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2화
162화. 착각(1)
얀 국왕이 기록한 아티팩트를 본 아벨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입을 연다.
“아덴이 저와 제국을 싸우게 하려는 거 같은데, 재밌군요.”
“다행히 예상대로 코렌트와 바일, 그리고 제국은 소극적으로 관망하고만 있다네. 아덴이 제일 난리야. 딱히 계획이라고 할 것도 없으면서 사위를 없앨 수 있다고 자신하더군.”
그 말에 피식― 비웃는다.
“아무튼 정말 잘하셨습니다. 의외의 소득도 있었구요.”
마태오 국왕이 자신들이 마족 침공을 계획했다고 말한 부분을 뜻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륙의 백성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아덴의 마태오 국왕은 우리 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적극 도와주고 있군요.”
정말 오랜만에 작가가 돕는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아덴의 마태오 국왕이 도왔다고 할 수 있었다.
“이제 어떡할 생각인가?”
“지금 바로 연락해 주시겠습니까? 최대한 빨리 코렌트와 바일의 국왕들을, 그리고 황제 폐하를 만나봐야겠습니다.”
“알겠네. 내가 바로 연락해 자리를 만들어 보겠네.”
두 나라의 국왕들도 이번 마족 멸살 원정에서 돌아온 무인들에게서 아벨의 강함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기에 사실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들은 전형적인 자기 자신들만 아는, 자신들만 살 수 있다면 나라라도 팔 자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공격하지 못해. 대부분의 수하들이 내게 맹세의 마법으로 묶여 있으니까.’
구뇌전마검과 드래곤의 마법을 얻고자 하는 욕심 덕분에 많은 자들이 아벨에게 맹세의 마법으로 묶여 있었다.
그래서 아벨과 맹세의 마법을 하지 않은 아덴과는 달리 나머지 왕국들은, 심지어 제국도 도저히 아벨을 공격할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덴 외에는 감히 아벨에게 대들 꿈도 못 꾼다는 게 맞았다.
“아덴이 아무리 발악을 해보아도 그들 혼자서는 저에겐 상대도 안 됩니다. 물론 그럼에도 자신들이 저를 어떻게 해볼 수 있다고 대단히 착각하는 모양인데, 이참에 황제 폐하의 도움을 받아 단숨에 아덴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려야겠습니다.”
아벨의 말에 얀 국왕은 조금 걱정스럽다는 얼굴이다.
“황제를 너무 믿지 말게. 그가 정의의 검이라고 불릴 정도로 정의로운 자라는 걸 나도 들어 잘 알지만, 황제란 자리가 사람을 변화시켰을 수 있으니.”
얀 국왕의 머리에 그의 무심한 얼굴이 떠오른다.
그 모습이 마치 적당히 변명하며 빠지려 하던 코렌트의 세런 국왕, 바일의 메히르 국왕과는 달리 무언의 동의를 하는 듯한 느낌도 들게 했던 것이었다.
에디린도 동의한다.
“맞아. 그놈을 너무 믿지 말라고.”
비트칸도 역시 주의를 시킨다.
“그 어린 것이 갑작스럽게 황제가 됐고 10인회가 됐다. 그 무게감 때문에 그릇된 판단을 할 수도 있다.”
심지어 다프네까지 경고했다.
“맞아요. 그리고 타티스가 개입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다 옳은 이야기였다.
그렇게 까지들 말하자 아벨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물론 아벨은 크리스찬이 호시탐탐 제국을 노리는 셀비 황비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이번엔 자신을 도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알겠습니다. 황제 폐하도 항상 염두에 두고 있겠습니다.”
그 말에 모두가 만족해한다.
“좋은 생각이네. 조심해서 나쁠 것 없지.”
“그 어떤 인간도 100퍼센트 믿어선 안 돼.”
“뭐 물론 별거 아닌 놈이라 반항하면 언제든 없앨 순 있지만 말야.”
솔직히 조심하라고 했지만 그래도 다들 자신은 있었다.
아벨 혼자만으로도 한 국가의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어서 두 국왕과 황제 폐하를 만나 볼까요? 그래야 빨리 아덴을 에브니아 지도에서 지워버릴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아벨은 그 말을 끝으로 대륙의 새로운 지도를 만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얀 국왕의 적극적인 움직임으로 회의가 끝난 지 겨우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제국의 황제 크리스찬과 코렌트의 세런 국왕, 바일의 메히르 국왕을 화상 통신 마법으로 만날 수 있었다.
