 의뢰를 받은 스파이 집단 쯤인듯 했다. 김인실과 박남영은 지금 영주에 감화되어 귀화한 사람이고 우리는 끝까지 잡아떼는 첩자인 모양이다.
"지하실에 뭐가 있습니까? 설마?"
"…지하실에는 비밀 창고로 가는 비밀 문이 존재한다네."
거기에 있었나. 솔직히 몰랐다. 애초에 영주 성의 비밀 창고는 1회차에서 누명이었을 뿐, 존재 자체도 뒤늦게 알았다.
그마저도 위치는 몰랐고.
한스가 아니었다면 조금 조사하다가 그냥 지나갔을 확률이 높았다.
"거짓입니다. 저는 그런 곳에 간 적 없습니다. 순찰을 돌던 인원들이 있을 텐데요? 그들 중에서 저나 김인실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
"…없네. 김인실의 일방적인 주장이지. 하지만 반대로 자네들이 무죄를 증명할 방법도 없지 않은가?"
이곳은 지구가 아니다. 무죄추정의 원칙 따위는 없었다.
살려면, 우리가 훔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더럽게 억울하다.
"웃기는군요. 아공간이 있는 제가 도둑질을 했다면 생명의 반지는 왜 아공간이 아니라 방에 굴러다니는 겁니까?"
"실수 했겠지! 멍청한 놈!"
완전 억지다. 요한은 이제 완전히 가면을 벗은 상태였다.
"저희가 첩자짓을 할리가 없지 않습니까. 누가 이런 유능한 인재를 사지에 집어 던진다는 말입니까. 지금 성의 상황을 보십시오. 게다가 제가 정말 가보를 훔쳤다면, 고블린들을 정찰한 결과를 그렇게 보고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냥 숨기고 말았겠죠. 도대체 물건을 도둑맞은 게 언젭니까?"
나는 뻔뻔하게 스스로를 유능하다고 칭했다. 실제로 한 일을 보면 충분히 유능하다.
"자네들이 처음 성에 들어온 날까지는 멀쩡하게 있었다네."
요한이 모조 성배를 바친 날. 아마 그걸 집어넣기 위해 한 번 갔을 거다. 그 뒤로는 가지 않았던 거고.
"난 자네의 말을 믿고 싶네. 정말이야. 하지만 상황이 그대를 믿지 못하게 하는군. 내일 재판이 열릴 걸세. 그대들이 지금 가장 큰 용의자야. 내게 말해봐야 소용없다네. 부디, 내일 그대들이 무죄를 증명하길 바라지."
노집사는 더는 소용 없다는 말과 함께 우리를 지하감옥으로 보내버렸다.
일행은 모두 따로 떨어져 감옥에 갇혀버렸다. 나는 혼자 독방, 여성 진은 둘씩 나눠 가두는 듯했다.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었지만, 별다른 마법적 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감옥인 만큼 방음도 부실했다.
능력치가 높은 나로서는 마력을 이용하면 다른 사람들의 대화가 대강은 들릴 정도다.
나는 감옥 벽에 기대어 여성 진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언니, 언니 어떻게 해. 왜, 왜 이렇게 된 거야."
"서윤아…."
"둘이 왜 배신한 거야? 어째서? 우리랑 함께하면…!"
나서윤이 불안에 떨고, 분노하고, 우울해하는 동안 나연은 자신 또한 혼란스러우면서도 나서윤을 다독였다.
다른 한쪽은 남은주가 울고 있었고 주하연은 남은주를 끌어안은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그 둘이 어째서… 요한은 도대체 왜…."
사태의 원인과 해결 방법, 둘이 우리를 배신한 이유와 요한이 왜 우리에게 이러는지를 알고 싶은 듯했다.
사실, 요한이 우리에게 이러는 이유는 별거 없었다.
영주가 제법 공명정대한 편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마치 자신이 혼자 모조 성배를 가져온 것처럼 보고했고, 그 덕에 후방으로 빠졌다. 거기에 우리 활약까지 더해져 승진까지 해버렸다.
사실 모조 성배를 가져온 것이 혼자가 아닌 우리와 함께 한 일이 되면, 우리의 신분을 보증한 것이 요한이 한 일의 다가 된다. 그마저도 우리가 함께 모조 성배를 가져왔음을 밝혔다면 아마 성에 들어오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을 거고, 신분 보증도 가볍게 넘어갔을 수도 있었다.
요한은 뻔뻔하게 그 신분 보증을 호의라며 감췄다.
그리고는 우리를 북문에 팔아버렸고.
근데 정작 팔려버린 우리가 북문이 뚫릴 뻔한 위기를 막고, 절대 놓쳐서는 안 됐던 정보를 목숨을 걸고 가져왔으며, 힘든 와중에도 영주의 의뢰를 완수해 버렸다.
여기에 사실은 모조 성배마저 우리가 함께 가져왔다? 그렇게 되면 요한은 모조 성배를 가져오라는 임무를 성실하게 완수하면서도 우리를 성에 데려오고 신분 보증까지 하며 영입한 뛰어난 눈을 가진 사람이 아닌, 성을 구한 영웅들의 공적을 가로챈 것도 모자라 영웅들을 이용해먹은 개새끼가 되는 거다.
요한의 평판은 아작나고 멜리드 성에서 안전하게 지내기는 힘들 거다. 아마 다시 일반 사냥꾼이 되어서 목숨을 걸고 사냥을 나가고 방어 최전선에서 죽음을 곁에 둔 채 싸워야 할 거다.
