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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13화 (13/317)

# 13

튜토리얼 - 4층

1회차 당시, 일행은 비슷한 위기 상황을 수도 없이 겪었다. 그 당시에는 이러한 상황에서 결국 점점 더 숲속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고 약간 높은 고지대까지 쫓겨났다.

퇴로는 점점 줄어들었고 도망칠 구석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약간 높은 지역. 그곳에서 고블린들의 부락이 뭉쳐진, 대 부족을 발견했다.

그리고는 결국 몇 명이 도망치는 와중 상처를 입어 끝내 낙오했고, 그들의 희생을 발판삼아 도주에 성공했다.

그마저도 운이 따라 줬다.

우연히 도망친 방향에 숲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강이 있었으니까. 그중 우리가 도착했던 곳은 물살이 강했던 부분이었다.

나는 기억을 더듬고 지도를 살펴보며 거리를 가늠했다.

'가능해.'

가능하다. 아슬아슬하겠지만,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쉬지 않고 달리며 말했다.

"실시간으로 위치가 발각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저들이 모종의 방법으로 저희를 추격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모종의 방법이라 말하며 내게 업혀 신음을 흘리는 박남영을 힐끗 바라보았다.

일행을 바라보자 그들은 내 말에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요?"

남은주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뇨. 방법은 있습니다."

나는 다시 앞을 바라보며 일행에게 말했다.

"지도를 보니 강이 있더군요. 제법 큰 강입니다. 게다가 숲 밖으로 흐르고 있어요."

"강…이요?"

"네. 표시된 폭이 큰 것을 보니 깊이도 깊겠더군요. 그러니 그쪽을 통해 빠져나갑니다. 혹시 수영 못 하시는 분 계십니까?"

"저… 못 해요…."

"…서윤이가 못해."

제길. 나서윤도 못 했나?

"일단 다른 일행이 도와주세요. 강에 도착하면 강철 방어구는 몽땅 버립니다. 인벤토리에 넣으세요. 나무라도 잘라 줄 테니 매달려서 흐름에 몸을 맡겨요. 숲을 빠져나가면 알아서 올라오셔야 합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시구요. 알겠습니까? 어차피 방법은 이거밖에 없어요."

내 말에 일행은 침묵했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그게 최선이라는 것을.

"이제 못 쉽니다. 계속 움직이면 대강 해가 뜰 때쯤 도착하겠군요. 포기하지 마세요. 전투는 되도록이면 피하겠습니다."

그때부터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일행들은 하나같이 죽어라 나를 따라왔다. 상태 창의 개방으로 스텟의 보정을 받는다지만, 이런 상행군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행 중에는 결국 무거운 갑옷을 일부 벗는 인원도 생겨났다.

내가 아무리 전투를 피한다고 해도, 결국 중간중간 고블린과 마주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 경우 최대한 적은 인원을 노리곤 했지만 결국 하나둘 상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어느새 주하연은 남은주를 부축했고, 나는 김인실에게 박남영을 넘기고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이제는 실력을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나는 마치 위기에 성장하는 것마냥 실력을 서서히 드러냈고 일행은 그런 내 등만 믿고 따라오기 시작했다.

피곤한 와중에도 관리자의 눈동자로 아군의 체력 스탯과 레벨을 가끔씩 확인했다. 이런 상황이면 체력 스텟이 은근히 잘 붙는다. 상태 창이 개방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게다가 레벨이 오르면 조금이지만 육체가 회복된다.

확실히 일행들은 강행군을 할수록 체력 스텟이 조금씩 붙었는지 아슬아슬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페이스를 조절했다. 하지만, 결국 한계는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결국 일행 중 체력이 가장 떨어지는 나서윤이 먼저 탈진했다. 잠재력이 최상이라도, 아직 성장도 덜된 아이다. 어쩔 수 없었다.

나연은 말없이 나서윤을 업으려 했으나, 나는 그녀를 말리고 대신 나서윤을 업었다.

김인실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간단히 무시했다.

