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60화. 우연한 만남(1)
아벨의 그 초롱초롱한 모습을 본 쥬디스가 농담 식으로 말한다.
“수업 때도 좀 그러시지.”
“하하― 사실 다 아는 내용이라 말입니다.”
“그런데 시험은 왜?”
“일부러 안 썼습니다. 주목받기 싫어서.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니 이해해주시기를.”
수업을 대놓고 대충 듣겠다는 그 말이 쥬디스는 대단히 못마땅했지만, 어쩌겠는가? 아벨이 그렇게 하겠다는데.
“음― 참고하겠습니다.”
그래서 얼굴을 찡그리던 그때였다.
번쩍―!
콰콰콰쾅―!
반대편에서 엄청난 섬광과 굉음이 터져 나온 것이었다. 결국 카시드와 러네이가 맞붙은 것 같았다.
유게네스를 지키던 기사들이 중재를 하겠지만, 불같은 아덴의 왕자와 성난 드래곤을 잠재우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12성 검사 드래곤이라.’
유희를 즐기기 위해 실력을 감춰서 그렇지 젊어 보이는 외모에 속아 우습게 본다면 큰코다칠 것이다.
콰콰콰콰콰콰―!
구오오오오오―
천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엄청난 아우라가 광장을 뒤덮는 걸 본 쥬디스는 호기심이 동한 듯했다. 두 검사의 싸움이 매우 궁금하다는 얼굴이다.
“우리 잠시 구경하다 가는 건 어떻습니까? 멀리서 두고만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싸움 구경이 제일 재밌다더니.’
피식― 한쪽 입꼬리를 올린다.
“좋습니다. 잠깐 보다 가시죠.”
군중들은 혹시나 둘의 싸움에 휘말려 들까 봐 벌써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수월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쾅―! 쾅―! 쾅―! 콰콰쾅―!
초반에는 둘 다 탐색전인 듯했다.
‘러네이가 얼마나 봐주려나.’
러네이는 긴 은발 생머리를 우아하게 휘날리며 검을 휘둘렀는데, 카시드의 패도적인 검을 여유롭게 피해내며 허점을 노렸었다.
‘역시 대단해.’
쥬디스도 같은 생각인듯했다.
“저 여검사가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군요. 카시드. 저 녀석도 결코 약한 게 아닌데 말입니다.”
고갤 끄덕이며 동의한다.
“역시 세상은 넓은가 봅니다.”
그러면서 소설에서의 러네이의 성격을 떠올렸다.
뭔가 열혈 기사 같은 느낌이었다. 불의를 보면 결코 참지 못하는, 여자와 약자에게 막 대하는 남자를 본다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혼을 내주려 했었던.
‘아마도 카시드가 케이에게 막 대하는 걸 보고 참지 못해 싸움이 붙었겠지.’
분명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콰콰콰쾅―!
“제기랄! 이 빌어먹을 년이!”
그때 카시드가 좀처럼 자신의 검이 통하지 않자, 도저히 참지 못하고 사자신검을 쓰려 했는데, 러네이도 자신의 성명절기인 백룡마검白龍魔劍을 쓰려고 했다.
두 검사의 검에 마력이 집중되어 각각 푸른빛과 반투명한 물빛 오러가 활활 타오르는 걸 볼 수 있었다.
러네이의 반투명한 물빛 오러를 바라보며 그녀의 성명절기인 백룡마검을 떠올린다.
‘투명한 검격을 날리던 검술이었지.’
백룡마검은 역시 드래곤이 만든 검술이라 그런지 마법적 요소가 가미된, 소름 돋게도 날리던 검격이 투명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진정 마검魔劍이라 할 수 있는 검술이었다.
“크아아압―!”
그때 준비를 마친 카시드가 러네이를 향해 쇄도하며 사자신검의 비기를 펼쳤다.
사자신검死者神劍
제1식
죽은 자들의 원망怨望
러네이는 그런 카시드를 가소롭다는 듯이 바라보다, 카시드의 검격이 코앞까지 당도하고 나서야 그것에 대항하여 백룡마검의 비기를 펼친다.
백룡마검白龍魔劍
제1식
용섬龍殲
스산하면서도 은밀한 검술과 대놓고 보이지 않는 검술의 한판 대결이었다.
콰콰콰콰콰―!
“뭐지?!”
“아, 안 보이는데?”
“그런데 저게 말이 돼……?”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지? 그렇지?”
군중들은 러네이의 투명한 검격에 깜짝 놀라며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었다.
“……?!”
카시드도 군중들과 다르지 않게 그 투명한 검격에 매우 놀란 듯했다.
당황해하며 소리친다.
“뭐야?! 이년이 무슨 사기를 친 거야?!”
러네이는 그런 카시드를 한껏 비웃는다.
“뭐래 병신이. 닥치고 덤비기나 하셔.”
“이이 미친년이! 진짜 죽으려고! 흐아아압―!”
다시 한 번 사자신검과 백룡마검이 펼쳐졌고 격돌한다.
