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124화. 잘라 내(1)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에디린에게 잔잔한 미소를 보인다.
“맞습니다. 그들도 에디린 님이 어떤 에이션트 드래곤인지 잘 알고 있을 테니, 웜급 한 마리와 마족 한 마리만 보낸 걸 보아 분명해 보입니다.”
에디린이 이제 막 에이션트 반열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헤츨링 때부터 신께 사랑받는 드래곤으로써 그 두각을 제대로 보여 왔었기에, 확실히 그 급이 좀 달랐다. 그래서 아벨에게 자신의 하트를 조금 떼어줄 여유도 보였던 것이고 말이다. 그녀가 괜히 나르시시즘에 빠진 게 아니라 하겠다.
“그래 맞아. 진심이었다면 한 마리만 보내진 않았겠지. 적어도 두세 마리는 보내야지.”
“맞습니다. 대충 도발만 하다 돌아갈 듯합니다.”
사나가 그럼에도 걱정이 됐는지 아벨에게 묻는다.
“그래도 그때만큼은 다른 곳에 피해 있으면 안 될까요? 저하가 안 계시면 그냥 돌아가지 않을까요?”
고개를 젓는다.
“내가 없다면 예의 그 본보기로 이곳 폰투스를 없앨 수도 있다. 그리고 애초에 내가 백성들이 고통받음을 잘 앎에도, 그러한 상황 때문에 나 역시 고통스러움에도 애써 찾아가지 않았던 이유가 그것들을 이곳 폰투스로 불러들이기 위함이었으니. 오히려 내가 원하는 바라고 할 수 있다.”
“……그렇군요…….”
“그리고 여기 계신 에디린 님의 강함은 그딴 드래곤 100마리가 와도 끄떡없으시다. 정말이다. 안 그렇습니까?”
그 말에 조금 뜨끔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당당하게 대답한다.
“당연하지. 내가 어떤 드래곤인데.”
“그래. 그러니 정말 걱정 안 해도 된다.”
사나도 이제는 체념한 얼굴로 말한다.
“휴…… 알겠어요. 제가 어떻게 저하를 말리겠어요. 그나저나 케이 소식은 들으셨나요?”
현재 케이는 굉장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바로 아덴에서 동맹을 강화하자면서 카시드를 아르시아와 결혼시키든가, 윌리엄과 케이를 결혼시키라고 압박을 넣었기 때문이었다.
파우스 황제는 아벨이 잘되는 꼴을 절대 볼 수 없었기에 당연히 흔쾌히 수락했었고 말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황제가 직접 개입한 결과라 할 수 있었다.
덕분에 두 가문 다 대단히 곤란해 하고 있었는데, 카시드 보다는 윌리엄의 집착이 더 강했던 까닭에 현재 아르시아는 마멸단으로 도망칠 수 있었고 케이는 아슈트반 영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천만 다행히도 카시드는 그 자존심 때문에라도 자기를 싫다 하는 여자에게 매달리려고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이 싫어 도망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반면 윌리엄은 그딴 건 상관없고 무조건 케이를 이참에 얻겠다는 듯했다. 그래서 황제의 입김을 등에 업고 더욱 기세등등하게 아슈트반 영지에서 눌러앉고 있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윌리엄의 집착은 이제는 광기까지 보이고 있다고 했었다.
대단히 위험한 수준이라고 했다.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아슈트반 영지로 가볼 생각이었다.”
케이 역시 책임지기로 한 이상 확실하게 책임질 생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최애캐가 그런 돼지 새끼에게 또다시 불행한 삶을 겪게 할 수 없었다.
‘맹세의 마법을 써야겠어.’
예전에 걸어놓은 맹세의 마법을 쓸 생각이었다. 케이와 관련 없는 것이라면 뭐든 된다고 했으니, 케이와 연관이 없으면서도 케이에게 접근을 하지 못 하게 하면 될 듯했다.
“오래 걸리시는 건가요?”
“아니다. 하루, 아니 몇 시간이면 된다.”
“정말요?”
“그래. 몇 시간이면 분명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깊은 밤 모두가 잠이 드는 그 시간에 오랜만에 그 돼지 새끼를 만나보기로 한다.
* * *
위잉―
푸른 포탈이 열리고 그 안에서 가면을 쓴 아벨과 에디린이 나온다. 에디린은 나오자마자 숨어 있던 윌리엄의 가드들을 마법으로 재웠다. 그리고 마력으로 막을 만들어 모든 것들을 차단한다.
윌리엄은 세상모르게 잘 자고 있었는데, 그를 흔들어 깨운다.
“일어나라.”
목소리도 변조했었다.
평소보다 굵은 목소리가 방안에 울린다.
“일어나라. 윌리엄.”
조금 더 세게 흔들자 그제야 깬다.
