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101화. 기다려라(1)
“네?”
아벨은 고된 수련 때문에 자신이 헛것을 들었나 했었다.
반면 에디린은 그런 멍청한 얼굴로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아벨이 매우 띠껍다는 듯이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앙증맞게 허리에 두 손을 얹는다.
“왜? 불만이야?”
헛것을 들은 게 아님을 깨닫자 굉장히 난감하기 그지없다.
“아니…… 그런 건 아니긴 한데…….”
“그럼?”
“그래도…… 남녀가 한곳에 같이 살면 오해를…….”
하―!
너무 어이가 없어 기를 차는 에디린이다.
“이미 며칠 같이 살았잖아? 그리고 우리 사이에 뭐 어때서? 너 나를 설마 여자라고 생각하는 거야? 어?”
‘미치겠네…….’
에디린이 아르시아와 비슷한 성격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를 알면 알수록 그러한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작가 새끼가 급히 수정한 거 아냐?’
이제는 외모 역시 에디린과 아르시아가 달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니 타당한 의심이라 하겠다.
관자놀이를 지끈 누르면서.
“하아…… 일단 그건 그렇고, 그런데 왜 이곳에 계속 머무르시겠다는 것입니까?”
“나랑 닮았다는 그 아이도 보고 싶기도 하고 네가 내 신뇌전마검을 어떻게 활용하나 보고 싶기도 하고.”
그것보다 너랑 같이 있으면 재밌을 것 같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 말을 하면 뭔가 지는 기분이 들었기에.
“……좋습니다. 대신 한 가지만 지켜주시지요.”
솔직히 에디린이나 러네이나 귀찮은 건 거기서 거기였다.
그리고 둘 다 드래곤이라고 자꾸 자기최면을 거니 좀 뭐랄까 마인드 컨트롤을 할 수 있었고.
아무튼.
“말해봐.”
“잘 아시다시피 제가 큰일을 준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 그때까지만 존재를 좀 숨겨주시지요. 그 누구도 에디린 님을 눈치채지 못하게.”
“음― 귀찮은데.”
세게 나가기로 한다.
“그럼 제가 여길 나가겠습니다.”
그러자 장미같이 새빨간 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언제까지?”
“제가 하베츠를 죽일 때까지만. 딱 그때까지만.”
물론 그녀가 직접 죽여준다면 더 좋겠지만, 하지만 결코 자존심상 자신이 죽여주겠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좋아. 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
아니 얹혀사는 주제에 무슨 조건이 있다는 말인가.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상 어쩔 수 없었다.
“우리 단둘이 있을 때는 지금처럼 있는 걸로.”
그 정도야.
“좋습니다. 그리고 저도 하나 더 간청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우리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로 맹세의 마법을 하는 것입니다.”
“뭐?”
이제는 미간을 찌푸리는 것과 입술을 깨무는 걸 넘어 그 아름다운 눈마저 일그러트린다.
맹세의 마법은 어찌 됐든 자신의 행동에 제약을 가하는 마법이기 때문에 말이다.
“해만 끼치지 않기로 말입니다. 제가 에디린 님을 절대 공격하지 못하게 말입니다.”
“나도 널 공격 못 하고 말이지?”
절대 아니라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아닙니다. 그저 전 에디린 님과 영원히 한 편이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 말에 자기도 모르게 일그러트린 얼굴을 펴고 히죽― 입꼬리를 올린다.
아벨의 말이 썩 마음에 들었던 것이었다.
잠시 고민하는 척하더니.
“음― 그럴까?”
대답 대신 아공간 주머니에서 맹세의 마법 양피지를 꺼낸다. 그리고 에디린에게 건넨다.
“다른 맹세는 필요 없습니다. 그냥 서로 해를 끼치지 않기로만 쓰면 될 것 같습니다.”
“하나 더. 서로에게서 합의 없이 도망치지 않기까지.”
이 골드 드래곤은 러네이보다 훨씬 더한 드래곤이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닫는다.
“…….”
마지못해 대답한다.
“……네. 그러하지요.”
“좋아. 시작해.”
그래서 아벨은 검지를 찢고 그 피로 맹세의 글을 양피지에 적는데, 에디린도 피를 뽑아내어 그걸 양피지에 적었다.
같은 맹세가 적히자 기분 나쁜 빛에 두 사람이 뒤덮인다.
수아아아아아―
마법을 마치자 에디린은 우쭐해 하며 말한다.
