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171화. 감히 이것들이(2)
그 무자비한 말에 가까스로 대답한다.
“……아니야. 난 후회하지 않아.”
후회하지 않는다고 대답했음에도 그는 결코 믿는 눈치가 아니다.
“거짓말. 넌 네 경솔한 말로 인해 아벨이 된 것을 후회하고 있어. 작가가 너에게 아벨이 된다면, 아벨이 되어서 자기 말을 잘 들었을 때 소원을 들어준다는 그딴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했을 때, 그냥 욕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살 걸 하고 말이야.”
계속해서 개소리를 지껄이자 이젠 나도 화가 났다.
“네가…… 네가 대체 뭘 알지……? 뭘 안다고 그딴 식으로 개소리들을 지껄이는 거지……?”
화를 내자 그는 오히려 나를 비웃는다.
“나? 크큭― 잘 알지.”
“뭐?”
“벌써 잊었나? 내 목소리를 말야?”
처음부터 느낀 거였지만 그 목소리가 너무나 익숙했다.
“훗― 뭐 어쩔 수 없군.”
저벅― 저벅―
그러면서 누군가가 걸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힘겹게 눈을 뜨고 고개 돌려 바라본다.
“……?!”
그곳엔 소설의 아벨이 되기 전의 최주원이 서 있었다.
세상은 선이 없고 악만 가득한, 모든 걸 비관적으로만 바라보던 그 냉소적인 모습이.
“내가 뭘 아느냐고? 당연히 잘 알지. 난 또 다른 너이니까. 네가 그토록 숨기고 싶어 했었던 또 다른 너 말이야. 너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지워내고 마치 네가 처음부터 진짜 아벨이었던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더군. 크크크― 우습게도 나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말이야.”
“이럴 수가…….”
이제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며 어린아이를 꾸짖듯이 말한다.
“넌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야. 진짜 아벨이 아니라고. 이번에도 넌 절대 지지 않을 거라고, 네 뜻대로 모든 게 이루어질 거라고 자신했었지만 결과는 어떻게 됐지? 지금 네 꼴이 어떻게 됐냐고.”
“…….”
“그래. 너도 할 말이 없겠지. 이제 다 죽어가고 있으니. 그러니 지금이라도 빌어야 해. 작가한테 말이야. 그냥 없었던 일로 하고 돌아가게 해달라고. 원래 최주원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엄마 따위 다시 살아나지 않아도 되니까.”
“…….”
“넌 졌어. 넌 제대로 된 먼치킨 사기캐 아벨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
“크큭― 그치? 내 말 맞지? 그러니까 아무 말도 못 하지 크크큭―”
문득 작가가 아벨을 X신처럼 만들어서 마왕 베리알을 죽이기 직전이었음에도 믿었던 동료들에게 도리어 배신당해 죽기 직전이었던 그때가 떠올랐다.
그리고 소설 속으로 들어와 아벨이 되었을 때도.
마치 주마등처럼 아벨의 삶이 처음부터 흘러지나 간다.
‘……그때도 지금처럼 죽기 직전이었지…….’
극독에 중독되어 있었다.
겨우 열여섯, 아주 어린 나이였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덕분에 황실무고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하지만 덕분에 황실무고에 들어가 본격적인 아벨의 삶을 살기 위한, 루드스에 들어갈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용혈갑과 용골검, 대천사의 피와 드래곤 하트, 뇌전마검과 흑풍흡검, 수많은 마법서들을 바라보며 얼마나 흥분했던가?
그것들만 있으면 소설 속 아벨의 무적인 검술인 마멸광검은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 그랬었지…….’
그런 자신감으로 첫 번째 관문인 루드스로 향했었다.
‘케이…….’
루드스에서 처음 봤었던 그 예쁘고 사랑스러운 여자아이가 떠오른다.
그 새하얀 빛에 투명해진 그녀의 미소가 두 눈 가득 떠오른다.
‘너를 실제로 볼 수 있게 되다니…….’
소설에서 그녀를 통해 얼마나 많이 울고 웃었던가.
그런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영원히 함께하고 싶다고.
나를 제발 떠나지 말아 달라고.
내 손에 매달려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그 가엽고 딱한 얼굴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케이의 손을 잡자 이제는 반짝이는 금발의 아름다운 소녀가 아벨의 팔을 잡아끈다.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녀를 바라본다.
