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튜토리얼 - 5층
"아, 상쾌하구만."
시산혈해.
오랜만에, 아니 사실상 회귀 이후 처음이다. 이 정도로 만족스럽게 화풀이를 한 것은.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시원하게 해소했다.
주변은 고블린들의 피와 시체로 가득했다.
도주하며 상대했던 고블린까지 생각하면 나와 일행이 죽인 고블린의 수가 100은 족히 넘는다.
이 정도면 대 부족이라도 제법 신경 쓰일 만 할 거다. 저격병도 3마리나 죽었으니까.
이대로 두면 아마 더 지원군이 올 터. 나도 이제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둘러보자 갑하갑과 부츠뿐. 나머지 부위는 나서윤에게 넘겼기에 천 옷만이 몸을 가리고 있었다.
문제는 전신이 시뻘건 핏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씼어야 겠네."
나는 나무 하나를 부러뜨린 후 강에 집어 던졌다.
풍덩!
곧바로 뛰어들어 나무에 매달린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
나는 강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빠르게 변하는 주변 풍경을 바라보았다.
중간에 빠져나온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주변을 살피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동시에 가끔 잠수해 간단하게 몸을 씼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어느새 숲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일행의 흔적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강 밖으로 빠져나오는 대신 주변을 계속 둘러보았다.
그러던 중이었다.
강 외곽 쪽에 나윤 자매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들은 필사적으로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체 능력이 좋았기에 내가 먼저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곧바로 강변을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물살이 아직 강한 편이긴 했지만, 높은 신체 능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강변에 다가갈 수 있었다.
나연 자매는 그런 내 모습을 발견했는지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신후야!"
"오빠!"
나는 약간 힘겹다는 듯한 몸짓으로 강변 위로 올라갔다.
"오빠, 옷에 피가…!"
"신후야, 너 괜찮아!?"
몸을 씼기는 했지만 옷에 물든 핏물까지 빼는 것은 힘들었다. 강을 타고 가는 중에 옷을 벗어 빨래를 하기도 그랬고, 어차피 강에 뛰어들 것이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기도 뭐했다.
"아, 응. 괜찮아. 내가 다친 곳은 없어."
내가 괜찮다는 듯 말하자 나서윤은 곧바로 내가 빌려줬던 장비들을 내게 내밀었다.
"이거, 이걸 나한테 빌려줘서…."
"다친 곳은 없었어?"
"…화살이 조금 날아왔지만 괜찮았어요. 이거 엄청 튼튼해서…."
"다행이다."
나는 안심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살아있어 줘서 정말 고마워."
나연은 정말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약속했잖아. 살아서 보자고."
나는 당연한 결과라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킥. 그래, 그랬지. 정말 고마워. 덕분에 우리도 살았어."
"고맙습니다. 오빠."
둘은 내게 다시금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고 나는 약간 부담스럽다는 듯이 화제를 돌렸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늦었으니까. 이제까지 보이진 않은 걸로 봐서는 더 떠밀려 간 거 같아."
"일단 찾아봐야지."
나는 예비용으로 사 두었던 마른 천과 옷을 건넸다.
둘은 배려에 고맙다며 옷을 갈아입고-훔쳐보지는 않았다.-다른 일행을 찾기 위해 강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해가 지는 방향.
어차피 멜리드 성으로 가는 방향은 대강 알려주었으니 강변을 따라 걷다가 흔적이 보이면 그 흔적을 추적하면 된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의 흔적을 발견했고, 일행을 쫓아가 재회할 수 있었다.
주하연과 남은주는 모든 사람이 생환했다는 것에 감사하며 눈물을 터뜨렸고, 나연과 나서윤 또한 힘들었던 과정이 떠올랐는지 결국 같이 울음을 터뜨렸다.
김인실 또한 참지 못한 눈물을 조금 흘렸다.
그러나 박남영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빨리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박남영을 김인실로부터 받아들며 말했다.
박남영과 김인실의 상처는 제법 깊었다.
이대로 간다면 후유증이 남을 수 있었다.
포션이라도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 포션이 나오기에는 이른 타이밍이라 한시라도 빨리 사제에게 상처를 보여야만 했다.
'박남영은 늦었지만.'
하지만 박남영은 사실상 늦었다. 성에 상급 사제가 있지 않은 이상 치료가 불가능 할 터다.
맞은 부위도 무릎. 게다가 물에 빠졌다. 지금이야 둘 모두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지만, 박남영의 상처는 정말 심각했다.
그나마 김인실은 나은 편이었지만 사제의 실력이 부족하다면 얘도 후유증이 남을 만했다. 된다고 해도 오래 걸릴 테고.