“으으음…… 무슨 일이야…….”
“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네 목을 취하겠다.”
“으음…… 흐익―!”
아벨과 에디린의 존재를 깨달은 것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급히 일어난다.
“누, 누, 누구냐?!”
“그건 알 것 없고.”
“내, 내가 누, 누, 누군지 아, 아느냐?!”
여전히 말을 더듬는 그 돼지를 보며 여전하구나 하고 생각한다.
피식―
“모르고 왔을 리가.”
“뭐, 뭐?!”
“아무튼 시간 없으니 본론만 말하겠다. 너는 내게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맹세를 했으니. 오늘 그 맹세를 지켜라.”
“어엉?!”
휙―
턱―
품에서 잘 벼린 단검 한 자루를 꺼내 윌리엄에게 던졌다.
“……?!”
“내 부탁은 너 스스로 네 성기를 자르는 것이다. 영원히 남자 구실 못 하게.”
“그,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커컥―!”
갑자기 목을 부여잡고 허리를 숙인다.
“너와 나는 숭고한 맹세로 묶인 사이. 내 부탁은 다시 말해 네가 스스로 네 더러운 성기를 자르는 것이니. 해가 뜨기 전까지 해라. 그 전에 하지 않으면 네 목숨이 끊길 것이다.”
“안 돼! 안 되, 된다고! 난 겨, 결혼도 해야 하, 하, 한다고!”
눈물을 글썽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봐줄 생각 없었다.
이참에 다신 케이를 넘볼 생각 못 하게 만들 것이었다.
“넌 이제 그 어떤 여자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없는 남자는 진정한 남자라고도 할 수 없으니, 앞으로 결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저 가면 쓴 자가 아벨인 것 같은데 변조된 목소리 때문에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너 서, 서, 설마 아벨?!”
자신이 맹세의 마법을 한 사람이 아벨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아벨은 피식― 비웃는데.
“설마. 아벨이었으면 널 그냥 죽였겠지.”
그 섬뜩한 말과 살기 짙은 눈빛에 윌리엄은 움츠러든다.
“흐익―!”
“이거 하나 확실히 알아 두거라.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너 같은 건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러니 그냥 아덴으로 꺼져 찌그러져 조용히 살아. 괜히 세상 시끄럽게 하지 말고. 알겠나?”
솔직히 그냥 죽일까도 했다.
근데 이런 일로 죽이는 건 마치 자신이 그 빌어먹을 하베츠가 되는 것 같아서 이 정도에서 마무리 지어주는 것이었다.
‘그러니 감사하게 여기거라.’
“그, 그렇다면 이거 머, 머, 멈춰 주는 거야?!”
“설마.”
결국 눈물을 터트리는데.
“흐엉―! 이, 이, 이 개새끼야!”
“왜 돼지 새끼야. 아무튼 내 호의는 여기까지니까 이후에도 네가 제국에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면 널 그땐 정말 죽이겠다. 그리고 이제 넌 남자라고도 할 수 없으니 결혼할 생각 말아라. 만약 이후에도 결혼하겠다고 깝친다면, 그때도 널 죽이겠다.”
그러면서 에디린을 바라보자 에디린은 당장에라도 이 역겨운 것을 보기 싫어 얼른 공간 이동 포탈을 만든다.
위잉―
“해가 떠오르기 전까지다. 내 말 명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 * *
윌리엄이 스스로 자신의 성기를 잘랐다는 소문은 대단히 빠른 속도로 전파됐는데, 그에 따른 온갖 추문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도 차여서 빡쳐서 자른 거 아냐?”
“에이 설마. 설마 그렇다고 자기 거기를 자르나.”
“크큭― 뭐 그럴 수도 있지. 지가 봐도 X신 같으니까.”
주를 이루는 의견은 하도 케이에게 차이니까,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기의 성기를 잘랐다는 것이었다.
하긴 그 의견이 가장 합당하긴 했었다.
“아무튼 황실에서 그런 X신이 나올 줄은.”
“재능이 모두 세르지 황태자 저하와 아벨 황자 저하께로 몰렸으니.”
윌리엄의 기행 아닌 기행 덕분에 셀비 황비의 세력은 이참에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리고 셀비 황비도 더는 제국에서 고개를 들고 살 수 없었기에, 당장에 아들을 죽이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윌리엄과 레이첼을 데리고 아덴으로 심신을 안정시킨다는 명목으로 황제의 허가를 받아 떠났다.
‘다신 제국에 나타날 생각 말아라. 그땐 정말 죽일 거니까.’
이로써 형제로서의 의리는 지켰다고 생각하는 아벨이었다.
“으― 상상만 해도 더러워.”
소름 끼친다는 듯이 두 팔로 몸을 감싸며 얼굴을 구기던 에디린이었다.
“상상하셨습니까?”