콰콰콰콰콰콰콰콰―!
신기한 점은 두 번의 격돌에도 두 사람 다 전혀 피해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제기랄!”
러네이가 공격용이 아닌 방어용으로만 비기를 썼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역시 러네이가 카시드를 봐주고 있었다.
‘봐주는군.’
그녀도 알았던 것이었다.
이 건방진 아덴의 왕자를 여기서 죽인다면 자신의 이번 유희는 오늘부로 끝이라는 것을.
‘적당히 하다 멈추겠어.’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 못 해 싸우긴 했겠지만, 적당히 타협점을 찾아 멈추려 할 것이었다.
‘그 정도도 충분할 테니.’
결과적으로 봤을 때 그것만으로도 저 오만한 콧대를 짓뭉개는 것이니 말이다.
그때 쥬디스가 우려 섞인 말을 했다.
“흠― 저 녀석이 무리하는군요.”
카시드가 사자신검을 썼음에도 러네이에게 타격을 입히지 못하자 조금씩 무리를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제는 카시드가 헛친 그 검격이 군중들에게까지 미치고 있었다.
콰콰콰콰콰―!
다행히 신속히 아덴의 검사들과 유게네스를 지키던 메나튼의 검사들이 군중들 앞으로 이동해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아덴이나 메나튼의 검사들이 도달하지 못한 곳이 있었으니.
“정말 귀찮게 하는군요.”
바로 아벨이 있는 곳이었는데, 완전 반대편에 있는 바람에 아직 아덴이나 메나튼의 검사들이 도달하기 전이었던 것이었다.
쎄에에에엑―!
때마침 카시드가 날린 검격이 아벨이 있는 곳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꺄아아악―!”
“안 돼!”
“도망쳐! 어서!”
군중들이 패닉에 빠져 비명을 질러대며 허둥지둥 댔다.
물론 그럼에도 아벨은 대단히 평온해 보였지만.
위잉―
콰콰콰콰콰콰―!
당연하다는 듯이 쥬디스가 아무렇지 않게 아벨의 앞에 거대한 마력장벽을 쳐 그 오발탄을 막아낸다.
“……?!”
그것에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역시 러네이였다. 싸움 중임에도 고개를 홱―! 하고 돌려 그 마력장벽을 바라본다.
러네이가 싸움 도중에 그렇게까지 정신을 뺏긴 이유는, 쥬디스가 무영창으로 그것도 대단히 거대하고 강력한 마력장벽을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역시 가장 먼저 반응하는군. ……어?’
그런데 그때 문제가 하나 발생했는데, 러네이만 그 마력장벽에 반응한 게 아니었던 것이었다.
“아벨 저하!”
케이가 갑자기 그 마력장벽을 향해 아벨을 부르며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카시드는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제기랄!”
그러면서 카시드는 미련 없이 검을 거두고 마력장벽을 향해 달려가는 케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사실상 그녀가 아벨을 부른 그 시점에서 결투는 끝이 난 것과 다름없던 것이었다.
사악―
결투가 멈춘 것을 보고는 쥬디스는 마력장벽을 거뒀다.
케이는 사라진 마력장벽을 지나 아벨에게 뛰어와 안긴다.
아벨은 그런 케이 때문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후―
자신의 품에 꼬옥 안겨있는 케이에게 묻는다.
“잘 지냈느냐?”
그러자 케이가 원망하는 투로 따져 묻는다.
“저하! 왜 이렇게 늦게 오신 거예요?!”
아벨이 수련 때문에 방학이 시작되고 이틀 뒤에나 출발했던 것이었다. 흑풍흡검이 4성을 눈앞에 두고 있어서 꼭 올려놓고 떠나고 싶어서 그랬다.
“그것보다 내가 아니었다면 어쩌려고 안겼느냐. 위험하게.”
케이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팟―!
순간 아벨을 밀쳐내며 붉은 장미처럼 얼굴을 붉힌다.
“그야…… 저하니까 당연히 알아볼 수 있죠…….”
아벨은 그런 케이가 대단히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봤다. 한없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그래. 그런데 너는 여기 어쩐 일이더냐?”
“저번에 저하께 오라버니를 소개해 드린다고 했는데…… 못해 드린 거 같아서…… 소개해 드리고 싶어서…….”
그때 조금은 화가 난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죠슈아가 보였다.
죠슈아는 다가와서는 케이에게 화를 내기보다 먼저 아벨에게 예를 갖췄다.
“저하를 뵙습니다.”
“그래. 오랜만이군. 그것보다 일단 여기를 벗어나자.”
모든 군중이 아벨과 케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아벨이 후드를 벗고 있지 않더라도 저하라는 호칭 때문에 대단히 고귀한 자라는 걸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거기다가 케이는 그냥 아름다운 소녀가 아니었다.
정말이지 대륙에 몇 없는 엄청나게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런데 그런 아름다운 소녀가 저렇게 적극적으로 안겨왔으니.
죠슈아가 지금의 상황에 민망해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러면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도 두 사람을 더 동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해?”