“넌 정말 영광으로 알아야 해. 넌 내가 맹세의 마법을 한 최초의 존재니까.”
“……최초입니까?”
“그래. 드래곤하고도 한 적 없다고. 내가 살면서 맹세의 마법을 하게 될 줄은 몰랐네.”
그녀가 마족 멸살을 도와줄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히 에디린이 같은 편이 되면 정말 든든했었다.
‘비트칸도 할 수 있다면 해야 해.’
비트칸도 만약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똑같이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맹세의 마법을 권할 생각을 했다.
‘뭐든 안전하게 가자고. 그나저나 정말 운이 좋군. 이렇게 엄청난 경호원을 갖게 되다니.’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솔직히 러네이가 있긴 했지만 러네이보다 몇 배는 더 센 드래곤이 함께 하게 됐으니 확실히 득이면 득이었지 실은 아니었다.
‘능력도 사기인데 이렇게 운마저 따라준다면.’
이젠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거침없이 일을 진행해도 되겠어.’
러네이로는 조금 부족하다고 느꼈었지만 에디린은 아니었다.
천혜안으로 본 그녀의 정보는 본인 입으로 말했듯이 2년만 더 지나면 에이션트 드래곤의 반열에 들어갈 정도였었다. 그 정도로 엄청난 무력과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럼 오늘 이 시간부로 영원히 한 편이 된 에디린 님께 제 비밀 한 가지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비밀이라는 말에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낸다.
“뭔데? 말해보렴.”
“전 사실 정의의 신의 환생이 아닙니다.”
“알고 있어. 너는 절대 그딴 쓰레기 신의 화신체 따위가 아니야.”
“맞습니다. 저는 정의의 신의 화신체 따위가 아닙니다.”
“그래. 그러니 어서 말해보렴. 뜸 들이지 말고.”
“용사입니다.”
“……?!”
“저는 주신 아그네스께 선택받은 용사입니다. 에디린 님.”
조금 놀란 듯은 보이나 생각보다 그렇게까지 크게 놀란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용사와 이미 한 번 함께 해본 경험이 있어서 그런 듯했다.
“벌써 임명식을 치른 거야?”
에디린은 아벨이 거짓말을 한다는 일말의 의심조차 없는 듯했다.
너무 순순히 믿어 오히려 아벨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아닙니다. 하지만 주신 아그네스께 신탁으로 직접 들었습니다.”
“그래? 그거 신기한데? 원래는 성녀가 용사를 찾아 임명식을 거행하고 정식 용사가 됐을 때 그때 사명을 듣고 활동하는 거잖아?”
“맞습니다.”
“뭐 주신 아그네스가 다 생각이 있겠지. 아무튼 네가 용사라면 사명이 주어질 것인데, 이번 사명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어?”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제 사명은 바로 마족 멸살입니다.”
“뭐?”
“느끼셨겠지만 저는 역대 용사들보다 훨씬 큰 재능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덕분에 사명 역시 역대급으로 어렵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벨이 용사라고 했을 때보다 훨씬 더 놀란 얼굴이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인간 혼자서 그 많은 마족들을 멸살시킨다고…… 그렇다면 마왕도 네가 죽여야 하는 거야……?”
마왕은 신의 바로 아래 존재였었다.
그러니 에이션트 드래곤과도 비긴다고 할 수 있었다.
“맞습니다. 그래서 전 벌써부터 저와 함께 해줄 만한 동료들을 지켜보며 찾고 있었습니다. 저 혼자선 절대 마족 멸살의 사명을 완수할 수 없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나와 같은 편이 되고 싶었던 거야?”
고개를 젓는다.
“감히 제가 어떻게 에디린 님께 그런 성가신 부탁을 드리겠습니까? 그저 전 에디린 님과 항상 같은 편이 되고 싶었을 뿐.”
그 말이 이번에도 통했는지 그렇게 싫지 않은 표정이다.
“너의 뻔한 속이 보이네.”
“설마요.”
“설마는 무슨. 아무튼 알겠어. 나도 도와줄 수 있음 도와줄게. 그건 그렇고 주신 아그네스는 갑자기 뭔 일이래? 이때까지 그냥 내버려 둬놓고서는.”
“그러게 말입니다. 갑자기 무슨 변덕이 있어서는.”
아벨의 팔을 툭툭 친다.
“넌 정말 운이 좋아. 나 같은 완벽한 드래곤을 만났으니 말이야. 얼굴이면 얼굴, 몸매면 몸매, 성격이면 성격, 능력이면 능력, 게다가 어엄처엉∼ 강하기까지 한 현세에 가장 완벽한 드래곤을 말야. 안 그래?”