“가끔 애들이 떠드는 걸 들으면 떠올라. 으으으― 끔찍해.”
사나가 옆에서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그래도 너무하셨어요.”
“후후― 그런가?”
“네. 차라리 죽이는 게 나았을 거예요.”
아르시아가 그게 무슨 말인가 해 멀뚱히 세 사람을 바라본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에디린이 자신의 거울 같은 아르시아에게 설명한다.
“아벨 이 끔찍한 놈이 그 뚱돼지에게 스스로 직접 자기 성기를 자르라고 명령했거든.”
“네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윌리엄이 큰소리로 펑펑 울기에 무슨 일인가 해 시녀가 방으로 들어왔었는데, 그때, 시녀가 보던 자리에서 윌리엄이 자신의 성기를 잘랐다고 했었다.
그래서 모두가 윌리엄이 스스로 잘랐다고 알고 있던 것이었다.
“아니! 아무리 명령했다고 그걸 해요?!”
아르시아의 놀람에 에디린이 퉁명스럽게 말한다.
“저놈 특기가 뭐겠느냐.”
“네?”
“저놈이 그쪽 달인 아니더냐.”
“아…….”
단번에 맹세의 마법을 뜻한다는 걸 깨닫는다.
“언제 맹세의 마법을 해두셨대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면서.
“저에게 무언갈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말입니다. 이번 형님 건도 형님이 그에 합당한 걸 원하셨기에 제가 맹세의 마법을 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하― 물론 이렇게 그것을 쓸 줄은 몰랐지만요.”
다들 그 말을 이해했다.
이번 맹세의 마법은 이상해도 너무 이상한 결말이었으니.
그때 아르시아는 원하는 대답을 얻었음에도, 뾰로통한 얼굴로,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넣어 대단히 서운하다는 듯이 볼멘소리를 낸다.
“그런데 스승님께선 계속 저에게 존댓말을 하실 건가요? 전 스승님의 수제자이기도 하고 그리고 나이도 스승님보다 어린데요?”
그 말에 에디린도, 사나도 반응한다.
“그러게 왜 쟤한테는 계속 존댓말이냐? 나야 그렇다고 쳐도.”
“맞아요. 왜 아르시아한테는 계속 존댓말이세요?”
할 말이 없었다.
가까워지기 싫어서 존댓말 한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잠시 침묵을 유지하며 변명을 생각한다.
“네? 왜 그러는데요.”
“그게.”
“그게?”
“제가 저보다 어린 여자에게 이상하게 말을 잘 못 놓아서 말입니다.”
“네에?”
그게 말이 되냐는 반응이다.
“에디린 님, 사나, 그리고 아르시아 영애. 셋 다 제가 나이 어린 귀족 영애에게 말을 놓는 걸 못 보셨을 겁니다.”
사실이었다.
아벨이 자신보다 어린 귀족 영애와 대화하는 건 아르시아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역시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휴…… 알겠다. 지금부터는 말을 놓을 테니.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아무튼 그건 그렇게 하고 그것보다 아르시아. 너는 가문에서 돌아오라고 하지 않더냐?”
현재 본격적으로 에브니아 대륙의 제국과 4대 강대국들이 마멸단에 모인 귀족들과 강자들을 불러들인 것이었다.
아벨은 그 명에 따라 모두 돌아가서 그곳에서 마멸단 활동을 하라고 지시했었다.
아르시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도 사실 가문으로 돌아가야 했었다. 돌아가야 했는데 아르시아는 맹세의 마법을 하지 않았기에 강제성이 없어 명을 무시할 수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의지로 이곳에 머물렀던 것이었다.
“꼭 돌아가야 하나요? 전 여기 있고 싶은데.”
철부지 없는 모습에 에디린이 말한다.
“여기 한번 놔둬 보지 뭐. 한번 마족들에 의해 똥오줌 지려봐야 정신 차리겠지.”
“뭐에요?!”
“아닐 거 같아? 지금 아벨이 어떤 상황인 줄 알고나 하는 말이야? 너 마멸단이 소꿉장난인 줄 아느냐고. 그래도 얘는 8 서클이라도 됐지 넌 뭔데? 넌 이제 고작 4성 후반이잖아?”
아르시아는 그 매몰찬 말에 눈물을 글썽인다.
아벨은 자신이 나서야 함을 깨닫는다.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나가자. 아르시아.”
주르륵―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이 나가자 에디린이 한마디 한다.
“아오! 한 대 쥐어박을 수도 없고!”
사나도 불만스러웠지만 어쩌겠는가.
“참으세요. 아직 어린애잖아요.”
“내가 진짜 아벨하고 한 맹세의 마법만 아니었다면!”
맹세의 마법만 아니었다면, 아벨이 피해 보는 일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묵사발을 냈을 에디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