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20화 (20/317)

# 20

튜토리얼 - 6층

과거와 다르게 공을 끝내주게 세워 놓았고, 앞뒤 맞는 변명들을 준비해 놓았다.

게다가 일이 잘못되어도 빠져나가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나는 흥미로운 감정을 감춘 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집사와 하인으로 보이는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쥘르는 조금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영주 님께서… 진노 중이시라고?"

'평소 영주는 그리 화를 내지 않는 타입인가?'

노집사가 당황할 정도면 추측이 맞을 듯했다.

"예!"

"음, 죄송합니다 유신후 님.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우선 여기 있죠."

"유신후 님 일행을 보필하고 있게. 다녀오지."

곧바로 노집사는 방을 나섰다.

응접실에 남게 된 일행. 나는 하인에게 식사 준비를 부탁했다.

하인과 노집사가 모두 나가자 일행은 분통을 터뜨렸다.

"그렇게 열심히 의뢰를 완수했는데, 도둑놈 취급이라니! 너무한 거 아냐?"

"맞아요!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 썼죠! 아니, 애초에 오빠가 도둑질을 할 리가 없잖아요!"

'미안, 내가 했어.'

나는 이 사실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신후 씨, 정말 안 훔쳤어요?"

분통을 터뜨리는 나연 자매에 비해, 주하연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언니! 설마 신후를 의심하는거에요?"

나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하연을 바라보았다.

"아니, 나도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알잖니. 김인실 씨랑 박남영 씨가…."

내 말에 나연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하, 하지만 신후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아니, 그, 그래도 동료를 위해서라면…."

나연은 주하연의 말에 갈팡질팡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나는 동료들을 위해 제 몸 바쳐 노력하는 리더 같은 이미지를 보여 왔으니, 동료를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아티팩트를 도둑질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듯했다.

동시에 그게 과연 자신의 가치관에 어긋나는지에 대해서도 혼란을 느끼는 듯했다.

도둑질은 나쁘지만, 동료를 위해 했다면, 그건 나쁜 건가? 아니 나쁜 것은 맞다. 하지만 자신이 신후를 비난할 수 있을까? 자신들을 위해서 그렇게 희생하고 도와준 은인에게?

나는 시험 삼아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했다면?"

흠칫.

일행의 표정이 일변했다.

"만약, 그 둘을 위해 내가 그랬다면… 어떻게 할 거야?"

나는 나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연은 한껏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 그게, 그러니까…."

자신의 가치관과 은인의 행동이 충돌한다. 게다가 그 동기마저 알고 있다 보니, 도둑질이란 행위가 나쁨을 알면서도 즉각 비난하지 못했다.

반지를 훔치는 바람에-그렇게 오해중이다- 현재 일행에게 실시간으로 폐를 끼치고 있음에도 나연은 끝내 아무 말을 하지 못했고, 잠시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던 나서윤은 내 옷을 붙잡으며 말했다.

"죄, 죄송해요 오빠, 도, 도둑놈이라고 해서 죄송해요…."

"미안하다… 서윤아…."

내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나서윤의 머리를 쓰다듬자 나서윤은 괜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오빠. 나는 오빠가 도둑이라도…."

"거짓말이거든."

"…네?"

"응?"

내 말에 일행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던 나윤도, 눈물을 글썽거렸던 나서윤도, 무거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던 주하연과 고개를 숙였던 남은주까지, 모두 나를 바라보았다.

"거짓말이라고. 생명의 반지인지 뭔지 내가 안 훔쳤어. 애초에 존재 자체를 몰랐는데 어떻게 훔치겠어?"

"이… 이이이…!"

내 말에 여성 진, 특히 나연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애초에 4층 끝나고 5층 와서 혼자 행동한 적이 얼마나 있다고 내가 도둑질을 해? 우리 얼마 전까지 일반인이었거든? 그런 기술 모르거든? 섭섭하네."

"그래도, 이런 상황에 장난이라니! 너무한 거 아냐?!"

나는 나연의 분노에 짐짓 미안하다는 듯 사과해야만 했다.

"맞아요! 파티장 님, 그렇게 안 봤는데 눈치가 왜 그리 없어요? 거기서 그런 장난을 치면…!"

그 남은주마저 나를 비난할 지경.

나로써는 장난이 아닌, 나연과 나서윤이 얼마나 날 의지하고 믿는가, 나를 위해 그들의 가치관을 바꿀 가능성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나서윤은 괜찮았다. 내 의존도가 높았고, 나를 신뢰했으며, 내가 그다지 도덕적이지 못해도 즉각 괜찮다고 말하며 나를 위로했다. 내가 나서윤의 마음에 차지한 공간이 생각보다 컸다. 어려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계속 유지하고 더 친밀해진다면 아마 완벽하게 나를 지지하는 사람이 될 거다.

