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87화. 그들의 방문(2)
어린아이가 늙은이와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허허― 이 녀석 참 눈치도 빠르고 좋군. 안 그런가?”
“네. 맞습니다. 비트칸 님.”
그러면서 두 드래곤은 자연스럽게 아벨의 곁에 있던 의자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리고 우리가 지금 널 찾아온 이유는, 모든 경기가 끝나면 네가 너무 바빠서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아벨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잘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제가 우승할 거라 많이 바쁠 것 같았습니다.”
다시 한 번 기분 좋은 늙은이 웃음소리를 낸다.
“허헛―! 네가 우승할 거 같다고?! 러네이라는 아이도 만만치 않던데 말이다!”
“러네이는 제게 푹 빠져 있어서 말입니다. 비트칸 님께서 만들어주신 용혈갑과 용골검으로 어떻게 한번 잘 이겨보겠습니다.”
그 말에 대단히 만족해한다.
“요고 정말 난 놈이구나. 아서 만큼이나 마음에 들어.”
“별말씀을. 그런데 정말 어쩐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네놈에게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서 그렇다.”
“말씀하시지요.”
“도대체 어떻게 흑풍흡검과 뇌전마검을 쓸 수 있던 것이더냐? 아니, 마력흡수 또한 그렇고, 마력흡수 같은 경우는 검의 특수한 마력 경로를 알지 못한 이상 절대 쓸 수 없는 것이거늘.”
대단히 궁금해하는 그 아이에게 아벨은 웃음기가 가신 최대한 진지한 모습으로 대답하기 시작한다. 혹여나 농담처럼 들리게 해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이 대륙의 신들께 많은 축복을 받아 태어났습니다. 확실히 제가 봐도 전 다른 이들에 비해 훨씬 그 재능이 크니 말입니다. 그 덕에 제가 검술 외에 마법에도 재능이 있는데, 그래서 뇌전마검과 흑풍흡검의 검술서를 보고는 바로 이해하고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 네가 마법에도 재능이 있다더냐?!”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마력흡수 같은 경우는 검이 저에게 마치 길을 안내하듯 알려주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솔직히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군요.”
정말 지금 아벨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었다.
그래서 그냥 있는 그대로 말했었다.
“음― 그렇군. 네 말에 거짓이 없는 것 같긴 하구나.”
진실을 말했기에 아벨에게서 어떠한 거짓도 읽지 못했었다.
그때였다.
우와와와와와와와와와―!
대기실 밖에서 함성이 터져 나온 것이었다.
“끝났나 보군.”
“네. 끝난 것 같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한다.
“좋다. 내 조만간 너를 찾아갈 테니, 그때 좀 더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눠 보자꾸나.”
비트칸은 가능하다면 꼭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 존재였다.
“저는 루드스에서 생활 중입니다.”
“그래. 알았다. 그럼 그때 보자꾸나.”
“네. 비트칸 님.”
그렇게 두 사람은 왔을 때처럼 홀연히 떠나갔다.
‘비트칸이 찾아올 줄이야…….’
소설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기에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비트칸은 신들을 혐오하는 드래곤이니 이용할 수 있다면 반드시 이용해야 해. 그래야 마족 멸살의 사명도 최대한 빨리 끝낼 수 있어.’
반드시 이용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나가보니 문 바로 옆에서 안내인은 주저앉아 자고 있었다. 아마도 드래곤들이 마법으로 재운 듯했다.
그를 살짝 흔들어 깨운다.
“일어나라.”
“으음…….”
그래도 일어나지 않자, 이번엔 조금 세게 흔들어 깨운다.
“으으응…… 으응앗! 악! 억!”
이상한 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나더니, 엎드려 머리를 땅에 박는다.
쿵―! 쿵―! 쿵―!
그러면서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주, 주, 죽을죄를 져, 졌습니다! 어, 어, 어젯밤 아내가 하도 그, 그걸 워, 원해서!”
“……?”
“조, 조금만 하려고 했었는데! 아내가 요, 요, 요즘 너무 참았다고 자, 자꾸 더 하자고 그래서!”
도대체 뭘 원했고 뭘 했다는 건지.
아무튼.
“됐고. 알았으니 일어나라. 우리 차례니까 말이다.”
이번에도 벌떡! 일어나서는 통로가 다 울리도록 우렁차게 소리친다.
“알겠습니다! 당장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씩씩하게 앞장서는 안내원이었다.
아벨은 조금 이상한 그를 따라가며, 아벨은 아벨대로 재밌는 상상을 한다.