“예. 아덴의 왕자 저하와 저 여검사분이 서로 오해를 하고 계셔서 말입니다.”
“그래. 알겠다. 다 같이 가자.”
죠슈아가 손가락으로 멀리 보이는 크고 깨끗한, 연보라색 건물을 가리킨다.
“그럼 저기 보이시는 ‘물망초의 사랑’이라는 여관에서 뵙겠습니다. 케이와 먼저 가 있으시죠. 제가 두 사람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 * *
여관 ‘물망초의 사랑’은 때아닌 손님으로 인해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안으로 들어간 손님들을 보기 위해 구름 인파가 몰려든 것이었다. 물론 아덴의 검사들에 의해 단 한 걸음도 들어올 수 없었지만 말이다.
사실 카시드가 안에 있던 사람들도 내보내려고 했었는데, 러네이의 격한 반대로 있던 사람들은 그대로 두기로 했었다.
그래서 또 한 번 다툼이 일어날 뻔했었지만, 아벨의 명 덕분에 그러한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분위기가 좋으려고 해도 좋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무거운 분위기로 다섯 사람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다.
물론 그러한 분위기에 별 신경 쓰지 않는 자가 있었으니.
러네이는 그 무거운 분위기보다는 후드를 벗은 아벨의 비이상적인 아름다움에 놀라 좀처럼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그러다 도저히 참기 힘들었는지 아벨에게 대뜸 묻는다.
“혹시 드래곤이세요?”
“아니다. 난 인간이다. 오히려 너야말로 드래곤처럼 보인다만.”
그 말에 깜짝 놀라 소리친다.
“네?! 그게 무슨 소리세요! 저도 인간이에요! 인간!”
혼자 발끈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 웃는다.
“너 역시 대단히 아름다우니 하는 말이다. 너도 그런 것 때문에 나에게 물은 거 아니더냐.”
러네이도 소설에서 대륙 3대 꽃이라 불렸던 아르시아와 케이, 사나와 거의 맞먹을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4대 꽃이 되지 못한 이유는 드래곤이라서 그런지 특유의 이유를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인공적인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아, 뭐 그렇긴 하죠. 아무튼.”
“그래. 아무튼. 그런데 도대체 너희 둘은 왜 싸우고 있던 것이냐?”
그때 죠슈아가 입을 열었다.
“그게 카시드 왕자 저하와 케이의 관계를 이 여검사님께서 오해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휴…….”
러네이가 투덜대며 말한다.
“꼴에 왕자라고 강제로 끌고 가는 줄 알았거든요. 저기 허우대 멀쩡한 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길래 제가 좀 도운 거죠. 저 가여운 소녀를.”
러네이의 말에 카시드가 버럭 했다.
“뭐라고! 꼴에 왕자!”
“이게 쪼그만 게! 다시 말하지만 난 제국민이고 제국의 황자 저하가 아니라면 내 알 바 아니거든?!”
“이게 죽으려―”
쾅―!
“그만!”
그제야 둘 다 멈춘다.
“쳇!”
“흥!”
아직 앙금이 남아있는 두 사람에게 아벨이 준엄하게 경고한다.
“두 사람 다 더는 이곳에서 싸우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다른 곳에서 싸우는 건 말리지 않겠다만 이곳 메나튼에서 싸우는 건 절대 용서치 않겠다.”
러네이가 먼저 툴툴대며 대답한다.
“우리 저하께서 뭐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뭐 그럴게요.”
카시드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듯했지만 마지못해 대답한다.
“……저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일단 알겠습니다.”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카시드에게 묻는다.
“잘 생각했다. 그런데 너는 여기 어쩐 일이더냐? 메나튼에 온다는 말은 안 하지 않았더냐.”
아벨의 물음에 카시드는 뭔가 켕기는 게 있는지 웅얼거린다.
“……뭐 그냥 저도 오랜만에 유게네스 보러 왔습니다…….”
그 웅얼거리는 모습이 그저 웃길 뿐이다.
“그래? 그렇군. 그럼 이제 다들 뭘 할 건가?”
케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저는 저하께 저희 오라버니를 소개해 드릴 거예요!”
죠슈아도 일이 다 해결됐다 생각했는지 조금은 편한 얼굴이다.
“전부터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시간만 괜찮으시다면 저녁을 대접하고 싶습니다.”
러네이가 끼어든다.
“저 역시 이번 기회에 저하와 함께 저녁 먹으면서 인맥을 좀 쌓고 싶은데, 제국민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하지 않으시겠죠?”
카시드도 빠질 리 없다.
“……저도 저하의 친구로서 그 저녁 식사에 참여하고 싶습니다만…….”
아벨이 쥬디스를 바라봤다.
쥬디스는 정말 싫은 티를 팍팍 내며 싫다고 고개를 강하게 가로 저었었다.
하지만 결정권자는 아벨이었으니.
“좋다. 오늘 저녁까지만 합석을 허락하겠다. 하지만 내일 아침부터는 함께 할 수 없으니, 그 점 잊지 말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