그에 반해 나연은 아직 부족하다. 양심에 찔리지만 나니까 어쩔 수 없다는 정도. 아마 동기마저 나빴다면 비난했을지도 모르겠다.

현재로서는 저 정도만 해도 괜찮지만, 미래에서는 그래서 안 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날 떠날 가능성이 있었다.

나를 완전한 예외가 되도록, 나연의 안에 나라는 존재가 더욱 커질 필요가 있었다.

내가 어떤 짓을 하더라도 이유가 있을 거라며 나를 무조건 지지하고 끝까지 따르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대의 정령을 주기에는 조금 위험했다. 완전한 내사람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조금 더 신경 써야겠네.'

역시 사람을 완전히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여성 진의 비난에 가까운 말에 열심히 사과하고 있을 무렵, 하인이 들어왔고 여성 진은 어쩔 수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하인 앞에서까지 그럴 수는 없었으니까.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집사가 우리를 찾아왔다.

"…죄송합니다."

"오해가 풀린 겁니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시죠?"

"일이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확인한 결과, 잃어버린 물건이 한둘이 아니더군요. 죄송하지만, 유신후 님의 일행은 한동안 성을 떠나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뭐가 얼마나 없어진 겁니까?"

한참 고민하던 노집사는 별수 없다는 듯이 상황을 실토했다.

"…다수의 재물과 영주 님의 수집품, 그리고… 가보중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노집사는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가보가 말입니까?"

나는 한껏 놀랐다는 제스처를 연기했다.

그러나 일행은 놀라면서도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그럴 만도 하다. 여기에서 가보의 가치를 정확히 모르니까.

가보 중 하나인 멜리드를 수호하는 검. 내가 아는 한 이 가보는 보통 물건이 아니다. 검으로써의 기능이 문제가 아니다. 메리드를 수호하는 검은 영주의 정통성을 뜻하는 물품 중 하나다. 과장 좀 보태서 이걸 이용하면 가문을 통째로 빼앗을 수도 있다.

물론 조건이 많이 필요하긴 하지만, 지금은 많은 조건들이 맞아떨어지는 상황이다. 현재 성은 무척이나 위험한 상태이며, 이대로 고블린들에 의해 성이 초토화된다면 영지 전체가 망가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 틈을 이용하면 가보 하나로 영지 하나를 통째로 삼킬 수 있다.

대리인 하나를 멜리드의 핏줄로 위장하고 가보로 정통성을 증명, 주변 귀족들이 합심해 조작을 한다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만큼 멜리드를 수호하는 검은 멜리드 가문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귀중한 물품 중 하나다. 평시라면 다른 가보도 있고, 가문이 자체적으로 해결이 가능하기에 불가능한 방법이지만… 시기가 시기인 만큼 예민할 만하다.

요한은 비밀 창고의 물품 중 가장 값어치가 높은 가보를 훔친 거다. 어쩌면 영지를 통째로 삼키려는 수작일 가능성이 있었다. 조작이야 주변 귀족들이 해 줄 터. 아니더라도 비싼 값을 치룰 수 있고. 애초에 귀족의 의뢰인건지 자신이 스스로 계획한 건지는 모른다. 이런 이야기까지는 1회차에서 밝히지 않았었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귀족 가문이 소유한 가보의 가치는 과거 들은 적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 상황까지… 어쩔 수 없군요. 알겠습니다.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노집사는 우리를 향해 고개를 숙이더니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어리둥절해하는 일행에게 나는 중세 시대의 가보의 가치에 대해서-사실 지구의 중세 유럽에서 가보가 실제로 여기만큼 중요한지는 모르지만-설명하며 이러이러한 상황인 것 같다고 말했다.

"…위험하네요."

주하연은 곧바로 우리가 위험한 상황임을 눈치챘다.

"영주의 보물을 훔친 것으로 의심받는 상황에 가보까지 사라졌다니… 이대로 가면 우리가…."

"한동안 계속 조사가 계속될 겁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겠죠. 이걸로 끝일 리가 없어요."

내 말에 일행은 하나같이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가보가 사라졌다며 영주가 분노했다고 합니다. 노집사가 동요했어요. 쉽게 화를 내는 성격이 아닌 겁니다. 영주는. 그런데 화를 냈습니다. 아마 더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질 겁니다."

나는 앞서 했던 추측을 일행에게 밝히며 말했다.

"과거 했던 말이 있었죠. 인벤토리는 아무래도 흔한 능력이 아닌 것 같다고. 실제로 인벤토리를 쓰는 사람을 우리들말고는 본 적이 없습니다. 혹시 보신 분?"

