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56화. 협력(1)
한 시간 뒤 수잔 황비까지 황궁으로 떠나고 사나와 단둘이 남게 됐다.
“……사나. 미안하다. 어마마마께서 너에게 억지를 부리셔서. 그게 내 안전이 걱정되다 보니.”
아벨의 말에 사나는 전혀 위로받지도, 공감하지도 못했다. 조금은 울먹이는 얼굴로 아벨을 야속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억지는 저하께서 부리시는 거 같은데요? 솔직히 자존심이 상하네요. 제가 그렇게 싫으신 건가요?”
그 울먹이는 얼굴에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이거 참…… 그래. 이젠 어쩔 수 없어.’
사나는 소설과는 달리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표현한 후였다. 그렇다 보니 아벨도 이젠 어물쩍 넘어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그런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만 보다가 어렵게 입을 연다.
“……좋아. 사나. 그럼 내가 왜 결혼을 안 하려는 지 말해주지.”
“그래요. 어디 한 번 들어나 볼게요.”
별 이유 없을 거라 강하게 믿는 듯한 얼굴이다.
“그전에 오늘의 대화는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해주어야겠다.”
“네?”
“널 믿으니 맹세의 마법까지는 안 하겠다만, 그래도 내게 네 입으로 분명히 맹세해 주었으면 좋겠다.”
아벨의 원대로 사나는 진지하게 결코 가볍지 않은 마음으로 대답한다.
“그래요. 오늘의 대화는 그 누구에게도 말 안 할게요. 맹세해요.”
더없이 진중하게 사나를 바라본다.
“사실 나는 주신 아그네스께 선택받은 용사이다.”
잠시 침묵이 감돈다.
“……네……?”
좀 많이 당황해하는 것 같았다.
“너도 알다시피 용사로 선택받은 자는 주신 아그네스가 주는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진짜예요……?”
덤덤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리고 이 목걸이가 무슨 목걸이인 줄 아느냐?”
목에서 빼내어 보여준다.
성녀의 성물인 그 목걸이가 대단히 성스럽게 빛을 내고 있었다.
“바로 성녀의 성물인 아그네스의 목걸이이다. 성녀께서 내가 용사이기에 주신 물건이지. 내가 결혼을 계속해서 미루는 이유는 분명 굉장히 어려운 사명을 감당해야 하기에 내 부인에게 그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러자 사나가 곧바로 아벨의 말을 반박했다.
“가장 최근의 용사였던 카인 폐하께서는 근데 결혼하셨잖아요? 뿐만 아니라 역대 용사들도 거의 다 결혼했었고.”
아벨의 말이 변명이라 확신하는 듯했다.
꼭 그런 얼굴이다.
“아무튼. 나는 좀 다르다.”
“뭐가요?”
“아무튼 오늘의 일은 비밀로 해줬으면 한다.”
“사명 다 이루면 결혼할 건가요?”
“모른다.”
“왜요?”
“사나. 너도 알다시피 역대 용사들은 그 사명 때문에 대륙의 권력자들에게 엄청난 미움을 받아왔었다. 미스라임이라고 다를 건 없을 거고 말이다.”
“아바마마께서 저하를 미워할 거라는 말인가요?”
“그래. 솔직히 내가 사명을 시작하면 날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아바마마께서 저하를 미워하지 않으시면 그땐 절 받아 주실 건가요?”
“……그건?”
“내가 저하의 사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면 그땐 절 받아 주실 거냐구요.”
“후우…… 사나…… 아마 몇십 년이 더 걸릴지도 모른다.”
“괜찮아요. 어차피 저하가 아니면 다른 사람하고 결혼할 생각 없었는데. 그거 거짓말 아니에요. 진짜라구요.”
아벨이 아무 말 못 하고 가만히 서 있자.
“좋아요. 백번 양보해서 저하가 말한 모든 게 걸릴 게 없을 때, 그땐 날 받아 주는 거로. 아바마마가 저하를 끝까지 미워한다면 내가 미스라임을 떠나면 되는 것이니.”
다시 한 번 아벨은 사나의 사랑을 과소평가했음을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 * *
마고스의 보고를 받고 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벌컥―!
교수실 문을 열자 양팔이 잘린, 이지를 상실한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
부들부들―!
분노로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렸었고 너무 화가 나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빠드득―!
주륵―
꽉 깨문 어금니 사이로 피가 새어 나온다.
천천히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두 사람을 안는다. 안은 채로 물었다.
“하베츠는 어딨습니까?”
“……이미 떠나셨습니다…….”
“왜 그랬다고 합니까?”
“그게…….”
가만히 마고스의 말을 기다린다.
“쓸모없어도 저하께 줄 순 없다며…….”
하아……
어이가 없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명을 앞당기는군…… 하베츠…….”
“……?!”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쥬디스 교수님을 좀 불러주시겠습니까? 도움이 좀 필요하군요. 그리고 도와주신다면 제가 그만한 합당한 대가를 치르겠다고도 전해주셨으면 하군요.”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인공 팔이라도 달아야 않겠습니까?”
“인공 팔 말씀이십니까……?”
“네. 제가 방법을 압니다. 그럼 전 마법 상점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좀 사 오겠습니다.”
교수실을 나서 마법 상점으로 갔다.
‘이건 임시방편일 뿐. 방학 때 재료 좀 구해달라고 부탁해야겠어.’
임시로 쓸 인공 팔은 만들 수 있겠으나, 검을 다시 잡으려면 좀 더 확실한 물품들이 필요했다.
특히 상급 푸른색 마력석이 필요했다. 상급 푸른색 마력석은 적어도 바질리스크 정도의 최상위 마물들을 죽여야만 얻을 수 있었다. 그 마력석이 최소 4개가 필요했다.
