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108화. 역할 분담(2)
“아니다. 사나. 너는 케이와 함께 차라리 황궁에서 어마마마를 보살펴주었으면 하는구나. 너까지 가면 어마마마께서 의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아벨의 말에 사나는 조금 섭섭한 표정을 지었었지만, 하지만 수잔 황비가 아벨에게 어떤 존재인지 잘 알았었기에, 그건 그것 나름대로 큰 도움이 된다 생각하여 결국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다른 이들이 나선다.
“그럼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저하. 저하께 받은 무투술로 저하를 돕고 싶습니다.”
“저도 따라갈게요. 어차피 가야 했어요.”
지산과 로디아였는데, 로디아는 아직은 신의 눈이라 할 수 있는 대신관이 아니었기에 괜찮았다.
두 사람은 분명 도움이 될 것이었다.
“좋다. 따라와라. 함께 가자.”
그러자 카시드도 마지못해 동조한다.
“그럼 저도 도와드려야겠군요. 같이 가시죠.”
지산과 로디아까지는 괜찮았지만 카시드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아직 본 실력을 보여줄 때가 아니었으니.
“아니다. 넌 아덴으로 돌아가 아덴을 돕거라. 넌 아덴의 왕자가 아니더냐.”
“그게―”
말을 자르며 차갑게 말한다.
“넌 아덴으로 가야 한다. 네가 제국에서 제국을 위해 싸운다면 아덴에서의 너의 입지가 흔들릴 것이다.”
다들 아벨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맞아. 카시드 너는 아덴으로 돌아가는 게 맞는 거 같아.”
“저하의 말씀이 맞는 것 같군. 아덴에서 아덴의 사람들을 돕는 게 네게 도움이 될 거다. 아덴도 공격받을 것이니.”
“아덴으로 가. 저하를 난처하게 만들지 말고.”
“네가 저하를 따라가면 저하가 욕을 먹을 거야.”
자신만 거절당하자 조금 당황하던 카시드였다.
하지만 아벨의 말이 맞는 말이었기에 기분 나쁘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제 생각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맞습니다. 저도 아덴의 백성을 위해 싸워야겠군요. 아덴의 위대한 왕자이니 말입니다.”
아벨이 일어서며 말한다.
“그래. 잘 생각했다. 그럼 이 자리는 이만 파하도록 하자. 준비를 해야 할 듯하니.”
그래서 모두 아벨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가 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아벨이 아르시아를 불러 세운다.
“아르시아 영애는 잠시 저를 좀 보시지요. 그리고 케이는 이따 내가 찾아갈 테니 죠슈아와 함께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그래서 아르시아만이 아벨의 방에 남게 되었다.
* * *
모두 떠나고 아벨과 아르시아 단둘만 남았다.
“앉으시지요.”
“네. 스승님.”
아벨도 함께 자리에 앉으며 묻는다.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저는…… 스승님께서 가르쳐주신 검술을 갈고 닦았어요. 조금 늦게 시작해서 그런지 성취가 아직 부족하지만요…….”
천혜안으로 미리 봐뒀기에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물어본다.
“어느 정도입니까?”
“부끄럽지만 현재 4성 정도예요…….”
정말 매우 부끄러워했기에 부드러운 미소를 보인다.
“단 3년 만에 4성 검사에 오른다면, 보통은 천재라고 불린답니다. 정말 노력 많이 하셨군요.”
아벨의 칭찬에 아르시아는 사람의 영혼을 능히 홀릴만한 미소를 짓는다.
“……감사해요…….”
두근―
그 미소를 보며 생각한다.
‘적응했다 생각했는데…….’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다.
가슴이 두근거려 터지려고 했다.
역시 운명의 상대라서 그런지 외모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더 작용하는 듯했다.
그 작고 예쁜 입이 오물거린다.
“……스승님께 꼭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스승님이 반드시 돌아올 거라 믿고 있었거든요…….”
“고맙군요. 믿어 주셔서.”
“뭘요…… 당연한 걸요…….”
아벨이 아르시아 때문에 심장이 두근거려 당황하는 것처럼 아르시아 역시 아벨의 얼굴을 차마 마주 바라보지 못했다.
얼굴을 분홍빛으로 물들인 채 시선을 계속 아래에 두고 있었다.
“그럼 지금 루드스에 들어가셨습니까? 전에 루드스에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벨의 물음에 고개를 젓는다.
“아…… 아니요……. 저하께서 안 계셔서…… 그리고 가문의 원로님께 1대 1로 검술을 배우는 게, 검술 성취 면에서 더 빠를 거 같기도 했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사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기도 했구요…….”
그랬다.
아르시아는 남자들의 시선뿐만 아니라 여자들의 질투 어린 시선도 힘들어했었다.