그러면서 우쭐해 하며 고개를 쳐들었는데.
그녀의 성격이 변했다고 확신하던 아벨이다.
* * *
에디린은 약속대로 아벨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깔끔하게 지워주었었다. 러네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말이다.
그래서 현재 에디린이 숨어 있는 가운데 러네이와 케이, 사나가 함께 아벨의 기숙사에서 작전 회의를 하고 있었다.
로디아와 카시드, 두 사람은 약혼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는 핑계로 부르지 않았었다. 그래서 로디아가 특히 좀 서운해했었는데, 오히려 그러한 마음을 갖게 해 훗날 맹세의 마법을 할 때 쓰면 좋을 것 같다.
러네이는 아벨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더니.
“그러니까 조만간 제 가문을 공격할 것이란 말이죠? 저하와 저를 떼어 놓기 위해서?”
“그래. 이제 곧일 것이다.”
“이것들이 진짜 전부 뒤지려고!”
정말 화가 나 보였다.
어찌 됐든 지금의 가족은 바로 다름 아닌 코널리 남작가였으니 말이다.
“러네이. 그래서 너에게 할 말이 있다.”
“……?”
“난 괜찮으니, 적들이 원하는 대로 코널리 남작가로 내려가 그들을 모두 쓸어버리거라.”
“저하!”
케이와 사나가 동시에 아벨을 불렀는데, 두 사람은 러네이가 없다면 저번 광장 무도회 때처럼 아벨에게 큰일이 날 거라 생각한 것이었다.
“걱정 말아라. 이번엔 나도 제대로 준비해 뒀으니. 러네이가 없다고 해서 절대 전과 같이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말했음에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사나는 조심스럽게 아벨에게 다시 한 번 확실히 확인하고 싶어 되묻는다.
“……정말이죠……?”
사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러네이를 바라보며 말한다.
“오히려 러네이. 네가 떠나야 그들도 방심할 수 있다.”
러네이는 그런 아벨을 더없이 진중한 얼굴로 묻는다.
“그럼 이번엔 저하의 모든 힘을 다 쓰실 생각이신가요?”
“그래. 파니츠를 빼고는 모든 힘을 쓸 생각이다. 순간이동도 말이다.”
이번엔 케이가 깜짝 놀라 소리친다.
“순간이동이요?!”
사나가 설명해준다.
“응. 저하께선 드래곤들의 마법인 순간이동과 10 서클 마법인 지옥불꽃을 쓰실 수 있어.”
하지만 자신이 새겨준 ‘절대 방어’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건 둘만의 추억으로 남기고 싶었기에.
“그리고 저하께선 10성 검사셔. 우리 생각보다 훨씬 강하시긴 해.”
“그런데 왜 그땐 전력을 다하시지 않으셨어요?”
푸르손과의 전투를 말하는 듯했다.
다들 그때 아벨이 종잇장처럼 날아가는 것에 대단히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러네이 탓이 크다. 러네이가 정의 무투회에서 알게 모르게 날 봐줬기에, 사실 푸르손에게 그렇게 처참하게 당할 줄은 생각도 못 한 것이었지.”
아벨의 말에 입술을 삐죽 내민다.
“그게 왜 제 잘못이에요?”
“그냥 그렇다는 거지.”
“헐― 어이없어.”
“아무튼 그때 내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 건, 그 정도면 버틸 수 있을 거라 착각한 것과 하베츠를 죽이기 전까진 전력을 숨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내 걱정 말아라. 아까 말했듯이 네가 떠나는 게 날 돕는다는 걸 생각하고.”
아벨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상 떠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 이왕 떠나는 거 아벨에게 자신감을 주기로 한다.
“뭐 정 그렇다면 알겠어요. 전 저하를 믿으니까요. 분명 계획하신 대로 잘하실 거예요.”
그 말에 아벨이 러네이를 보고 미소를 짓자, 이에 질세라 케이와 사나도 아벨을 바라보며 말한다.
“저도요. 저도 믿어요.”
“저도요. 진짜로요.”
그 사랑스런 모습들에 함박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다.
“하핫― 그래그래. 다들 날 믿어라. 오래 준비한 계획이니까 말이다. 좋은 소식이 있을 거다.”
그러면서 하베츠의 기숙사 쪽을 바라보는데 입은 웃고 있지만 눈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살기로 이글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