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88화. 결승전(1)
지루한 경기였지만 마지막의 난화혈풍검을 짓뭉갠 뇌전마검은 진짜였기에 관중들은 그나마 조금의 위안을 얻어갈 수 있었다.
“와 역시 진짜였어! 상대들이 뇌전마검 단 한 방을 못 이겨내네! 그것도 절정의 검사들이 말야!”
“그니까. 얼마나 세면 로만은 바로 뻗어버리고 리차드는 무릎을 꿇겠어?”
“흑풍흡검도 대단했었는데!”
“역시 대륙 최고의 재능! 그 누구도 쓰지 못했었던 검술들을 구사하시다니!”
“역시 제국이 최고야!”
“당연하지! 제국이 최고지!”
“그런데 설마 저하께서 용사는 아니시겠지?! 저 정도면 용사의 재능인데?!”
“야 이렇게 평화로운 시대에 용사가 웬 말이냐? 안 그래?”
“하긴 지금처럼 평화로운 시대도 없었지.”
“아무튼 제국이 그냥 최고라는 거. 그것만 알면 돼.”
제국민들은 아벨 덕분에 애국심이 최대치에 오른 상황이었다.
반면 아덴에서 온 사람들은 리차드의 어이없는 행동에 엄청난 수치를 느끼고 있었고 말이다.
그들은 나라 전체적으로 강자를 숭상하는 문화가 있었기에 지금과 같이 장난치듯이, 마치 패배를 두려워해 도망치다가 지는 것을 대단히 혐오했었다.
확실히 아직 리차드가 어리긴 어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한 나라에서 자랐음에도 여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런 경솔한 행동을 하고 말다니 말이다.
그리고 아벨도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었는데, 설마 이 정도 일로 리차드와 같은 특별한 재능을 그놈의 빌어먹을 자존심 때문에 제거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점이었다.
소설의 활자로는 이 엿 같은 고고한 자존심을 제대로 못 느낀 결과라 하겠다.
아덴의 국왕 마테오 우니베르스는 아덴의 그 유명한 검사들의 집단인 사검대死儉隊의 총대장이자, 동생인 이케르 대공을 불러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명했다.
“당장 내려가서 리차드의 팔 하나를 잘라 오거라.”
이케르 대공도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한다.
“네. 전하.”
대답과 동시에 바로 리차드를 향해 내려가던 이케르 대공이었다.
그 살벌한 분위기가 펼쳐지던 아덴과 제국의 좌석과는 달리 미스라임의 좌석은 겉으로 티를 못 내서 그렇지 마음만은 기쁨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특히 얀 국왕은 너무 기뻐 당장에라도 포효하고 싶을 정도였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나만큼은 좋다니까?!’
아벨을 시험하고자 에티 천 마리를 풀어놓은 건 이미 까마득히 잊은 것 같았다.
아무튼 자신은 그런 적 없다는 듯이 옆에서 자신처럼 상기된 얼굴로 앉아 있는 딸을 바라본다.
‘사나야! 네가 제대로 된 복덩이를 물어 왔구나!’
진심으로 지금의 아벨을 보니 얼마 안 가 12성 최절정 검사는 당연했을 뿐만 아니라 잘만 하면 마법도 최소 8 서클까지는 올릴 수 있을 듯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혼자서 중소 왕국만큼의 무력을 가질 수 있겠어!’
또한 혼자서도 웜급 드래곤과의 전투도 기대해볼 수 있었고 말이다.
‘훗― 멍청한 저 아덴 녀석들. 그깟 자존심에 자국의 신성의 팔을 자를 생각을 하다니. 네놈들은 우리에게 짓밟힐 준비나 해라.’
10인회 모임 때마다 그 재수 없음을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이참에 확실하게 짓밟아 주지. 그 오만함을 말이야.’
그 순간이 오래지 않아 올 것 같아 기대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사나는 얀 국왕과는 다른 이유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저 아벨이 이번 정의 무투회에서 다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었기에, 아직까지 다치지 않아서 기뻐했던 것이었다.
사나는 아벨이 쓴 벽력에 그을린 자국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정말 다행이야. 저하께서 일찍부터 뇌전마검을 쓰실 생각을 하셔서.’
아벨이 뇌전마검을 큰 맘 먹고 썼다고 사나는 생각한 것이었다.
‘흑풍흡검과 뇌전마검을 동시에 쓴다면, 어떤 이들 중에선 용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아벨은 자신이 용사인 걸 밝히고 싶어 하지 않아 했었다.
그래서 사나는 아벨이 뇌전마검을 저렇게 빨리 내보일 줄은 사실 생각지 못했었다.
‘뭐 저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아무튼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옆에 있던 케이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아벨이 다치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언니밖에 안 남았어!’
결승 상대인 러네이는 아벨에게 결코 살수를 쓰지 않을 것이었다.
자신이 정의 무투회에서 아벨을 지킬 거라면서, 아벨을 최연소 우승자로 손수 만들 거라면서 몇 주를 떠들어대지 않았던가?
그러니 그런 러네이라면 안심할 수 있다 생각하던 사나와 케이였다.
