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화
114화. 이제부터 다시 시작(1)
“!!”
표정은 변함이 없었으나 동공이 확장됐다.
주르륵―
그리고 굵은 땀이 이마로 흐른다.
《야. 대답해라.》
《아…… 이제 들리네요…….》
구오오오오―
에디린의 몸에서 대단히 폭력적인 아우라가 스멀스멀 흘러 오르는데.
똑똑―
“저하. 저예요.”
로디아였다.
“로디아! 잘 왔다! 어서 들어와라!”
천만 다행히도 때마침 로디아가 온 것이었다.
수아아아―
아우라를 걷어드린 에디린은 아벨을 향해 경고한다.
“이따 보자. 우리 애기.”
드륵―
문이 열리자 에디린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셨다.
“무슨 일 있으셔요?”
“아니다. 아무 일도. 그런데 무슨 일이더냐?”
“저하께 궁금한 게 있어서요.”
“궁금한 거? 그래. 일단 앉아라.”
로디아는 아벨의 건너편 의자로 가 앉았다.
뭔가 결연한 얼굴이었다.
반드시 아벨에게서 궁금한 무언가를 듣겠다는 그러한 얼굴.
한참을 질문 대신 아벨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다 묻는다.
“……저하. 저하께선 정말 정의의 신의 현신이신가요?”
“뭐?”
“정말 세상에서 말하는 정의의 신의 현신인가 해서요.”
피식―
그녀가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분명 정의의 신전에서 로디아를 닦달했을 것이다.
빨리 좀 알아보라고.
그런 걸 보니 아직 정의의 신은 그들에게 신탁을 내리지 않은 것 같았다.
정말 개구쟁이 신이다.
“나는 정의의 신의 현신이 아닐 것이다.”
그때 아주 좋은 생각이 났다.
그래서 아벨은 그 생각을 즉각 실천하기로 한다.
로디아는 아벨의 말을 좀처럼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전장에서 그 엄청난 위용을 직접 보았으니 말이다.
그 누구라도 그때 그 모습을 보았다면 아벨을 정의의 신의 현신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바로 지금의 로디아처럼.
“정말이셔요?”
“그래. 정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신의 현신이라는 느낌이 없단 말이지. 물론 그에게 내가 많은 은혜를 받은 것은 같지만.”
로디아는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은 눈치이다.
그녀 입장에서는 자신이 동경하는 아벨이 정말 정의의 신의 현신이라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벨은 생각나던 말을 하기로 한다.
“그리고 로디아. 네게 나도 할 말이 있다.”
“말씀하셔요.”
바로 돌직구를 날린다.
“너의 역할은 나에 대한 감시겠지. 안 그런가?”
그 돌직구에 매우 당황해한다.
“네, 네?”
아벨은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해두기로 한다.
“나는 네가 나와 가까운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너에게 실망이 크다.”
“그게! 그런 게 아니라!”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냐? 로디아 네가 나에 대해 간과한 게 하나 있는데, 나는 나와 한 배를 탄 세르지 형님이 황태자가 된 이후로, 나 역시 정의의 신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알 수 있게 됐다. 예전과는 다르게.”
“억울해요! 감시가 아니라, 저는 그저 저하께서 정의의 신의 현신이 맞으시다면 그에 맞는 대우를 해드려야 하기에!”
“그리고 신전에 보고를 하겠지.”
“그건―!”
“그게 감시라는 것이다.”
“……?!”
“다른 뜻이 있어 특정 상대를 관찰하고 그것을 상부에 보고하는 것이.”
아벨이 처음으로 자신에게 무서운 얼굴을 보이자 로디아는 어쩔 줄 몰라 한다.
“네가 어떤 마음으로 나를 감시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나는 앞으로 너와 함께 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 시간부로 이곳을 떠나라.”
“저하!”
싸늘하게 바라본다.
“로디아. 너는 적들에 둘러싸여 사는 사람의 마음을 모를 것이다. 나는 너를 믿고 상냥하게 대했지만 결과는 배신이라니.”
“알겠어요! 더는 감시 안 할게요! 저하! 죄송해요! 제가 다시는 안 그럴게요!”
“내가 널 어떻게 믿지? 그리고 네가 감시를 하지 않겠다고 하지마는, 결국엔 네가 보고 들은 것을 정의의 신전에 알릴 거잖아?”
“……?!”