‘용골검과 용혈갑, 그리고 흑풍흡검 때문에 비트칸이 나타났으니, 오늘의 뇌전마검 때문에 에디린이 나타날 수도 있겠어.’
에디린 역시 소설에선 등장하지 않은 드래곤이었다. 그 드래곤도 자신의 연인이었던 카인의 뇌전마검을 쓰는 아벨에게 호감을 느낄 가능성이 컸었다.
‘점점 재밌어지는군.’
사소한 불안감은 어쩔 수 없지만 즐길 수 있는 건 최대한 즐기기로 한다.
그리고 이번 정의 무투회를 통해 덫을 놓았으니 하베츠 그 개새끼가 걸려만 든다면.
‘세계관 가장 큰 적을 죽이는 것이니.’
하베츠를 죽이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큰 수확일 것이다.
물론 앞으로 이번 정의 무투회 참석 덕분에 안 받아도 될 경계를 받아 조금 빡세지긴 하겠지만, 하베츠가 이후 만들 위험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었다.
‘그러니 무조건 하베츠를 죽여야 해.’
정 안되면 윌리엄을 이용하면 됐다.
‘윌리엄에게 받을 것이 하나 있으니, 정 안 되면 그걸 이번에 사용하자.’
예전 마족 단탈리안이 나타났을 때 그 멍청한 놈이 케이 때문에 한 맹세의 마법 덕분에 아주 중요한 때에 큰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통로의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겁고 새하얀 햇살에 두 눈을 찡그린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벨이 뇌전마검을 처음으로 선보인 이후 관객들은 아벨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황실에서 심어둔 자들이 아벨과 러네이를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욕해도, 그들이 깜짝 놀랄만한 무위로 계속 이기고 올라가자 그게 잘 먹히지 않게 된 것이었다.
“역시 제국이 최고다!”
“황자 저하만 이기시면 제국끼리 결승전이다!”
“아벨 저하 파이팅!”
“대륙 최고의 재능!”
“정의의 신께 축복받은 자!”
“리차드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된다!”
“그래! 어디 아덴 따위가! 감히 제국에!”
“맞아! 아벨 저하가 훠얼씬 잘 생겼어!”
“사랑해요! 아벨 저하! 저를 가져줘요!”
“그래! 카사노바면 좀 어떠냐! 충분히 자격 있다!”
이제는 카사노바도 괜찮다고 한다.
풋―!
그 말에 실소를 금치 못한다.
반면 반대편에서 나오는 리차드는 이곳이 원정이라는 걸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제국의 황자 아벨과 붙게 되니 전에 자신을 응원하던 제국의 소녀들도 몽땅 다 이제는 아벨을 응원하던 것이었다.
“제길……!”
이런 상황에서 로만처럼 꼴사납게 져버리면 더욱 자신의 인기에 타격을 입을 것이다.
‘절대 그럴 순 없어!’
절대 그럴 순 없었다.
거기까지 무너질 수는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아벨 역시 리차드만큼은 잃을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로만은 이미 끝났어. 그 녀석은 나에 대한 증오로 살아갈 거야.’
로만은 소설과는 달리 7인의 성검사에 포함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괜찮아. 그 자리는 죠슈아가 차지하면 되니까.’
자신이 만들 『에브니아 전기』에서 죠슈아는 절대 죽지 않을 것이었기에 그를 로만을 대신하여 7인의 성검사 중 하나로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로만은 오만방자하게도 감히 자신의 팔을 자르겠다며 그걸 타협안으로 삼으려고 했었다.
‘앞으로도 그 생각이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래서 로만은 아깝지만 포기하기로 했다.
‘하지만 리차드는 잃을 수 없어. 12성 검사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의 목적이 아무리 불순하다고 하더라도 그가 줄여줄 마족 수를 생각하면, 그는 역시 필요한 자라 하겠다.
‘그래. 남자가 여자 좀 밝히면 어때.’
그러니 그는 특별히 용서하기로 한다.
두 사람은 무투회장 중앙에 서서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서로를 바라보았는데, 둘 다 이제는 진심으로 할 생각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그렇게까지 살기殺氣와 투기鬪氣를 발하고 있지 않았었다.
그렇다 보니 아벨도, 리차드도 단번에 상대의 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하하― 역시 리차드답군!’
‘다행이야! 아벨 황자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어!’
확실히 둘 다 이전 시합과는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둘 다 각자의 검에 적당한 오러를 두른다.
우웅―
우웅―
파지지직―!
