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프롤로그
"종합 랭크 E랭크. 후. 벌써부터 이 모양이라니… 이번 행성은 정말 쓰레기네요."
금발의 아름다운 천사. 그녀가 고운 목소리로 혹평을 내뱉었다.
"…그게 뭔 말이시죠?"
"당신의 종합 성적은 E랭크라는 뜻입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저 빌어먹을 천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잠에서 깨듯 눈을 뜨자 나는 이 특이한 공간에 와 있었고, 눈앞에는 아름다운 천사가 얼굴을 찌푸린 채 서 있었다.
그리고 내뱉은 첫 마디가… 종합 랭크? 그게 뭔데?
"그게 뭐죠?"
"…하. 진짜 파밍이 끝난 건가요…. 이렇게 일찍 인적 자원이 고갈되다니… 얼마 뽑지도 못했는데 벌써부터 자격 미달이 나오는 거죠?"
천사의 한탄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도대체 당신께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설명 좀 부탁드려도 됩니까?"
나는 최대한 불쾌함을 감추며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솔직히 이게 무슨 개소리인지 따지며 욕설을 내뱉고 싶었지만, 상대는 무려 천사다. 상층에 등장하는 괴물을 상대로 나댈 만큼 나는 강하지 못했다.
"당신, 기억 안 나요? 왜 여기 있는지?"
"그거야, 처음으로 탑 상층, 그러니까 60층으로 진입했고… 그리고…."
흠칫.
"…아, 아아…."
내 마지막 기억.
천사의 말이 시발점이 되었을까.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죽었다. 60층에서. 악마의 손에.
상층에 진입해 목표를 달성하고, 그 과정에서 모든 동료를 잃었다. 그리고….
"저, 저는 죽었는데, 어째서?"
"상층에 진입했으니까요. 수련의 탑 상층에 진입한 인원은 죽어도 한 번은 되살아나죠. 그리고는 타 차원으로 나간답니다. 용사로서."
"…용사요?"
"그래요. 용사. 타 차원의 침략으로부터 그 차원을 구하는, 일종의 고오급 용병이죠. 그런데…."
기분 나쁜 눈및으로 나를 슥 훑어본 천사가 비웃듯 말했다.
"그쪽은 함량 미달이네요. 원하는 차원이 있으려나?"
"…원하는 차원 따윈 없습니다. 용사요? 그딴거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냥 제 원래 차원으로 돌려 보내 주세요. 그거면 됩니다."
"꺄하하! 이번 경우에는 그쪽이 선택하는 게 아니에요. 그쪽은 딱히 선택권이 없답니다. 선택은 관리자분들이 하시는 거에요. 그쪽 차원은 이미 멸망해서요. 이런 경우에는 딱히 선택권이 없어요. 돌아갈려면 갈 수야 있기는 한데… 글쎄요? 멸망한 차원에 그쪽이 과연 가려고 할까?"
피식.
천사는 내 말에 웃음을 흘렸다.
"지구가… 망해…?"
"네. 망했어요. 이건 답도 없네. 전력 차이가 뭐. 으음… 딱히 지구 잘못은 아니네요. 상대가 나빳어. 어지간한 문명도 짓밟혔겠는데요?"
"그럼… 부모님은… 내 동생은… 설마…."
"모두 죽었죠."
"…거짓말."
천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제가 뭐하러 그런 거짓말을 하겠어요?"
나는 천사의 말에 머리가 하얘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 이제껏 노력 해왔다.
그런데… 지구가 망했다고? 그럼? 내 가족은? 이제까지의 내 노력은? 그 피와 땀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분, 분명, 수련의 탑 100층에 오르면 집에 갈 수 있다고…!"
"정확히는 원하는 곳으로 보내준다겠죠? 100층을 클리어한 용사라면 어느 차원에서도 와 달라고 사정할 테니까요. 하지만 역대로 그런 용사는 없었답니다."
잠시 말을 멈추고 내 표정을 살피던 천사는 조금 안됐다는 듯이 말했다.
"…뭐.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죠. 흐음. 아. 시간 됐네요. 그럼 관리자 여러분. 이번 용사 후보를 소개합니다!"
천사는 흰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날개를 활짝 펼쳤다.
"이름은 유신후. 출신은 지구. 수련의 탑 최종도달 층수는 60층. 종합 랭크는 E랭크이며 직업은 전사인 1성 용사입니다. 자세한 내용을 띄우도록 하겠습니다. 자, 이번 용사를 픽하실 관리자분께서는 입찰을 부탁드립니다."
-유신후 1성 용사(★)
신체 능력 - 60점(자세히 보기)
장비 수준 - 35점(자세히 보기)
스킬 - 30점(자세히 보기)
업적 - 25점(자세히 보기)
추가 점수 - 0점
종합 점수 150점 용사 랭크 E랭크 판정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여신이 고개를 젓습니다.]