"…확실히 없었어요. 처음 신후 씨가 말했던 대로 인벤토리는 확실히 감췄습니다."

과거 내가 했던 말. 인벤토리는 되도록 숨기자. 이건 중요하다. NPC들은 이걸 아공간 주머니라고 생각하거나 특별한 능력으로 판단한다. 이런 능력이 있는데 짐을 잃었다? 첫 만남부터 이상해지고, 의심을 받는다.

게다가 지금 상황은 최악이다. 이 상황에 인벤토리가 밝혀진다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일행은 손쉽게 눈치챘다.

"…꼭 숨겨야겠네…."

걸리면 성가셔진다. 솔직히 탈출이 어렵지는 않다. 현재 내 능력과 아티팩트 폭탄을 이용하면 성에서 도망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일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 걸리면 끝장이라고 생각할 거다.

"좀 억울하네요. 이거 참… 도대체 누가 우리에게 이런 짓을… 역시 요한일까요?"

주하연 또한 4층의 사건 때문에 요한을 의심하는 듯했다.

"우릴 도와주는 좋은 사람이었는데… 정말 그랬을까? 탑도 2층부터 소개해준 사람이고 우리한테 여러 야영 기술도 알려줬는데…."

나연은 조금 애매하다는 반응이었다.

나는 나연 때문에 대놓고 요한을 지목하며 말하지 않았다. 내가 나서는 것보다 혼자서 판단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나연이 처음부터 쉽게 사람을 믿거나 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시스템에 대해서는 의심하는 법을 배워야한다.

초기에는 희한하게도 시스템이 소개해준 NPC들이 좋은 놈들이라고, 배신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게임에 익숙한 현대인들의 고정 관념이 오히려 독이 된 케이스. 실제로 튜토리얼 NPC가 생존 기술을 처음부터 알려주고 잠자리 만들고 쉬게 해 주면 아군이라고 생각하지 '이놈 우릴 이용하고 배신할지도 몰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으니까.

그러니 튜토리얼 난이도가 이렇게 헬인거다. 조금만 의심할 줄 알면 튜토리얼의 사망률은 지금의 반도 안 될 것이다.

어찌 되었든 나는 일행에게 인벤토리에 대해 함구할 것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우리는 외부인. 아마 이대로 가보를 찾지 못하면 성 전체가 뒤집어질 테고, 우리 또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아직까지야 우리가 이뤄놓은 공적도 있고, 생명의 반지에 관해서는 동기가 조금 있다는 것은 알아도 나머지에 대해서는 의심하기가 힘든 상황이다.

애초에 창고 전체가 털렸다. 우리 다섯이 어떻게 그 많은 창고를 단시간에 다 턴단 말인가? 확인을 해 보면 알겠지만, 우리는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3일이면 지하 수로를 다 청소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이니까. 최근 한 달간 외부에서 들어온 인원 또한 우리가 전부로 안다. 게다가 이 일대는 현재 고블린들로 인해 상인이나 부랑자들의 발걸음이 뚝 끊긴 상태다. 주변 마을과의 왕래도 최소화일 정도.

그 많은 물건을 훔쳐 보관할 곳도, 빼돌릴 방법도 없었다. 인벤토리의 존재가 밝혀지지 않는 이상에는.

여러 상황이 우리들에게 유리하게 맞춰져 있었다.

곧바로 전수 조사가 시작되었다.

하인, 하녀, 시종, 병사 등이 각각 조사실로 향했다.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이나 오랜 기간 영주를 보필한 노집사 정도만이 예외에 해당했다. 그들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행동은 영주에게 치명적이었으니까.

우리들도 다시금 조사를 받았지만, 일행들은 진짜로 아무것도 모르는 만큼 큰 문제 없이 지나갔다. 조사하는 인원들도 우리를 의심하기는 힘들었지만, 일단 반지가 내 방에서 나오기도 했고, 외부인인 만큼 세심하게 조사를 하기는 했다.

의아한 점은 김인실과 박남영과는 따로 조사를 받았다는 것 정도였다. 아니, 애초에 그들이 조사를 받는지도 모르겠다. 물어봐도 얼버무리고만 있으니까.

병자이기에 아예 제외된 걸까? 확실히 그들이 창고를 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긴 했으니까.

성이 뒤집힌 상태로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갔다. 날이 갈수록 조사의 강도는 강해졌고 기사들과 노집사의 얼굴은 점점 초조한 기색을 비쳤다. 영주는 하루에 몇 번씩이나 분노를 표출했다.

전수 조사가 이루어진 지 5일이 지났을 무렵, 일그러진 얼굴을 한 노집사가 우리들을 찾아왔다.

요한을 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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