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115화. 이제부터 다시 시작(2)
“이제 모두 모이셨으니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한시가 급할 때라 말입니다. 죄송하지만 사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천천히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다들 오자마자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바라본다.
“우선 전 폰투스로 다시 돌아갈 생각입니다. 그곳의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제 함께 다닐 이가 없었기에 에디린을 이용해 바로 이동할 수 있었다.
“다시 폰투스로?”
“왜요? 왜 다시 돌아가요?”
“이제 다 끝난 거 아닌가요?”
“맞아요. 다 끝났잖아요. 왜 가요?”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로디아가 따지듯이 성을 내는 여자들을 말린다.
“케이, 사나…… 정의의 신께서 보호하시는 수도 에스토시아는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수도에서 말을 타고 조금만 나가도…… 정말 지옥이나 다름없어…….”
로디아는 도착하기 전 아벨이 폰투스의 재건을 돕기 위해 다시 돌아갈 거라는 얘길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벨을 돕고자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
세르지도 동의한다.
그도 전장에서 직접 지휘하며 싸웠으니 잘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로디아 신관의 말이 맞습니다. 지금 세상은 지옥이나 다름없습니다. 아직도 시체 태우는 냄새로 온 대륙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아벨이 마무리를 한다.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제 곧 이동 워프가 설치될 것이니 자주 황궁에 오겠습니다.”
황궁 안에만 있었던 사람들은 밖을 경험한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아벨을 막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정말이지?”
“네. 어마마마. 걱정 마시지요.”
그때 사나가 그거로는 만족 못 한다는 듯이 말한다.
“저는 따라가겠어요. 저 역시 8 서클 마법사예요. 충분히 저하께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저도 따라갈래요.”
“저도요.”
사나가 간다고 하니 케이와 아르시아도 질세라 나섰다.
하지만 아벨은 고개를 젓는다.
여자들이 함께하면 그만큼 고생도 많았을뿐더러 에디린이 함께 이동시켜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우리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갈만한 곳이 아니다. 지금은 세 사람 다 올 생각 말아라. 세 사람 다 나를 따라오기보다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가족을 만나는 게 우선일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나는 매정하게 대하는 아벨에게 화가 나 소리친다.
“괜찮다구요! 그리고 전 저하의 약혼녀잖아요! 같이 갈 자격 있잖아요!”
그럼에도 아벨은 흔들리지 않는다.
“형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그곳은 아직 지옥이나 다름없다. 집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 절망적인 사람들 앞에 우리가 행복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은 바로 그 사람들을 두 번 죽이는 것일 것이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백성을 위할 때다. 우리 자신이 아니라. 이것에 대해서 내 생각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니 더는 말하지 말아라.”
《얼∼ 멋있는데∼》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들린 그 목소리에 낯이 뜨거워졌지만 가까스로 숨기고는 말을 잇는다.
“나를 정말 생각한다면 이번에는 내 말을 들어라.”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선다.
“다프네 님, 그리고 형님. 잠시 두 분은 저를 좀 보시죠.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마마마, 이야기를 마치고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두 사람만 부르자 남은 사람들은 서운한 얼굴로 아벨을 바라본다.
* * *
두 사람만 남긴 이유는 다른 게 없었다.
“조만간 용사 임명식을 비밀리에 치렀으면 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두 분께 남아달라고 부탁드린 겁니다.”
에디린도 아벨이 어서 임명식을 치르고 용사의 무구를 모아 힘을 최대한 빨리 키우길 원했다.
그래야 자신이 집행자들 눈치 안 보고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용사의 무구 중에선 성녀의 목걸이인 아그네스의 목걸이의 짝인 성스러운 자의 반지가 있었는데, 그 반지는 신성력만 키워주던 아그네스의 목걸이와는 달리 엄청난 마력 상승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드래곤들의 반지처럼 마나의 성질을 ‘빛’으로 변화시켜주었다.
아벨이 마멸광검魔滅光劍을 창안할 수 있었던 데에는 가장 크게는 마고스의 월광참검月光慘劍과 성검 유게네스의 유무였고, 하나 더 더하자면 용사의 반지인 성스러운 자의 반지 덕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확실히 용사의 무구들은 용사를 더욱더 강하게 만들었었다.
“아―!”
“형님께선 주신 아그네스의 신전으로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만 막아 주셨으면 합니다. 임명식 때 내려올 빛은 에디린 님께서 막아 주실 테니 말입니다.”