소녀도 자신이 떠날까 봐 역시나 불안해하고 있다.
그 떨리는 눈빛이 바로 그 증거이다.
‘아르시아…….’
작가가 아벨의 운명적 상대로 일부러 만들어낸 소녀.
두 사람의 모든 운명이 마치 하나였던 것마냥 만나자마자 이 사람은 나와 똑같다는 동질감을 받을 수 있었다.
소녀도 아벨이 아니라면 자신은 절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아르시아는 소설에서도 그리고 지금 이 세상에서도 아벨 때문에 가문이 멸문당했었고 아벨 외에 의지할 사람이 그 어느 세상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의 세상에서는 일부러 그녀를 피해 그렇게까지 많은 추억을 만들지 못했었지만 그녀야말로 아벨의 진정한 반쪽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애절한 눈빛에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그래서 그녀의 손도 잡는다.
함께 가자고.
그러자 이번엔 또 다른 누군가가 아벨의 팔을 당긴다.
“아…….”
다름 아닌 내가 처음으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 첫 부인인 사나였다.
그녀 역시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사나…… 너에게 정말 미안하다…….’
그녀는 언제나 침착했고 자신보다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었다.
‘너를 행복하게 만들고 싶었는데…….’
모든 걸 너무 쉽게만 생각한 것 같았다.
‘내가 너무 부족하구나…….’
정말 확신했었다.
아벨인 자기 자신 한 명만 있어도 그 어떤 적들이 와도 쉽게 이길 것이라고.
하지만 그러한 안일함 때문에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들이 죽어버렸다.
‘다 나 때문이야…….’
사나뿐만 아니었다.
케이, 아르시아, 두 사람 역시 가족들을 잃었다.
최주원, 자신이 죽은 어머니를 되살리기 위해 한 모든 것들이 다른 이들에게 엄청난 슬픔과 고통을 안기고 있었다.
소설 속 인물이니 괜찮다고 하기에는 그들의 슬픔이 너무나 처절했다.
이번에 사나는 끙끙 앓으며 결국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었다.
‘다 나 때문인 건가…….’
또 다른 나라는 자의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조금 후회가 된다.
내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너무 많은 슬픔을 만들고 또 만들어냈었으니…….
‘사과하고 다시 되돌려달라고 할까…….’
그의 말대로 정말 그렇게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한다.
그래서 눈을 감고 작가가 나타나기를 염원해 보는데.
그때였다.
“아벨!”
‘?’
“아벨! 어서 일어나 보라고!”
아비를 잃고 슬픔에 일어나지 못했던 사나의 목소리였다.
‘사나?’
이제 일어난 건가?
“너마저 날 두고 떠나면 어떡하냐고!”
그 간절한 부름에 대답하려고 하자.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떡하긴 작가에게 예전으로 되돌려 달라고 해야지. 뻔한 결말이잖아? 네 생각대로 너 때문에 모두가 죽었잖아?”
“…….”
“잘 생각해봐. 원래 소설대로라면 그래도 이 정도로 많이 죽지는 않는다고. 아벨만 좀 괴로울 뿐이지.”
그의 교묘한 말이 달콤하게만 다가온다.
모든 게 사실이었으니.
소설에서는 아벨의 연인이었던 아르시아의 가문 다닐레비우스 백작가만 멸문당하지 않았던가.
“…….”
그래.
다시 소설대로 돌아간다면 이렇게까지는 슬프지 않을 것이다.
“아벨! 돌아오라고! 난 너 없인 살 수 없다고! 네가 내 옆에 없으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고! 제발!”
그 절규가 가슴을 저리게 만든다.
“나만 그래?! 케이도! 아르시아도! 에디린 언니도! 너 없이는 안 된다고!”
* * *
“아벨!”
눈부시게 아름다운 세 여자가 들어오자마자 환자가 누워있던 침대로 뛰어갔다.
에디린이 혹시 아벨이 수잔 황비와 케이, 아르시아를 보면 깨어날까 봐 부른 것이었다.
침대에는 대단히 창백한 얼굴의 신과도 같은 아름다운 아벨이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있다. 이미 죽은 사람처럼 생기가 없었다. 숨소리도 대단히 미약해 귀를 가져다 대고 아주 집중해야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다.