해가 뜨기까지 총 13번의 전투를 치러야만 했다.

일행은 지쳤고, 상처하나 없는 사람은 나와 내게 업혔던 나서윤 뿐이었다.

도망치는 과정에서 1회차의 루트를 참고하다 보니, 일행은 과거처럼 대 부족을 목격했다. 힘든 와중 더더욱 절망적인 심정이 된 일행. 그들의 의지가 꺾이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생존 본능은 위대했다. 내가 '이대로 죽을 거냐.'고 묻자 일행은 어렵게 시선을 돌려 하나둘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 결과가 눈앞에 있었다.

강이었다.

"도착, 도착했다…."

누군가의 중얼거림.

이럴 시간이 없었다. 해가 슬슬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주하연의 검을 빌려 주변의 나무 몇 개를 잘라내었다.

쿵! 쿵! 쿵!

"말했던 것 잊지 마세요. 방어구는 인벤토리에 넣으세요.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몰라도, 어떻게든 살아서 봅시다. 살아만 있다면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멜리드 성은 숲이 끝나고 나면 해가 지는 방향으로 쭉 가시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핑-

푹!

"으아아악!"

말하는 와중 날아온 화살. 화살은 박남영을 업고 있던 김인실의 어깨에 박혔다.

"…젠장! 다들 빨리! 빨리 가세요!"

나는 잘라낸 나무를 강으로 밀었고, 일행은 각자 나무에 매달렸다.

"화살이 날아오면 나무 아래로 잠시 숨으세요! 조금만, 조금만 버티면 될 겁니다!"

나는 내 갑옷 상의를 벗어 나서윤의 위에 입혔다.

"이건 물에 떠. 그러니 입고 가라."

"오빠, 오빠는요."

"조금 있다가 따라갈 테니까."

"그냥 같이 가자."

나연이었다.

"아니, 바로 가면 쟤들이 쫓아올 수도 있어. 그럼 위험해. 시간을 끌어야 해. 조금, 조금만 끌다 따라갈 테니까."

시간을 끌 필요가 있었다. 나도 조금 지치긴 했지만, 어차피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나는 투구와 완갑마저 벗어 나서윤에게 씌워주며 말했다.

"언니랑 꼭 붙어있어라. 꼭 찾아갈 테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오빠아…."

나는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며 인벤토리에 있던 붕대와 튜토리얼에서 남겨 놓았던 방어구 교환 티켓을 사용했다.

고블린의 낡은 방패 2개를 꺼낸 뒤 나서윤과 나연의 뒷목에 대고 붕대로 묶어 주었다.

이렇게 쓸 생각은 없었지만, 만약을 위해서다.

어느새 저 멀리서 달려오는 고블린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 정도면 화살에 죽을 일은 없을 거다. 살아서 보자."

"…미안, 미안해. 고마워 신후야. 이 은혜는… 꼭 갚을게. 미안해…."

"가."

나는 그 말을 끝으로 강을 등졌다.

나연과 나서윤은 통나무를 꼭 붙잡고 빠르게 강을 타고 흘러내려 갔다.

저격수가 화살을 쏘려는 기색을 보였기에 나는 재빨리 돌을 던져 견제했다.

이전처럼 머리를 터뜨리지는 않았다. 그저 단순 견제였다.

그 사이 일행이 모두 강 아래로 떠내려갔다. 마지막으로 떠나간 나연 자매도 어느새 점이 되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사이, 고블린 전사들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나는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후후…."

"키릭?"

"킥, 푸핫, 푸하핫!"

갑작스러운 웃음.

내가 배수의 진을 친 상태로 웃을 줄은 몰랐는지 고블린들이 당황하는 모습이 느껴졌다.

"푸하하하핫!"

미친놈처럼 보인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살렸다. 나서윤을 살리고 나연의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다.

요한 놈이 거지 같은 술수를 쓰고 병신같은 박남영이 뻘짓을 하는 바람에 일이 꼬이나 했다.