최고 대신관들 없이, 그리고 아덴의 국왕이 아닌 새로운 자가 합류해 조금 어색함이 흐른다.
모두가 참석하자 아벨이 먼저 입을 연다.
“우선 이렇게 저를 믿고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런 국왕과 메히르 국왕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아벨과 얀 국왕을 흘겨본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모임의 의도에 관해 묻는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로 우리를 불렀소?”
“……그것도 마태오 국왕은 제외하고 말이오.”
“…….”
크리스찬은 다른 이들처럼 묻기보다는 그저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만 본다.
아벨은 크리스찬은 다른 이들처럼 묻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굳이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그래서 돌려 말할 것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여러분들과 동맹을 제안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제가 있는 미스라임과 말입니다.”
조금 놀란 얼굴로 아벨에게 다시 묻는다.
“……무슨 이유로?”
“설마…… 아덴을 공격하기 위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아덴에서 저를 죽이고 싶어 하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그래서 이참에 제가 먼저 대륙에서 아덴을 지워버릴까 합니다.”
“……?!”
이번엔 정말 놀랐다는 듯이 두 국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 무모해 보이는 말을 꺼낸 아벨과 아덴과의 전쟁 선포에 지대한 지분이 있을 듯한 얀 국왕을 바라본다.
그때였다.
그 둘이 아닌 다른 자에게서 소리가 난다.
“가능하겠나?”
크리스찬이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묘한 얼굴이다.
그 묘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대답한다.
“다른 분들이 가만히 지켜만 봐주신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래? 그런데 키빌리의 분노는? 미스라임이 과연 그분의 분노를 이겨낼 수 있을까?”
얀 국왕이 대신 대답한다.
“미스라임에서 키빌리도 함께 섬길 생각입니다. 그리고 결코 그 섬김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고 말입니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군. 이해했어.”
그거로 끝나는가 했는데.
“아― 그런데 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다.”
“말씀하시지요.”
“아덴을 정복하고 나면, 어쩌면 미스라임이 현시대의 대륙에서 가장 강한 초강대국이 될 텐데, 그렇다면 그 기세를 몰아 우리도 공격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동맹을 맺었다고 하더라도 이참에 최대한으로 영토를 늘리고자 하는 그 유혹은 엄청날 텐데 말이지.”
크리스찬의 걱정은 모두가 갖고 있던 걱정이었다.
세런 국왕과 메히르 국왕도 마찬가지로 불안해 묻는다.
“맞아. 폐하의 말씀대로 그 기세를 몰아 우리도 공격할 수도 있잖는가?”
“우리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어떻게 보장을 하겠는가?”
아벨도 그들의 걱정을 생각하지 못한 게 아니었다.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면 맹세의 마법으로 보장해드렸겠지만, 이렇게 따로 떨어져 있으니.”
비교적 약체 국가였던 코렌트의 세런 국왕과 바일의 메히르 국왕은 간절한 눈빛으로 아벨을 바라본다.
그들은 아벨이 공격한다면 도저히 막을 힘이 없었던 것이었다.
“주신 아그네스의 이름으로 여러분들이 공격하지 않는다면 제가 절대 먼저 공격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겠습니다.”
주신 아그네스의 용사가 주신 아그네스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은 대단히 큰 것이었다.
성서聖書에 주신 아그네스가 자신의 이름으로 맹세할 경우 지키지 못한다면 인간이 결코 감당하지 못할 크나큰 징벌을 내릴 것이라고 한 만큼, 주신 아그네스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은 그만큼 무게가 무거웠다.
그런데 다른 이도 아닌 용사가 주신 아그네스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으니.
“좋아! 알겠네!”
“우리도 그럼 됐네! 믿겠네!”
세런 국왕과 메히르 국왕은 아벨의 맹세를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먼저 공격하지 않겠다는 것만 보장받으면 되는 것이었다.
물론 크리스찬의 미소 짓는 얼굴을 보니, 그 역시 충분히 만족하는 것 같다.
그런 그가 입을 열어 아벨의 생각을 확신시킨다.
“물론 황자가― 아니지 이제 대공이지. 그래. 대공이 제국 출신이라 제국을 공격하지 않을 거란 걸 잘 알지만. 나 역시 제국의 평안과 안녕을 위해서라면 그 맹세가 필요했었다. 알겠다. 내 대공을 믿도록 하지.”