* * *
최종 결승전은 아벨의 시합 후 1시간 이후에나 펼쳐졌다.
아벨은 그동안 포션을 복용하고 좀 쉬면서 전략을 짜려고 했었는데, 러네이가 옆에서 자꾸 귀찮게 굴어서 전혀 쉬질 못했었다.
그리고 러네이가 함께 올라가자고 졸라 정신적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었다.
다행히 진행자인 율리안 자작뿐만 아니라 모든 안내인이 절대 안 된다고 불허해 간신히 따로 반대편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래도 참 뭐했던 게 갑옷이 진짜 커플 갑옷 같아서 민망해 죽을 것만 같다.
‘나라도 바꿔서 입고 나왔어야 했는데…….’
그렇게 했어야 했다고 후회가 물밑 듯이 밀려온다.
‘어쩔 수 없지.’
체념하며 중앙에 선다.
‘그것보다 러네이. 넌 어떻게 할 것이냐?’
휴식 때 러네이와 대화를 해보니 그녀는 전에 했던 말과는 달리 결코 질 생각이 없던 거 같았다.
뇌전마검보다, 흑풍흡검보다 자신의 백룡마검이 더 강하다는 걸 증명해 아벨이 탐을 내게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나 역시 너에게 이길 생각이었다만.’
아벨도 사람들에겐 러네이가 우승할 것이라고 말은 했지만, 그 역시 애초에 러네이에게 질 생각이 전혀 없었었다.
‘전략을 수정해야겠어.’
질 생각이 없었기에 러네이를 이길 전략을 짜왔었다.
문제는 그 전략이 러네이가 자신을 조금 봐줬을 때를 생각한 전략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벨은 그녀가 진지하게 7성 강함을 썼을 때의 전략으로 다시 세워야 했었다.
‘둘 다 마력은 거의 끊임이 없으니.’
아벨은 아그네스의 목걸이로 마력이 줄지 않았었고 러네이는 드래곤이라 거의 무한대의 마력을 가졌다 할 수 있었다.
‘이기려면 러네이가 딱 7성의 힘만 써야 해.’
그래서 대기실에 있을 때, 둘 다 순간이동瞬間移動과 허공답보虛空踏步를 이곳에선 절대 쓰면 안 된다고 못 박았을 뿐만 아니라 진짜 7성처럼 연기하면서 싸워야 한다고 단단히 말을 해놨었다.
몸의 속도라든지, 그에 따른 움직임이라든지, 체력이라든지, 판단력이라든지 등등 진짜 7성인 것처럼 보여야 한다고 하면서.
‘하나만 더 추가하자.’
좀 더 확실한 전략을 세우기 위해 러네이에게 그것 외에 하나를 더 제안한다.
“러네이. 아까 내가 말했던 7성의 힘만을 쓰는 것에 더해서, 비기를 10번씩만 쓰는 거로 하자. 그렇지 않으면 둘 다 마력이 끝이 없으니, 경기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 그리고 걱정 말아라. 만약 둘 다 비기를 10번 다 쓰고도 어느 누구 하나 쓰러지지 않았다면, 그땐 내가 진 거로 할 테니.”
아벨의 제안을 들은 러네이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받아들인다.
“좋아요. 그렇게 해요.”
어차피 결과는 같을 것이기에 러네이로선 아벨이 뭘 하든 별 상관없었다.
“좋다. 그럼 시작하지.”
우웅―
파지지직―!
아벨이 먼저 뇌기 깃든 오러를 두르자.
우웅―
러네이도 물빛 오러를 두른다.
아벨은 러네이의 물빛 오러를 보며 용골검의 마력흡수를 적극적으로 쓰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러네이는 아직 내가 뇌전마검의 3식을 쓸 수 있다는 걸 몰라.’
러네이와의 대련에서 흑풍흡검 3식은 자주 사용했었지만 뇌전마검은 아니었었다.
뇌전마검 2식까지만 쓸 줄 안다고 생각하는 그 점을 이용할 계획을 세웠다.
방심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이걸 잘 이용하면 분명 승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탓―
동시에 누가 할 거 없이 서로를 향해 빛살같이 튀어나갔다.
그리고는 둘 다 검을 들어 내리치려고 하는데, 아벨은 우위를 뺏기지 않기 위해 처음부터 뇌전마검의 2식 연속벽력을 준비한다.
우우우웅―!
파지지지직―!
용골검이 강렬한 뇌기로 휩싸여 두 눈을 자극한다.
그 희어진 용골검을 보고 러네이는 입가에 씨익― 기분 좋은 듯한 미소를 그린다.
“벌써부터 뇌전마검을. 급하셨군요. 저하.”
그러면서 본인도 백룡마검의 2식 용아龍牙를 준비한다.
용아는 아벨과의 대련에서 자주 썼었던 비기였지만 대중들 앞에선 처음 선보이는 것이었다.
뇌전마검雷電魔劍
제2식
연속벽력連續霹靂
아벨의 검이 내리치는 방향으로 두 줄기의 벼락이 떨어져 내린다.