용사가 임명될 때 하늘에서 엄청난 빛이 내려왔었다. 그 빛은 에디린이 환영幻影 마법으로 감춰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세르지는 걱정 말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내가 접근을 막아 주겠다.”
다프네가 묻는다.
“그럼 언제가 좋으세요?”
원래는 주신 아그네스의 신탁이 있어 아벨이 용사라는 걸 자각시켰어야 했었지만, 지금은 아벨 본인이 자신이 용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언제든 가능했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리고 평일에 저들이 방심하고 있을 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치렀으면 합니다. 형님께서는 언제가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는 당장에라도 도와줄 수 있다. 네 덕분에 나도 황궁에서 힘을 꽤나 키웠었거든.”
실세였던 다이나 황후를 축출시킨 게 대단히 컸었다.
셀비 3 황비는 숨죽이고 나름 힘을 모으고 있는 듯한데 현재로선 황궁에서 어떠한 힘도 없다 하겠다.
다프네가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요. 그럼 당장 내일 새벽에 치르도록 할까요? 제가 앞으로 마족과 마물들의 침략이 있을지 신탁을 받겠다고 하고 신전을 비울 테니 말이에요.”
“좋습니다. 그럼 정확히 새벽 1시에 신전에 가도록 하겠습니다.”
다프네는 일어나면서 말한다.
“알겠어요. 그럼 전 준비하러 가보겠어요.”
세르지도 일어난다.
“나도 준비를 해야겠군.”
아벨은 두 사람을 훈훈하게 바라보며 감사함을 표한다.
“정말 두 분밖에 없군요.”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이 두 사람이 같은 편이라 감사하다고 생각한다.
* * *
매우 아름다운 남녀 여섯이 한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테이블의 중앙에 앉아있는, 이들 중 흑발을 가진 가장 아름다운 자가 묻는다.
“정의의 신의 화신이라 불린다고?”
그러자 바로 왼편에 앉아있던 은발의 미남자가 대답한다.
“네. 그렇습니다. 왕이시여.”
“타티스는?”
“아직 신탁을 내리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그 말에 푸른 머리의 미녀가 거칠게 말한다.
“진짜 빌어먹을 신이군요. 항상 느끼는 거지만 말이에요. 안 그래요?”
다들 대답은 안 했지만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은발의 미남자가 미녀의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새로운 정보를 추가한다.
“그리고 에이션트 드래곤 한 마리가 그 인간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검은 머리 미남자는 옆에 놓인 피같이 붉은 와인으로 목을 축인다.
“에이션트 드래곤이라…….”
“용사 카인과 함께 다녔던 드래곤인데, 최근에 에이션트 반열에 들었다고 합니다.”
이번엔 붉은 머리 미남자가 말했다.
“그것이 남자가 고픈가 보군. 왕이시여, 제가 가서 처리합니까?”
그러자 반대편에 있던 덩치가 크고 호방해 보이던 금발의 미남자가 입을 연다.
“아서라. 네까짓 것이 가봤자 에이션트 드래곤에게 상대나 되겠느냐? 내가 가야지.”
“뭐 이것이?!”
“헤헤― 왜? 한 판 하게?”
벌떡―
“이게 정말! 죽고―”
“조용.”
“……?!”
검은 머리 미남자의 싸늘한 말에 두 사람 다 조용해진다.
조용해지자 은발의 미남자가 말한다.
“확실히 재능은 있는 것 같습니다. 19살인데 벌써 11성의 강함을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래?”
“네. 확실히 신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나 봅니다.”
피식―
오싹한 웃음을 보이고는.
“용사일 경우는?”
“충분히 있습니다.”
“그렇다면 용사 임명식도 조만간이겠군.”
“어떡하실 겁니까?”
후르륵―
한 모금 마시고 테이블에 잔을 놓으며.
“준비를 좀 해야겠어.”
“……?”
“아가레스.”
“네. 왕이시여.”
“우선 황제에게 받은 땅에 가서 아벨을 내놓지 않으면 앞으로도 끊임없이 테러하겠다고 선포해. 제국의 그 땅에서만큼은 결코 인간이 살 수 없게 말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인간들의 역겨운 본성상 영웅이던 아벨을 원망할 것이고 저주할 것이다.
그리고 훗날 아벨이 용사가 된다 해도 결코 잊지 않을 것이고 말이다.