‘맞아…… 그랬었어…….’
이것에 대해선 아벨도 예전부터 의문이 있었었다.
소설에서도 아르시아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사람 자체를 두려워했을 뿐만 아니라 애써 무시하고 멀리하려고 했었는데, 작가가 왜 아르시아를 루드스로 보냈었냐는 것이었다.
물론 그땐 그래도 집에만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미카엘 백작이 루드스에 입학시켰다는 설명이 있긴 있었지만, 딸을 대단히 아끼던 그의 성향상 아무래도 이해가 힘든 부분이었다.
“잘하셨습니다. 들어가셨다면 다른 이들의 시선과 질투 때문에 정말 많이 힘드셨을 겁니다.”
아벨이 이해해주자 그간 힘들었던 게 생각났는지 눈물을 보인다.
“……역시 스승님께서는 이해해주시는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한다.
“……확실히 우린 비슷한 점이 많나 봅니다…….”
그 말을 하고는 아벨은 흠칫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런 말을 해선 안 됐는데 자기도 모르게 하고 만 것이었다.
놀란 얼굴을 숨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아무튼…… 죄송하게 됐지만 전 다시 떠나야 합니다.”
아르시아에게도 아벨이 자신한테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러한 행동에 대단히 야속해 했다.
하지만 자신과 아벨은 사나와 케이와 같은 그러한 관계가 아니었기에 그저 속만 태울 뿐이다.
“……알고 있어요. 사실 바로 떠나신다고 해서 조금 서운하지만…….”
아르시아도 아벨의 행동이 맞는다고 생각했기에 더는 서운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응원해줘야 함을 깨닫고는 응원하기로 한다.
억지로 씨익― 웃으며 아벨에게 말한다.
“하지만 스승님의 말씀이 맞아요. 스승님께서 백성들을 위해 싸워주신다면 백성들은 더욱 힘을 내서 마족의 공격에 버틸 수 있을 거예요.”
“죄송하군요. 이렇게 멀리서 저를 보기 위해 오셨는데, 오시자마자 제가 떠나야 한다니.”
“아니에요. 제 생각 말아요. 스승님을 전적으로 이해하니까요.”
아벨은 애써 서운해하지 않으려고 하는 아르시아의 그런 모습조차 안쓰럽게 느껴졌다.
아르시아는 작가가 만들어 놓은 설정 때문에 만난 지 몇 번 안 됐는데 아벨을 사랑하는 게 느껴졌기에 말이다.
“그럼 바로 돌아가실 겁니까? 차라리 이곳 황궁에서 어마마마와 그리고 다른 아이들과 함께 지내시지요. 그게 더 안전하실 겁니다.”
그 말에 화색이 돈다.
“좋아요. 저도 황비 마마와 언니들과 더욱 친해지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제가 정말 남아있어도 될까요……?”
조심스러워 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한다.
“걱정 마시지요. 제가 잘 말해 둘 테니.”
지금은 그렇게 하는 게 아르시아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던 아벨이었다.
* * *
아르시아와 대화를 마친 후 곧바로 케이를 찾아갔다.
“죠슈아 잠시 자리를 비켜 주겠나?”
“네. 저하.”
죠슈아는 케이를 위해 군말 없이 방을 나섰다.
케이와 단둘이 된 아벨은 착잡한 눈으로 케이를 바라본다.
항상 생각했었다.
최애캐 케이는 자신에게 있는 것보다는, 더 좋은 사람에게 훨씬 더 많은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시한부의 삶과 다를 바 없었으니.
소설에서의 케이의 불운했던 삶을 떠올리면 항상 가슴이 찢어지듯 아파왔다.
“……잘 지냈느냐?”
“저보다 그 아이가 먼저인가 보죠?”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너와 여유를 갖고 오래 대화하고자 함이었다.”
사실이었다.
그래서 케이를 나중으로 미룬 것이었다.
“……정말이죠……?”
케이는 그 말이 듣고 싶어서 물은 것이었다.
정말이길 바라며 간절한 마음으로 아벨의 얼굴을 바라본다.
아벨도 그 간절한 얼굴을 마주 바라보며.
“그래. 정말이다. 너와 먼저 대화했다면 길게 대화 못 했을 것이다. 일단 앉자.”
이제야 좀 얼굴이 풀린다.
“어떻게 지냈느냐? 이제 루드스도 졸업 학년이겠구나.”
“네. 이제 졸업 학년이에요.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예요…… 도대체…….”
“너도 나를 데려간 이가 드래곤이라는 걸 들었을 거다.”
궁금해하는 케이에게도 에이션트 골드 드래곤 에디린과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해준다.