과연 저격병의 솜씨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김인실은 후유증이 남더라도 완전히 못 쓰게 될 정도는 아니지만, 박남영은 아예 다리 한쪽을 못 쓰게 될지도 몰랐다.
상처 입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면 하급 포션이나 하급 사제 정도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치료할 수 있지만…. 지금은 그 정도 수준의 사제와 포션으로는 불가능하다. 만약 때를 놓쳐 훗날 후유증을 치료하려면 1군 수준의 사제가 집중 치료를 하던가 랭커급 사제의 최상위 주문, 엘릭서 급 물약을 쓰지 않는 이상 회복은 불가능할 터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 출현하려면 몇 년은 걸리고, 엘릭서는 예비 목숨이라고 불릴 정도로 귀한 물품이다. 돈을 바리바리 싸 들고 가도 구할 수 없는 물건이라고 할까?
즉, 박남영은 확실히 망했고 김인실은 사제의 실력에 모든 것이 달렸다.
성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하나같이 살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렵게 도착하여 겪은 사실과 지도를 내밀자 시험이 완수되었고, 동시에 성이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
[5층에 진입하였습니다.]
[5층의 시험이 부여됩니다.]
[5층의 시험]
-던전을 클리어하세요.
-보상 : 다음 층으로의 이동, 근력, 체력 상승의 영약.
5층에 도착했지만 과거와 달리 뭔가 달라진 상황은 아니었다.
여전히 눈앞의 사람들은 경악하여 내게 사실을 추궁하고 있었고, 나는 일단 부상자들을 쉬게 해 주고 더 높은 책임자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기사를 만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사실이라고?"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내용들입니다. 일행들에게 물어보셔도 같은 대답을 할 겁니다."
"흐음…."
3층에서 나를 도왔던 기사중 하나가 침음을 흘렸다.
"미치겠군. 어쩐지 점점 침공하는 고블린의 수가 늘어난다 했더니…."
한참 고민하던 기사는 나를 향해 말했다.
"아, 고생했네. 일행들의 부상이 많다고 들었네. 특히 두 명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일단 사제를 불렀으니 상태를 보이게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고생했네. 본의 아니게 어려운 의뢰를 한 셈이 되었군. 훌륭히 완수해주었어. 영주 님께 확실히 보고하도록 하겠네."
나는 기사에게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왔다.
나는 일행들이 의료실의 위치를 물어 일행이 잇는 곳으로 향했다.
일행은 하나같이 심각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김인실 씨는 어느 정도 회복은 되긴 하겠지만… 예전처럼 자유롭게 팔을 쓰지는 못할 거라고 해요… 박남영 씨는…."
주하연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다리를… 절게 되실 거라고…."
김인실은 허무한 표정이었고 박남영은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일어나면 끔찍한 소식에 미쳐버릴지도 모르겠다.
"…큰일이군요."
별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직 튜토리얼이 5개나 남아 있다. 박남영이 과연 튜토리얼을 클리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들 피곤에 지쳤기에 치료가 끝난 이들은 가서 쉬라는 말을 전했다.
한동안은 휴식이다. 과거와 같은 보고를 넘겼으니 아마 영주는 다시금 지하 수로 토벌을 의뢰하겠지.
만약 그가 의뢰를 하지 않는다면 몰래라도 가야 할 판이다.
그곳 말고도 다른 던전이 있기는 하지만, 히든 퀘스트도 있고 내가 1회차에 가본 던전인 만큼 그곳이 편하기도 하다.
몬스터도 약하고.
일행은 하루를 푹 쉬었다.
다음 날이 되어 다친 둘을 찾아가자 박남영은 거의 눈이 죽은 상태였고 김인실은 어떻게든 팔을 움직이려 애를 쓰고 있었다.
대화를 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나는 요한을 찾아보았지만, 식량 수급 때문에 오늘 오전에 밖으로 나갔다는 소식밖에 들을 수 없었다.
어제 우리들의 복귀 소식을 들었을 때 아마 기겁하지 않았을까.
나는 요한이 밖으로 나간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별 같잖은 함정을 파기 위해서겠지. 근데 문제는 그게 1회차에서는 통했다는 거다.
나는 부디 이번에도 같은 행동을 하길 바랐다. 이번 회차에서는 그걸 역으로 이용해 엿을 먹여버릴 계획을 세워 놓았으니.
나는 4층의 보상으로 얻은 스킬 창을 열었다.
[스킬 슬롯]
고유 스킬 : 이중 계약(신화).
스킬 목록
-없음
-없음
-없음
-없음
-없음
-없음
6개의 스킬 슬롯과 1개의 고유 스킬.