이제는 너무나 억울해 눈물을 글썽인다.
그 모습을 본 아벨은 후우― 하고 긴 한숨을 쉬더니.
“좋다. 그간의 정이 있으니 네게 한 가지 제안을 하겠다. 네가 이 제안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에 따라 너의 처우가 달라질 것이다.”
“뭐든! 뭐든 할게요! 말씀만 해주세요!”
“맹세의 마법을 해야겠다.”
“……!!”
역시 맹세의 마법에는 꽤나 놀란 얼굴이다.
“걱정 말아라. 이상한 맹세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니. 앞으로 내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맹세만 하거라. 그렇다면 내가 너를 믿어 주겠다.”
“아…… 정말 그거면 되나요……?”
“그래. 그리고 너만 했다고 생각 말아라. 지산도 했으니 말이다.”
“지산도요?!”
고개를 끄덕인다.
“하겠느냐, 말겠느냐. 할 생각 없으면 지금 당장 나가 주어야겠다.”
잠시 망설이다가.
“……할게요. 하겠어요. 대신.”
“……?”
“저하께서는 제게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도 해 주세요.”
아까 아벨이 한 말이 거짓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예전 마족 단탈리안 때부터 자신에게만 거짓말을 한다고,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고.
피식―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좋다. 그렇게 하지.”
그러면서 아공간 주머니에서 맹세의 마법을 할 마도구들을 꺼낸다.
마법 양피지에 서로의 피로 맹세의 문장을 쓴다.
수아아아―
매번 느끼던 그 기분 나쁜 빛에 둘러싸며 로디아와도 맹세의 마법을 체결했다.
소설에서의 배신자들 중 구제할 만한 사람들은 모두 마친 것이었다.
쿠리엘은 훗날 나타나도 별거 없을 것 같았고 정신 못 차리는 카시드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로디아. 이제 나는 널 앞으로 전적으로 믿겠다.”
“네. 저하. 저를 제발 믿어 주세요. 전 저하께 해를 끼칠 생각이 추호도 없다구요.”
“그래. 알겠다. 오늘 심적으로 많이 피로했을 테니 이만 돌아가 쉬어라.”
확실히 로디아는 많이 지쳐 보였다.
지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네. 알겠어요. 저하도 어서 쉬세요.”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춘 후 곧장 방을 나선다.
드륵―
로디아가 나가고 아벨은 또 하나의 위험물을 처리했다는 안도감과 성취감에 의자에 등을 깊게 기대며 눈을 감았는데.
《준비해.》
“……?”
《오랜만에 대련이나 하고 오자. 어서 일어나.》
공간 이동을 할 포탈을 만들고는 아벨을 무시무시하게 노려보고 있던 에디린이었다.
* * *
말을 마을에 도착할 때마다 갈아타면서 쉬지 않고 달렸음에도 장장 2개월이 걸렸다.
현재 아벨과 로디아만이 황궁에 왔었는데, 죠슈아와 지산은 각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아벨은 황제의 알현실로 향했다.
“다녀왔습니다. 황제 폐하.”
파우스 황제는 아주 멀쩡히, 오히려 전보다 훨씬 성장해 돌아온 아들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알았으니 나가봐라. 많이 바쁘다.”
“네. 폐하.”
오히려 내쫓아줘서 고마웠다.
예를 갖추고 밖으로 나간다.
밖으로 나가자 수잔 황비부터 시작해 사나, 케이, 아르시아, 세르지까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벨이 나오자 8개월 전 그때처럼 수잔 황비가 가장 먼저 반긴다.
“아벨!”
아들의 손을 잡으며 묻는다.
“어디 다친 데는 없니?!”
아벨도 환히 미소 지으며 걱정하는 수잔 황비의 손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네. 보시다시피 어마마마의 기도 덕분에 아주 건강합니다.”
하지만 수잔 황비는 아들의 몸을 샅샅이 만져보며 확인해보고 나서야, 그제야 안심하는 표정을 짓는다.
“정말 다행이구나…….”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마마마.”
“아니야…… 네가 더 고생이 많았지…….”
“우리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모두 이동하시죠.”
“그래. 이동하자꾸나.”
그래서 모두가 일단 아벨의 방으로 이동하기로 한다.
아벨은 황궁에 다시 올 때마다 그 위상이 급격하게 올라가 있었는데, 전에는 아벨을 그저 대단하다고 바라봤다면, 이젠 모두가 마치 세상 검사들처럼 경외하는 얼굴로 아벨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동하면서 한 시종에게 말한다.