[악마를 증오하는 전사가 용사 후보를 경멸합니다.]
[태양의 수호자가 자리를 떠납니다.]
[봄의 여왕이 안타까운 표정을 짓습니다.]
[사랑하는 낙뢰가…]
"…후. 결국 이렇게 됐네요. 그럼 픽을 하실 관리자분은 없으시니… 랜덤 차원으로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참여해 주신 관리자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나는 멍하니 이상한 광경들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후. 뭐긴 뭐에요. 그쪽이 떨거지임을 증명한 자리지."
천사는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난 어떻게 되는 거죠?"
"랜덤 차원에 떨이로 팔려나갈 거랍니다. 뭐, 그래도 끔찍한 난이도의 차원은 피해갈 거에요. 그 뒤로는… 정착해서 사셔야지. 별수 있나요."
천사는 더는 내게 관심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 참. 그래도 절차는 절차이니… 아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었죠?"
"…네."
"뭐 일단 절차니까요. 이게 지금 당신 고향이랍니다. 이 꼴을 보고도 가고 싶다면 보내드리도록 할게요. 본래 규칙이라."
천사는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곧바로 허공에 투명한 화면이 떠올랐다.
황폐한 땅.
거의 사막이 된 서울.
무너진 빌딩과 죽어버린 도시가 화면에 비춰진다.
차례차례 황폐화된 지구의 모습이 지나간다.
그러더니 다른 장소에서 두 거인이 서로를 향해 무기를 휘두르는 모습이 화면에 비춰졌다.
"거인…."
"맞아요. 거인이죠. 지구를 침략한 종족이에요."
알고 있었다. 지구를 침략한 종족이 거인이라는 것 정도는.
"지구는 멸망했고, 인간은 뭐, 다 죽었죠. 지금 지구는 거인들의 결투장 중 하나로 쓰이고 있답니다. 거인쯤 되는 이들이 본 차원에서 저런 결투를 자주 일으키면 차원에 데미지가 생기거든요. 지금도 지구는 천천히 끝을 향해 가고 있답니다. 당신처럼 고향을 가겠다던 인간들은 하나같이 이 꼴을 보고 지구를 포기했어요. 어때요? 이래도 지구로 갈 건가요?"
"수련의 탑과 지구의 시간은 10:1이라고 들었습니다. 지구는… 1년도 못 버틴 겁니까…."
"1년요? 1년은커녕 한 달도 제대로 못 버텼는데요?"
나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리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갈 수 있는 겁니까?"
"…어딜요? 설마 지구요? 가겠다고요? 저기에?"
"…네."
"…자살 지망하세요?"
천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이제는 지쳤다.
목표를 향해 달려왔다. 어떻게든 다시 가족을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그 가족들이 모두 죽었단다.
심지어는 지구까지 멸망했고.
나는 지구를 구하고 가족을 만난다는 목표 하나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죽어라 노력해서 살아남았고, 수많은 천재들이 나를 앞지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자존심이 수없이 깎여나갔고, 많은 것을 양보하고, 빼앗겼다.
이 아이템은 내가 너보다 더 잘 쓸 수 있어. 지구를 위해 최선을 다할게.
이 스킬은 너보다 내가 더 잘 맞지 않을까?
그 재능으로는 여기까지가 한계입니다. 더 위로 가시면 죽을걸요?
수 없이 들었던 말들. 거대 길드에 속해서 착취당해도 웃었다. 이 길드라면 지구를 구할 수 있을 거라 믿었으니까. 그만큼, 재능 넘치고 뛰어난 이들이 포진했던 길드니까. 오히려 이 길드에 속해서 자랑스럽기까지 했었다.
길드의 최상위 파티가 모두 행방불명이 되었을 때, 뿔뿔이 흩어지는 이들을 모았다. 그리고 다시금 도전했다.
정말 힘들었다.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었다. 그렇게, 그렇게 올라왔는데.
60층이 한계였다. 그들의 말이 맞았다. 내 재능은 상층에서 통하지 않았다. 다 끝났다고, 그렇게 체념했다.
그런데 끝이 아니란다. 게다가 이미 내가 그리 열망했던 고향과 가족은 이미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망했더라도, 죽더라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설령, 아무도 반겨주지 않더라도.
"…진심이군요."
끄덕.
"…미안해요. 도발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선택을 철회해 주시겠어요, 용사님? 당신의 각오가 가볍지 않다는 것은 알겠어요. 부디, 당신의 힘을 다른 차원을 구하는데 보태주시지 않겠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쳤습니다. 죽더라도, 고향 땅을 한 번은 밟아보고 싶네요."
"…재고할 마음이 없으시군요. …알겠습니다. 부디, 후회 없는 여행이 되시기를."
천사는 처음으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지구로 송환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구의 유일한 관리자, 가이아를 만났고,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