나는 과거 '재생의 육체'라는 일반 등급의 고유 스킬을 갖고 있었다.
일종의 자가 힐이랄까?
그러나 이번 회차에서는 가이아의 개입으로 2중 계약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이름의 특성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관리자의 눈동자는 스킬 목록에는 표시되지 않았다.
이중 계약이라는 웃기는 스킬을 누르자 자세한 정보가 튀어나왔다.
[2중 계약(신화)]
-직업 '사제'에 한해 두 신과 계약이 가능하다.
현재 계약된 신 : 가이아.
신. 관리자의 다른 이름 중 하나.
전지전능하지는 않지만, 분명 자신의 차원 안에서는 여러 기적에 가까운 힘을 행사한다.
단, 한계는 명확했다.
그들이 직접적으로 힘을 행사했다간 차원이 찢어진다. 그 틈으로 타 차원의 괴물들이 찾아올 수 있었기에 직접적인 힘의 사용은 차원의 멸망을 불러온다.
게다가 신중의 신이라는 창조신의 제약이 걸려 있어, 일정 이상의 힘을 행사하기도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렇기에 관리자들은 어디까지나 계약자를 통한 간접적인 힘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게다가 거인이나 악마 같은 차원을 침공하는 괴물들의 우두머리들은 그런 관리자들과 비등한 힘을 지닌 마왕들.
서로의 규약에 따라 멸망할지언정 직접적인 힘의 행사는 막혀 있었다.
과거 잘 써먹었던 재생의 육체가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이중 계약의 힘을 생각하면 별거 아니다. 스킬 등급은 일반 - 레어 - 슈퍼레어 - 전설 - 준신화 - 신화로 이어진다. 두 스킬은 무려 5등급 차이로, 비교하기가 미안할 정도다.
계약한 관리자의 특성에 따라 사제의 스킬이 많이 달라지는데, 난 두 신과 계약함으로써 두 가지 특성을 지닌 신성 마법을 쓸 수 있으니, 그 시너지는 엄청날 것이다. 신성력도 최소 두 배, 게다가 가이아는 계약자가 나 하나뿐이라 모든 은혜를 독식한다.
본래 계획은 이 특성을 이용해 미친 버퍼가 될 계획이었다. 이중 계약 특성으로 모든 스킬 슬롯을 버프와 회복 스킬로 채우고, 두 신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 1군 수준의 수련자를 랭커와도 비등한 수준으로 만들 수 있다고 자신했다. 게다가 내 휘하에 단 한 명이라도 랭커가 있다면, 거기에 내 버프를 더하면 어떻게 될까? 홀로 거인 두셋을 상대하는 괴물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지구를 침공한 거인의 수는 약 일백. 동시다발적으로 침공했기에 떨어진 놈들도 많으니, 각개 격파가 가능하다.
과거 절대 뭉치지 못했던 랭커들이 뭉쳤다면 어쩌면 지구는 멸망하지 않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했다. 랭커와 길드들은 서로 싸우기 바빴다. 그나마 내가 속했던 길드를 포함한 몇몇 길드만이 지구를 구한다는 슬로건을 내세웠을 뿐, 자기들의 이익에 혈안이 된 놈들 투성이었다.
게다가 애초에 지구가 랭커의 탄생까지 버티지도 못했고. 다 공허한 얘기다.
단, 지금은 다르다. 지구는 시간이 동결된 상태.
가이아와 또 다른 관리자의 협력이 빚어낸 기적 같은 상황이다.
게다가 육체 능력까지 계승 받아 단순한 사제가 아닌, 전사 역할까지 수행하는 성기사로써의 가능성마저 생겼다.
자힐, 자버프를 사용하며 신체 능력까지 높은 만능형 괴물.
과거 랭커중 하나였던 여신의 대리자를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뛰어넘을 수 있다고 자신했다. 잠재력이 상에 불과하지만, 난 수많은 히든 퀘스트를 알고 있으니까.
거기에 나서윤까지.
그러고 보면 나서윤과 나연의 스킬 슬롯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내 초기 슬롯은 6개. 대부분의 수련자는 3~4개 정도의 슬롯을 갖는다.
나는 제법 많은 편이다. 이 슬롯 하나하나가 스킬 하나인 만큼, 이 슬롯의 초기 개수는 수련자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랭커중 한 명은 무려 11슬롯이라는 미친 수준의 초기 슬롯을 갖고 있었고, 그녀는 많은 스킬 슬롯을 바탕으로 '대마도사'라는 칭호를 얻었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고 나연 자매를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