그에 비해 지금은 나가더라도 사냥꾼을 관리 조금 하고 할당량도 줄어들었으며 최전선에서 싸울 일도 없다. 지금 그는 반쯤 관리직이라 빠져나갈 구멍이 있으니까.
그는 적어도 이 성에서 도망칠 때까지 안전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 우리들이 더이상 활약하길 바라지 않았고, 성배를 가져오고 자신이 안전한, 제법 쓸만한 지위를 갖게 된 시점에서 효용이 다했기에 우리를 치워버리려고 한 거다. 하다못해 큰 부상이라도 입혀서 한동안 활동을 하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겠지. 그러니 가장 위험한 북문으로 우리를 보내버린 거다. 근데 우리가 점점 괴랄한 공적을 세우고 점점 커버리자 언제 터질지 모르는 모조 성배 건 때문에 가보를 훔칠 계획을 앞당기고 얼토당토않은 누명까지 씌워버린 거다.
단지 그의 오산이라면 고블린들의 세력이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는 것.
이 성은 버티지 못하고 고블린들에 의해 무너지며, 요한은 결국 죽는다.
나는 벽에 기대 밖의 기척을 살폈다.
우리를 감시하는 인원은 단 두 명.
나는 새벽을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의외의 상황이 찾아왔다.
요한이 지하 감옥으로 찾아온 것이다.
그는 간수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한 시간의 면회를 허락받고는 여성 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설마, 아직 재판 전인데?'
나는 1회차의 끔찍했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요한이 저지른, 성고문이라는 이름 하의 강간 사건.
하필이면 감옥에 갇힌 일행은 4명이 여자다.
나는 계획이고 뭐고 당장 감옥을 쳐부수고 성을 탈출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요한을 엿먹이는 것은 일종의 유희다. 실리는 이미 챙겼다. 내 인벤토리는 최대 확장이 되어 있고, 그러고도 남은 보석과 금화가 가득하다. 가치 있는 골동품도 다수, 폭탄으로 던져버릴 아티팩트도 10개가 넘게 남아있다.
게다가 목적이었던 나서윤과 나윤의 능력치와 스킬 슬롯, 적성 등도 확인해 동료로 영입하기로 결정, 일정 수준 이상 친밀해진 관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만하면 튜토리얼의 목표는 초과 달성이다. 원래 목적 중 하나였던 9층의 던전이 남긴 했지만, 이제는 보너스 스테이지라는 느낌이 들 정도. 물론 챙길 거다.
나는 간수 한 명과 요한이 가는 방향으로 감각을 집중했다.
여차하면 다 부숴버릴 생각으로.
그러나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러니 너희가 증언만 하면…."
"잘도 뻔뻔한…."
"너희들은 살 수 있…."
조금 뜨문뜨문 들리는 말소리.
'아, 배신 유도였나.'
알만하다. 나를 팔아먹으면 너희들은 살려 주겠다며 꼬드기고 있겠지.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며. 나는 팀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만큼, 회유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별문제가 없었다. 하긴, 아무리 그래도 내일이 영주가 직접 참가하는 재판인데 아무리 하반신에 뇌가 달린 놈이라도 오늘 일을 저지르지는 않을 거다.
'이거… 타이밍이 공교로운데?'
지금은 늦은 밤.
새벽에 일을 저지르려고 했으나, 제법 타이밍이 좋다.
나는 곧바로 문을 두드려 간수를 불렀다.
독방은 다른 감옥과는 다르게 문 위에 작은 창살과 아래 음식을 집어넣는 틈밖에 없다.
철컹!
위의, 눈만 겨우 보이는 곳이 열리며 간수가 다가왔다.
"무슨 일…."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철창 사이로 문을 내밀어 눈 옆의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댔다.
"무슨…!"
눈이 커지는 간수. 나는 곧바로 마력을 집어넣어 가볍게 관자놀이를 밀었다.
퉁-.
마력을 깨우치지 못한 병사는 내 공격에 저항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뇌가 흔들린 간수의 눈이 허옇게 뒤집어지며 그가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문손잡이에 마력을 집어넣어 구조를 파악하고는 가볍게 자물쇠를 열어버렸다.
기초적인 마력의 운용. 우리가 마력을 깨우친 것을 모르는 이들은 우리를 평범한 감옥에 가두었고, 그건 치명적인 실책이다.
하긴, 며칠 전만 해도 북문에서 죽어라 싸우면서도 마력 한 줌 쓰지 못했던 우리다. 며칠 사이에 쓸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아는 게 더 이상하다. 그것도 이렇게 능숙하게.
'한 시간.'
그 안에 돌아와야 한다.
면회 시간은 한 시간이고, 면회 중 간수 한 명은 그들을 지킨다. 아마 저 간수는 요한이 포섭한 놈이겠지.
하나는 방금 내가 기절시켰고. 그러니 한동안 지하감옥에 간수는 없다. 죄인들은 하나같이 전투에 동원되고 식량도 부족하니 감옥이 텅텅 빈 것이다.
그만큼 성은 위험한 상황이다.
나는 곧바로 지하 감옥을 탈출했다.
목적지는 요한의 방.
다른 방법도 생각해 봤지만, 이게 가장 효과적이고, 극적이며, 나를 만족케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함무라비 스타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