설마 미래는 바꾸지 않고 나서윤이 이대로 죽어버렸다면 정말 폭발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위기 상황을 역으로 이용해 그녀들의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다.

특히 나연의 마지막 말. 은혜는 꼭 갚겠다고. 그녀는 내게 제대로 빚을 진 기분이었을 거다.

애초에 애들 막겠다고 여기 선 것부터가 단순한 연출이었으니까. 아니, 물살이 얼마나 빠른데 고블린 따위가 쫓아온단 말인가? 1회차에서도 초반에 날아온 화살을 제외하면 별다른 위기는 없었다.

강 자체가 크고 장애물도 적어 흐름만 잘 타면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으니까.

"하아…. 야. 고맙다. 니들 덕분에 목표를 초과 달성했어."

나는 상태 창을 열어 능력치를 확인했다.

[상태 창]

-이름 : 유신후

-나이 : 24

-LV. 7

-정보 LV. 60

-신체 능력

근력 : 31 -〉 32 민첩 : 29 -〉 33 체력 : 39 -〉 40 마력 : 15 -〉 21

레벨 7에 근력은 1 민첩 4 체력 1 마력은 무려 6이 상승했다. 특히 능력치의 자릿수가 오르는 순간은 상태 창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능력치는 대게 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단순 숫자 비교가 아니게 된다. 예를 들면 마력 18과 19보다 38과 39의 차이가 훨씬 크다. 똑같이 숫자 1의 차이인데도 말이다. 게다가 단위나 자릿수가 바뀌면 굳이 상태 창을 보지 않아도 알 만큼 육체가 변한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나는 도주 과정에서 그걸 3번이나 겪었다.

민첩이 상승해 감각이 더욱 예민해졌으며, 마력이 상승해 아껴 쓰던 마력에 여유가 생겼다. 게다가 체력이 40으로 오르는 순간, 조금이나마 쌓였던 피로가 몽땅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 애들 앞에서야 지친 척했지만, 사실은 능력치 덕에 쌩쌩했다.

탑에서는 레벨이 오른다고 능력치가 상승하지 않는다. 레벨은 격이자 잠재력이다.

타고난 잠재력에 레벨이 높으면 그 잠재력에 플러스알파가 되는 느낌이랄까? 그렇기에 재능이 없어도 꾸준한 노력과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

괜히 탑의 이름이 '수련의 탑'인 것이 아니다. 다만, 대부분 그 과정에서 죽는다.

그리고 타고난 잠재력이 높으면 같은 수준이라도 비교가 불가능해지지. 부익부 빈익빈이다. 재능이 높으면 쉽게 위기를 헤쳐나가고 빠르게 성장한다. 위기를 거치고 수련을 쌓으면 더 빨리, 더 많이 강해지고 다시금 더 높은 수준에 도전한다. 재능이 부족하면 이 과정에서 수도 없이 많은 벽에 가로막히지만, 재능이 출중하면 말 그대로 아우토반 위를 달리는 람머르기니가 될 수 있다. 괜히 내가 나서윤에게 목매는 것이 아니었다.

"야. 병신들아."

내 말을 고블린들이 알아들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내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고블린들이 주춤거리며 내게서 물러나는 것이 느껴졌다.

숨겼던 기세를 완전히 드러내자 나는 엄청난 해방감을 느꼈다.

과거처럼 호구짓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자마자 나연 자매를 만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정의로운 용사 코스프레를 하느냐고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 스스로를 성격 파탄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주 좋은 성격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길드에게 착취당하고 지구를 위해 희생한다고 자위하며 그걸 자랑스럽게 여기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그 치열했던 탑의 '상층'에 도달했던 놈이다.

마냥 성격이 좋고 누구에게나 호구였다면 진즉 죽었겠지.

"고맙다."

"키에?"

"여러모로 고맙다고. 목적 초과 달성에 좋은 이미지에 경험치에 게다가 이제는…."

히죽.

나는 이제껏 꽁꽁 숨겨왓던 표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화풀이까지. 너희, 정말 좋은 놈들이구나?"

나는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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