조용히 듣기만 하던 케이는 말이 다 끝나고 나서야 그제야 입을 연다.
“정말 고생 많으셨겠군요…… 분명 뼈를 깎는 수련을 했을 텐데…….”
역시 그 누구보다 아벨의 입장에서 생각하던 케이였다.
그 예쁜 마음에 울컥하던 아벨이다.
“……앞으로는 너에게 걱정거리가 돼선 안 되니. 그런데 이번에도 네가 걱정을 많이 할까 봐 두렵구나.”
그 말에 애써 미소 지으며 말한다.
“아니에요. 저하를 정말 믿어요. 그리고 저하의 스승님이신 에디린 님이 함께하시잖아요.”
“……고맙다…… 믿어줘서…….”
“제가 믿어드려야죠.”
그때 문득 케이를 처음 본 그 날이 떠올랐다.
입학식에서의 그 예쁜 얼굴이.
지금도 충분히 예쁘고 아름다웠지만, 확실히 그때의 풋풋하면서도 호기심 가득했던, 걱정이 적어 보였던 그때가 가장 보기 좋았었다.
“……너는 나와 함께해서 힘들지 않으냐……?”
“……?”
뜬금없이 왜 그런 말을 하냐는 얼굴이다.
“……난 항상 두렵다…… 말은 다신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했지만…… 사실은 언제든지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이…….”
자기도 모르게 솔직한 말이 나와 버렸다.
아무리 강해졌다 하더라도, 잠깐 방심하면 그때와 같이 손 한 번 못 쓰고 당해버린다. 그것들이 자신을 봐줘서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이지 솔직히 봐주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었다.
“저하…….”
케이의 얼굴이 점점 슬픔으로 물들어가자 이내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
이미 다 끝난 이야기였으니.
“미안하다…… 내가 괜한 말을 했구나…….”
케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벨에게 다가오더니.
“아니에요…… 저하의 마음 이해해요…….”
아벨의 두려워하는 얼굴을 자신의 품으로 감싼다.
“저하를 위해 기도할게요…….”
잠시 그렇게 안겨 있던 아벨이다.
그녀도 그리고 자신도 잠시라도 이 안타까움을 위로받기 위해서.
* * *
아벨이 폰투스로 갈 생각을 한 것은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이곳에서 마멸단魔滅團을 창설하게 되지.’
1차 마족 침공 때에 아벨은 마족들과 마물들에게 시달리는 폰투스에서 주로 활동하게 됐었는데, 그래서 이곳에서 바로 마멸단을 창설했던 것이었다.
푸른 물결 속에서 나오는 아벨과 일행에게 당당하고 희끗희끗한, 잘 정돈된 수염을 가진 노년의 기사가 예를 갖추며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저하.”
폰투스를 맡고 있던 신성제국군 대장 중 한 명인 조니 다닐레비우스 자작이었다.
하루 전에 통신 마법으로 연락을 취해놨었기에 아벨과 일행이 올 거라는 걸 조니 자작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벨과 일행이 왜 오는지도.
“반갑습니다. 조니 자작.”
“네. 저하. 일단 마차에 오르시지요.”
“그것보다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모아주시겠습니까? 세계의 끝과 마주한 서쪽 성문으로 말입니다.”
“지금 말씀이십니까?”
“네. 지금 당장 제가 할 말이 있어서 말입니다.”
의아해했지만 황자의 명이니 그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잭. 가서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서문으로 모이게 하라.”
“네! 각하!”
명을 받은 수하는 곧장 말을 타고 달려나간다.
조니 자작은 명을 내리면서도 아벨을 살펴보았는데, 용골검을 허리에 차고 용혈갑을 입은 아벨의 모습이 자신이 상상한 것 이상으로 출중하게 보여 감탄하고 있었다.
확실히 보통의 청년과 내뿜는 그 기세나 기도가 달랐다.
‘직접 보니 더 대단한 거 같군.’
그는 순수하게 아벨을 인정하고 있었다.
11성 초반의 검사였던 자신도 아벨의 나이 때에 불세출의 천재라고 불렸었지만, 정의의 신의 화신이라 불리는 아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었다.
아벨은 16살에 최연소 정의 무투회 우승자가 되면서 제국의 모든 검사에게 경외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가문에서 그토록 소중하게 다루던, 그 어떤 남자도 사랑에 빠지게 만들 것만 같았던 종손녀 아르시아가 왜 저 남자를 일방적으로 짝사랑하는지도 이제는 이해가 갔다.
‘확실히 달라. 정말 정의의 신의 화신 같군.’
아벨이 정의의 신의 화신이라는 소문은 아직도 여전했었다. 죽기 직전이었다고 했는데 멀쩡히 살아 돌아왔으니 더욱 그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