오러를 두르자마자 아벨이 땅을 박차고 리차드를 향해 쇄도했다.
탓―
그리고는 가볍게 종으로 검을 휘두른다.
휘익―
리차드도 가볍게 들어 막는다.
콰쾅―!
서로의 의도를 알게 된 두 검사는 마치 친구끼리 가벼운 대련을 하듯 검을 주고받는다.
쾅―! 쾅―! 쾅―! 쾅―! 쾅―!
“……?!”
그 광경을 본 셀비 3 황비는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머리가 폭발할 지경이었다.
비밀무기로서 그토록 믿었던 리차드가 지금 아벨과 소꿉장난치듯 어린애 칼싸움 따위나 하려고 하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려 터져버릴 것만 같다.
로만이 아벨에게 단 두 수만에 뻗었을 때 얼마나 다이나 황후를 속으로 조롱하고 비웃었던가.
하지만 지금은 다이나 황후부터 시작해 모든 황실의 인원들이 자신을 바라보며 조롱의 눈빛과 비웃음을 날리고 있다.
부들부들―!
오늘 하루는 분노로 몸이 멈추는 때가 없는 듯하다.
‘……리차드…… 네가 날 이리도 우습게 보다니…….’
그래서 만약 이번에 최소한으로 아벨의 팔도 빼앗지 못한다면 리차드의 팔을 없애겠다고 신들에게 맹세한다.
그리고 그 맹세를 지켜야 할 가능성이 점점 커져갔다.
벌써 30분이 지났음에도 두 사람은 단 한 번의 비기의 사용 없이 단순 휘두르기로 서로 장난만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밌구나…….’
다이나 황후가 철혈황후라는 이명답게 피가 쇠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차갑고 냉철한 여자라면 셀비 3 황비는 다혈질이었고 성격이 굉장히 불같아서 한 번 그 진노의 불을 받으면 결코 피할 수 없었다.
리차드는 그리 똑똑한 자는 아니었기에 셀비 황비의 그러한 성향을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부디 너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꼭 저 팔을 잘라오기를…….’
부디 리차드 본인을 위해서라도 꼭 그러하길 바라던 셀비 황비였다.
* * *
황실의 인원들만 두 사람의 시합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뭐지? 저 두 사람 왜 저래?”
“그러게? 왜 장난치는 것만 같지?”
“그러니까. 아직 비기 한 번 안 썼다니까?”
“아니! 전설의 검술들은 왜 안 쓰는 거야?! 로만 때처럼 뇌전마검 한 방이면 쓰러트리겠구만!”
그렇게 가벼운 공방으로 1시간이 넘어가자 관객들의 분노도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우우우우우우우우우―!
“그딴 식으로 할 거면 당장 때려치워라!”
“저딴 거 보려고 1,000골드를 내고 온 거 아니다!”
“때려쳐! 때려치라고!”
“우우우우우우우우―!”
“이 검사들의 수치!”
“정의의 신이시여! 신성한 시합을 더럽힌 저들에게 저주를!”
솔직히 드래곤들도 지금의 상황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러는 거지? 갑자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허허― 원래 알던 사이였던가?》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이거 참 러네이안과의 대결도 이렇게 흘러갈 것 같던데. 그럼 정말 지루하겠어.》
비트칸이 봤을 때 러네이와 아벨과의 시합도 그렇게 극적일 것 같진 않았었다.
러네이가 아벨을 우승자로 만들기 위해 적당히 봐줄 것이라 봤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아벨의 용골검이 새하얗게 뇌기로 물들었고 리차드의 검도 핏빛으로 붉게 물든다.
이제야 서로의 비기를 쓰려던 것이었다.
뇌전마검雷電魔劍
제2식
연속벽력連續霹靂
난화혈풍검亂花血風劍
제1식
혈화血華
리차드는 굳이 1식을 써서, 보다 확실하게 이번 기회에 지려고 했다.
그 누구보다 관중들의 반응을 신경 썼던 그였기에 더는 이 시합을 이어갈 수 없다 판단한 것이었다.
파지지직―!
콰쾅―!
마른하늘에서 두 줄기 벼락이 떨어져 리차드의 의도대로 피로 만든 꽃을 힘으로 짓뭉개버린다.
“크아아악―!”
그 두 줄기의 벼락을 리차드는 어떻게든 버티어 무릎을 꿇는 것으로 끝냈었는데, 그의 의도를 잘 알고 있던 아벨은 바로 그의 목에 검을 들이대며 이 지루한 시합을 끝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