백룡마검白龍魔劍
제2식
용아龍牙
그 두 벼락을 러네이는 마치 드래곤이 적을 물어 찢는 듯한 투명한 검격으로 상쇄시켜 버린다.
콰콰콰콰콰콰쾅―!
번쩍!
두 비기가 만들어낸 검격이 맞부딪치자 엄청난 굉음과 함께 순간 눈부신 광채가 두 사람을 중심으로 뿜어져 나온다.
뇌전마검의 강함도 놀라웠지만, 그 강함을 이겨내는 러네이의 검술에 대한 궁금증으로 관객들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니! 도대체 무슨 검술을 쓰길래?!”
“그니까?! 우승자들도 못 버틴 검술을 어떻게 저 여자가?!”
“괜히 저하의 여자가 아니었던가?!”
“와 진심 커플이 저렇게 세도 돼?!”
“최강 커플이네!”
“헐 진심 말도 안 돼!”
아벨도 솔직히 이 정도의 파괴력이라고는 생각 못 했었다.
대련 때는 5성 마력으로 검기를 이용해서만 싸웠었기에 7성일 때의 파괴력은 아벨도 처음이었던 것이었다.
‘역시 드래곤의 검술인가?’
소설에서 아벨의 마멸광검魔滅光劍에 전혀 상대가 안 됐기에 사실 과소평가하고 있었었다.
하지만 막상 같은 7성으로 맞부딪혀 보니 결코 뇌전마검에 크게 밀리지 않았었다.
‘검술의 문제가 아니야. 내가 문제지.’
사실 그 생각이 맞았었다.
아무리 7성으로 연기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아벨은 9성이었고 러네이는 12성이었으니 파괴력에서 차이가 나지 않을 수가 없던 것이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지.’
그때 아벨은 두 비기가 격돌하며 만들어낸 충격파에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밀려나면서도 디딤발에 힘을 넣을 수 있게 되자마자 다시 러네이를 향해 튀어나간다.
이번엔 비기보다는 준비 시간이 적은 단순 휘두르기로 공격한다.
휘익―
러네이도 그것에 맞춰서 단순하게 아벨을 향해 검을 휘두른다.
휘익―
콰콰콰쾅―!
단순 휘두르기임에도 마치 다른 검술의 비기인 것마냥 파괴력이 상당하다.
‘역시. 대단해.’
대련 때 느끼지 못했던 묵직함이었다.
그 묵직함이 검을 쥔 손아귀부터 손목, 팔, 어깨, 온몸으로 찌릿하게 전해져온다.
휘익―
물론 아벨은 그 묵직함 때문에 다음 공격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휘익― 휘익― 휘익― 휘익―
통증을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검을 휘두른다.
러네이도 결코 물러섬 없이 검을 휘두르는데.
쾅―! 쾅―! 쾅―! 쾅―! 쾅―!
조금이라도 맘을 놓거나 방심했다가는 단번에 몸의 일부분이 잘려나갈 그런 공방이 이어진다.
그 살 떨리는 공방을 지켜보는 사나와 케이는 자신들이 얼마나 러네이에 대해 오판했었는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이제 보니 이번 정의 무투회에서 유일하게 아벨에게 해를 가할 능력이 있었던 사람이 다름 아닌 러네이였던 것이었다.
아벨보다 강한 사람이 러네이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설마…… 언니가 저하를 해하려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애써 그런 생각을 외면하려 한다.
하지만 둘 다 아니라고 확답은 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아무리 봐도 둘의 그 무시무시한 공방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아벨이니 가까스로 막아내던 것이었지 다른 참가자였으면 벌써 팔 하나 잘리고 경기가 끝났을 것이다.
쾅―! 쾅―! 쾅―! 쾅―! 쾅―!
그런 공방을 10분쯤 이어가다 아벨이 용혈갑의 내구성을 믿고 조금 무리해가며 몸통박치기를 시도한다.
“호오!”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러네이는 뒤로 뛰어 피하며 착지하자마자 다시 용아를 쓴다.
아벨은 그 용아를 아까와 같은 뇌전마검의 연속벽력보다는 흑풍흡검의 몰아치는 선풍으로 막으려 한다.
구오오오오―!
연속 벽력이 아닌 몰아치는 선풍을 쓴 이유는 직선적인 벽력에 비해 조금 위력은 약할지라도 전방위로 압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러네이가 몰아치는 선풍을 피해 위로 뛰어오르길 바란 것도 있었다.
“……?!”
하지만 러네이는 아벨의 그러한 생각을 한껏 비웃으며, 그딴 거 필요 없다는 듯이 용아로 정면을 뚫으려 한다.
콰콰콰콰―!
좌우에서 선풍들이 러네이를 덮치는 것보다 용아로 정면을 뚫고 나오는 게 더 빨랐다.
“……!”
그 저돌성에 순수하게 감탄을 하면서.
‘그렇다면!’
아벨은 러네이의 용아가 선풍들을 뚫고 나오는 덕에 힘이 많이 약해져 있다 판단했다. 그래서 그 약해진 용아의 검격에 용골검의 마력흡수를 쓰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