* * *
정확히 새벽 1시에 아벨은 에디린과 함께 주신 아그네스의 신전에 도착했다.
신전 안에는 다프네 덕분에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신전 밖은 세르지 덕분에 개미 새끼 한 마리 지나갈 수 없도록 보호받고 있었고 말이다.
에디린을 처음 본 다프네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르시아 영애?”
에디린이 그 말에 콧방귀를 꼈다.
“흥! 그 아이보고 에디린 님? 하고 물어라. 앞으로는 말이야.”
여전히 얼떨떨해하는 다프네에게 아벨이 설명한다.
“아르시아 영애와 에디린 님이 많이 닮긴 닮았습니다.”
“그리고.”
눈을 부릅뜨고 아벨에게 이후 말을 요구하던 에디린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원하는 말을 해준다.
“……물론 에디린 님이 좀 더 아름다우십니다…….”
“그래. 거기까지 말해줘야지.”
다프네는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하면서도 아벨의 곤란한 얼굴을 보고는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그럼 시작할까요?”
아벨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어서, 어서 시작하시죠.”
에디린은 아벨의 허겁지겁한 모습에 불만이 조금 있었지만, 그건 뭐 나중에 따로 벌을 주면 되는 거니까. 그래서 일단 더 중요한 거부터 빨리 끝내기로 한다.
곧바로 마법을 써 환영幻影 결계를 친다.
순식간에 에디린의 마법으로 주신 아그네스의 신전이 둘러싸였다.
“됐어. 시작해.”
에디린이 말에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여기서 무릎을 꿇으세요.”
다프네가 가리킨 곳은 신전의 정중앙의 유리 천장이 있는 곳으로 빛이 흘러들어올 수 있는 자리였다.
아벨은 그 자리로 가 무릎을 꿇는다.
다프네는 아벨의 머리에 손을 얹고 주신 아그네스에게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는데.
우우우우웅―
얼마 안 지나서 반응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프네의 손에서부터 반짝이는 빛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더니 아벨과 다프네를 뒤덮었다.
그리고 그 빛들이 하늘로 올라갔고 그 빛의 이끌림을 받아 하늘에서도 한 줄기 성스러운 빛이 내려온다.
“……!”
에디린은 카인이 용사 임명식을 치르는 것을 이미 예전에 직접 보았었지만, 그럼에도 이 신비로운 광경에 눈을 떼지 못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아름다워.’
그렇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저 아름다운 광경에서 에브니아 대륙의 공식적인 용사가 탄생할 것이었다.
물론 그 용사를 당분간 사람들은 모른 채 살아가겠지만 말이다.
‘용사의 삶은 고달플 수밖에 없어.’
카인의 삶을 그 어떤 존재보다 잘 알고 있던 에디린이었다. 그런데 아벨의 삶은 카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것 같았다.
‘마족을 멸살하려면 필연적으로 드래곤들과 맞붙어야 하는데.’
신들은 그 어떤 것들보다 재밌는 장난감인 마족들을 결코 포기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대리인인 드래곤들을 시켜 보호하려 들 게 뻔했다.
‘그러니 우리는 운명이야. 아벨. 넌 나 없이는 결코 용사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할 거거든.’
그래서 자신과 아벨이 운명이라고 결론짓는다.
‘……내가 카인을 도운 건 오늘을 위해서였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용사를 도왔던 경험은 바로 자신의 운명인 아벨을 위해서였다고.
이번에 아벨에게 짓궂다면 짓궂은 짓을 많이 했었는데, 아벨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자세히, 그리고 많이 알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아벨에 대해 모르는 게 하나도 없어야 더욱더 잘 도와줄 수 있을 것이기에 말이다.
‘알면 알수록 정말 뛰어나단 말이야.’
나르시시즘.
고대 나르키소스라는 드래곤에서 유래되었던, 뛰어나고 아름다운 자기 자신에게 애착하는 증상을 에디린도 갖고 있었다.
에디린은 자신이 항상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제일 뛰어난 존재라고 믿고 살아왔었다. 그래서 그동안 누군가를 단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드디어 자기 자신만큼이나 뛰어나고 아름다운 존재를 만났으니.
‘빨리 마족 따위 다 죽이고 신혼집이나 차려야겠어.’
용사의 사명을 함께 완수할 것이니, 그 정도 권한은 자신에게 충분히 있다고 믿는 에디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