“내 방으로 다프네 님도 모셔 오거라. 드릴 말씀이 있다고 말이다.”
“네. 저하.”
시종을 보내고 아벨의 방에 도착하자, 이곳으로 올 줄 알았던 시녀들이 각자의 기호에 맞게 음료를 준비하고 있었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아벨이 잔잔한 미소와 함께 말을 꺼낸다.
“모두 잘 지내셨습니까?”
얼굴을 보아하니 모두가 매우 수척해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일로 대륙 전역이 마물들의 시체와 피로 황폐해졌으며 곳곳에서 그 마물들과 맞서 싸운 용사들의 시체 태우는 냄새와 그 시체의 가족의 울음소리가 끊임이 없었으니 말이다.
수잔 황비가 대표로 말한다.
“우린 모두 잘 지냈단다. 황궁까지는 그 사악한 것들이 침범할 수 없었으니 말이야.”
“맞아요. 저희는 항상 안전하게 지냈어요. 저하께서 가장 위험하셨죠.”
“저하 혼자 마물들을 막아섰다고 들었어요. 왜 그랬어요? 위험하게.”
“그러다 다치시면 어쩌시려고.”
물꼬가 트이자 참고 있던 말들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그 모습이 귀엽게 느껴져 소리 내어 웃는다.
“하하―! 내가 떠나기 전에 말하지 않았더냐. 조력자가 계시다고. 그분께서 다 없애주신 것이지 내가 한 게 아니다.”
“그런데 왜 같이 안 오신 거예요? 어디 계셔요?”
“사실 이 근처에 계신다. 모습을 나타내면 귀찮아지셔서 나타나지 않으시는 것이지. 아― 그리고.”
“……?”
에디린과 카인에 대한 오해가 생각났었는데, 생각난 김에 이들에게도 부탁하기로 한다. 될수록 많은 사람들이 알고, 될수록 많이 퍼트리면 좋은 것이니 말이다.
“너희들도 카인 폐하와 에디린 님, 두 사람이 연인일 수도 있다는 가설을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다들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네. 그렇다고 들었어요.”
케이가 매우 궁금하다는 듯이 묻는다.
“설마 진짜인가요?”
아벨은 그 물음에 고개를 젓는다.
“아니다. 나도 그런 줄 알고 물었다가 정말 크게 혼났었구나. 카인 폐하는 에디린 님의 절친한 친구의 아들이어서 정말 모자 관계였다고 하더구나. 내가 이 이야기를 지금 꺼내는 이유는 그분께서 그 가설을 매우 거북해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 이야기를 들은 너희들이 아니라고 적극 퍼트려 주었으면 하는구나.”
“아―! 알겠어요. 적극 퍼트릴게요.”
“그래. 부탁한다.”
그때 에디린이 텔레파시로 잘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정말 나랑 똑 닮았네. 저 아이.》
아르시아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닮았다고.》
《맞아. 확실히 닮았어. 내가 좀 더 아름답긴 하지만.》
《…….》
《대답.》
《네?》
《대답 안 하느냐고.》
《너무 당연히 에디린 님께서 더 아름다우셔서 대답 안 했습니다.》
《조심해. 지켜보고 있으니까.》
아벨이 별안간 식은땀을 흘리자 아르시아가 묻는다.
“스승님? 갑자기 왜 땀을 흘리세요?”
그러면서 손수건으로 닦아주려고 했다.
아벨은 닦아주려는 아르시아의 손을 잡고는 괜찮다고 고개를 젓는다.
“괜찮습니다.”
정중하게 거절하며 자신의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그런 아벨을 아르시아는 야속하게 바라본다.
그때였다.
“저하. 다프네 님께서 오셨습니다.”
드륵―
그리고 문이 열리고 다프네가 들어왔다. 아벨은 일어서서 씨익― 미소 지으며 다프네를 반갑게 맞이한다.
“오랜만입니다. 다프네 님.”
다프네도 아벨을 향해 해맑게 미소 지으며 다가갔다.
“그러게요. 좀 더 자주 봐도 될 텐데 말이에요.”
“앞으로는 자주 뵙게 될 것입니다. 어서, 어서 이리와 앉으시지요.”
“네. 고마워요.”
다프네까지 자리에 앉자 아벨은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