아벨은 전부터 크리스찬이 셀비 황비를 없애기 위해 자신을 적극적으로 도울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기에 당연한 결과라 생각한다.
‘이번 일은 아이작 백작도 원하는 일일 것이니.’
무엇보다 아덴을 없애는 것은 아이작 백작도 분명 원하는 일일 것이었고.
‘그러니 이번만큼은 크리스찬을 믿어도 돼.’
동료들이 크리스찬을 너무 믿지 말라고 했지만 이번만큼은 서로의 이익에 부합이 됐으니 믿어도 될 듯하다.
“시간 끌 것 없이 곧바로 오늘 밤에 출정할 것입니다.”
“……?”
“뭐어?! 오늘 밤에?!”
“벌써 준비가 다 되어 있단 말인가?!”
계속해서 놀라는 그들에게 씨익―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짓는다.
“저에게는 함께하는 드래곤들이 있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 셋으로도 아덴은 충분합니다.”
그 말에 잠시 잊었었던 공포심을 느낀다.
아벨 혼자만도 버거운데 에이션트 드래곤이 둘이나 더 있었으니.
세런 국왕과 메히르 국왕은 오늘 이른 아침 아덴의 마태오 국왕의 말을 듣지 않은 걸 정말이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크리스찬이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길을 열어줘야겠군.”
혹시나 번복할까 봐 아벨 대신 얀 국왕이 신속히 대답한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바로 전에 아벨에게 크리스찬을 너무 믿어선 안 된다고 했었던 얀 국왕이었다.
하지만 이제 정말 아덴 정복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까 한 말은 깡그리 잊고 말았다.
‘훗― 이제 곧 꿈이 이뤄지니 어쩔 수 없나?’
그저 모든 게 잘 풀린다고만 생각하는 아벨과 얀 국왕이었다.
* * *
아벨은 그를 지나치게 걱정하는 여자들, 특히 수잔 황비에게 걱정 말라고 다정히 미소 짓는다.
“걱정 마시지요. 어마마마. 이 두 사람이 있어 결코 제가 다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아벨의 말에 에디린과 비트칸은 가슴을 탕탕 치며 자신 있다는 듯이 말한다.
“맞다. 우리가 있으니 걱정할 거 없다.”
“맞아. 그리고 심지어 제국도 우리를 이길 수 없다고.”
사나도 걱정이 됐지만 수잔 황비를 달래기 위해 애써 괜찮은 척하며 말한다.
“바로 미스라임의 대군이 도우러 갈 거예요. 제국에서 이동 워프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해줬으니까요.”
그럼에도 수잔 황비는 불안한 눈빛을 지우지 못한다.
“…….”
안다.
수잔 황비도 이들이 하는 말을 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다 정해진 일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하지만 이상하게 오늘따라 불안해도 너무 불안했다.
“……아벨…….”
가지 말라고, 제발 오늘은 이 못난 어미를 위해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절로 긴 한숨이 나온다.
“휴…….”
아들의 손을 잡고 말로는 차마 못 하고 간절히 눈으로만 가지 말라고 말을 한다.
‘정말…… 정말 안 가면 안 되겠니…….’
자신이 아무리 막연한 불안에 가지 말라고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말하지만 결국엔 아들이 가야 한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한참을 그렇게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만 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기도하고 있을게…….”
반면 아벨은 수잔 황비가 안심할 수 있게 일부러 여유로운 미소를 보인다.
“네. 어마마마. 잘 다녀오겠습니다.”
‘마족 원정 때보다 더 불안해하는 거 같아.’
어머니의 마음은 정말 어쩔 수 없는가 보다 하고 생각하며 얀 국왕을 바라본다.
“그럼 먼저 가 있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게. 금방 준비해서 가겠네.”
속전속결로 아덴을 밀어버릴 생각이었다. 이미 전쟁 물자는 아공간 주머니에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 뒀기에 정말 대열만 갖춰오면 됐었다.
그리고 사실상 미스라임군은 아벨이 모든 걸 끝내놓은 후 아덴을 정리하기 위해 갈 뿐이었다. 이후 아덴의 풍족한 땅에서 살아갈 미스라임 백성들을 위해서.
살짝 허리 숙여 예를 갖춘 아벨은 에디린, 비트칸과 함께 아덴과 가장 가깝게 위치한 제국의 대도시 다그리스의 좌표가 찍힌 넘실거리는 바다의 시퍼런 물결과 같은 이동 워프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