함께 들어온 비트칸과 마고스, 쥬디스, 죠슈아, 제시와 제니는 아벨의 그 무기력한 모습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다.
그 경악스런 얼굴로 아벨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수잔 황비가 모두에게 물은 것이었다.
누구라도 좀 알려주길 바라면서.
그녀로서는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아벨이 어떤 존재이던가?
그냥 용사도 아닌 혼자서 마족 전부를 없앤 이 대륙의 역사상 다시 나올 수 없을 전설적인 용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다니.
게다가 이제는 드래곤들도 없는데 말이다.
어떻게 됐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납득이 될 만한 일이 됐으면 했다.
“…….”
하지만 그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사나도, 다프네도, 그리고 그 당차기만 하던 에디린도.
모두 우물쭈물 망설이기만 한다.
그때였다.
“……어머님…… 사실…….”
사나가 수잔 황비 앞에 주르륵― 눈물을 흘리며 다가온다. 그리고는 그녀의 앞에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용서하세요…… 다 저 때문이에요…… 다 저 때문이라구요…….”
“……?!”
사나의 말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갑자기 다 자기 때문이라니?
그래서 다프네와 에디린을 바라본다.
에디린이 사나를 일으켜 세운다. 하지만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속상해하며 말한다.
“……너 때문이 아니야. 나 때문이지. 내가 먼저 기습을 하는 게 어떠냐고 말을 꺼냈으니. 그리고…… 그리고 너를 지켜달라는 아벨의 부탁도 못 지켰고…….”
그 자책의 말에 사나는 버럭 화를 낸다.
“뭐가 언니 때문이에요! 저를 지키려다 저렇게 된 거잖아요?! 그러니 제 잘못이죠! 어머님! 죄송해요! 저 때문이에요!”
두 사람의 말을 유추해보니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왜 아벨이 이렇게 된 것인지.
“……이럴 수가…….”
털썩―
이젠 수잔 황비도 주저앉았다.
“휴……”
다프네가 긴 한숨을 내쉬며 나선다. 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해야 함을 깨달은 것이었다.
“일단 앉으세요. 제가 전부 다 차근히 설명해 드릴게요.”
제시와 제니는 수잔 황비와 사나를 일으켜 자리에 앉힌다. 다른 이들도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해 따라 자리에 앉는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그녀의 작은 입이 움직인다.
“무슨 일이 있었냐면…….”
다프네는 솔직하게 모두 다 말했다.
아벨이 왜 그들을 기습하게 됐는지와, 저들도 아벨이 자리를 비운 틈을 노려 사나를 기습했었고 그래서 사나를 지키려다 저렇게 됐다는 것을.
“하아…….”
들어보니 이 두 사람을 탓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적들이 한 행동도 아벨에게서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자 이제는 그들도 탓할 수 없었다.
그저 계속해서 깊은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아아…….”
이러한 상황을 만든 모든 신을 탓한다.
사실 다프네가 옆에 있어서 티를 내지 못했었지만 수잔 황비는 주신 아그네스도 원망스러웠다. 본인이 직접 처리할 일들을 굳이 인간들에게 맡겨 이런 시련을 내려주셨으니.
그 마음을 꿰뚫은 다프네는 수잔 황비의 손을 잡는다.
“강하신 분이니 분명 이겨내실 거예요. 아시잖아요. 항상 보란 듯이 이겨내 오셨다는 걸. 그리고 주신 아그네스께서 설마 용사를 지켜만 보시겠어요? 언제나처럼 분명 더욱 강하게 아벨 저하를 돌아오게 하실 거예요.”
다프네가 수잔 황비의 마음을 꿰뚫은 것처럼 수잔 황비도 다프네의 마음을 꿰뚫었다.
그래서 주신 아그네스를 대변하는 듯한 말을 하는 다프네를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본다.
그녀도 주신 아그네스가 만든 또 다른 희생자였던 것이었다.
신에게 얽매여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아픈 아들과 같은 아픈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주르륵―
정말 다 원망스러운데 이곳에는 모두가 다 피해자인 것만 같다.
눈을 들어 허공을 바라본다.
그곳에야말로 아들을 해친 원수가 있다는 듯이.
그때였다.
벌컥―!
허락도 없이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적들이! 적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