무기에 박아 마력을 증폭하는데 아주 좋은 재료라 할 수 있었기에 천문학적인 돈을 요구로 했다.
‘돈은 문제가 안 돼.’
아벨도 돈은 자신 있었기에, 그리고 방학 때 다른 일로 바빴기에 마법 상점의 주인인 나스타샤 요한센에게 부탁할 생각을 했다.
물론 그녀에게도 도와주는 대가를 후하게 치러줄 생각이었다.
‘빌어먹을 새끼.’
하베츠의 수법이 역겹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당하니 그 분노를 참기가 정말 힘들었다.
당장 찾아가 죽이고 싶었다.
‘그 새끼의 가드들이 문제야.’
최소 둘은 항상 붙어 있었다.
‘둘 다 10성이었어.’
물론 이후 무더기로 쏟아질 강자들에 비하면 약한 편이긴 했지만 지금으로선 마고스 바로 아랫급의 강자들이었다.
‘오래지 않을 것이다.’
천고의 검재 덕분에 몇 년 안에 11성에 오를 것이다.
11성에 오르는 그때가, 내가 그 두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바로 그때 하베츠도 죽을 때가 될 것이다.
‘절대 살려두지 않겠다.’
마법 상점에 도착했다.
벌컥―
바로 마법 상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른한 얼굴을 하고 있던, 마법 상점의 주인 나스타샤 요한센이 아벨에게 예를 갖춘다.
아벨이 연무실에 마법진을 그릴 도구를 사기 위해 마법 상점을 꽤나 자주 찾았었기에 둘은 어느 정도 친분이 쌓인 상태였었다.
“무슨 일이시길래 그리 다급히?”
온 목적부터 바로 말했다.
“인공 팔을 만들까 한다. 정령의 가루와 마누스의 점토가 있다면 좀 다오.”
물건에 생기를 불어넣는 정령의 가루와 의지대로 움직임이 가능한 마누스의 점토는 보통의 마법 상점에선 구할 수 없는 희귀한 물건이었다.
주원도 소설에서 그녀가 정령의 가루와 마누스의 점토로 아벨을 도운 걸 기억했기에 이렇게 확신을 갖고 찾아올 수 있던 것이었다.
그 물건은 파는 물건이 아니라 그녀가 개인적인 실험 물건으로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네……?”
“꼭 좀 부탁하겠다. 이 은혜 결코 잊지 않을 테니.”
아벨을 지긋이 바라본다.
“어떻게 잊지 않을 건데요?”
“내가 황실 무고를 다녀왔다는 걸 들었을 것이다.”
“네. 뭐. 듣긴 들었죠?”
“난 그곳에서 굉장히 많은 것들을 보고 왔었다.”
“……?”
“마법서뿐만 아니라 신들에 관한 기록들도.”
“……?!”
“너의 궁금증을 내가 다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해결해 줄 수도 있다.”
정말 놀랐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아벨은 황실에서 적 취급당하고 있지 않았던가?
“호호…… 확실히 제가 뭘 원하는지 아시고 계시는 것 같네요…… 그런데 어떻게 아신 거죠? 제가 신들에 대해 궁금해한다는 것을.”
“정확히 말해주긴 어렵지만 내가 생각보다 정보력이 뛰어나거든.”
“좋아요. 제가 가진 것들을 드리지요. 그런데 그것들로 인공 팔을 만드실 수 있으시겠어요? 매우 어려우실 텐데.”
“내가 만드는 게 아니라 쥬디스 교수님이 만드실 거다.”
“그렇군요. 그럼 제가 궁금해하는 것은 언제 알려주실 거죠? 확실히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이 일이 끝나고 바로.”
조너선과 마티아스의 팔을 만들어 주는 게 우선이었기에, 방학 때 부탁할 것들도 이따가 말하기로 한다.
“알겠어요. 잠시 기다리세요.”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서 반짝이는 주머니와 점토가 들어있는 묵직한 주머니를 가지고 나왔다.
“이 정도면 될까요?”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할 듯하다. 고맙다.”
“뭘요. 기브 앤 테이크인데.”
“바로 갔다 오겠다.”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두 물건을 들고 바로 마고스의 교수실로 갔다.
벌컥―
문을 열자 마고스의 교수실에선 쥬디스와 마고스가 격렬한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조너선과 마티아스는 옆에 재워 둔 채 말이다.
“네가 아벨을 받아 주면 줄수록 하베츠는 더욱 이런 짓거리들을―”
아벨이 들어온 것을 깨달은 마고스가 쥬디스에게 눈치를 준다.
“흠흠! 오셨습니까?”
쥬디스는 콧방귀를 뀌며 아벨을 외면한다.
“흥!”
그런 쥬디스를 보며 묻는다.
“쥬디스 교수님께선 하베츠를 두려워하시는 겁니까?”
그 말에 적잖이 당황한다.
“무, 무슨!”
무심히 바라보며 말한다.
“하긴 이해는 갑니다. 아무튼 인공 팔을 만들 것인데 절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심통이 난 얼굴로.
“전 인공 팔을 만들 줄 모릅니다만.”
“제가 알려드리지요.”
“네?”
반응이 없을 수가 없었다.
인공 팔은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어, 어떻게?”
“황실무고에서 많은 마법서들을 봐서 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드래곤 마법 몇 가지를 알고 있습니다.”
벌떡!
“그땐! 그땐 모르신다고!”
“어떻게 살면서 진실만을 말하겠습니까? 목록을 적어주시지요. 알려 드릴 테니.”
“조, 종이!”
“여깄다.”
그 자리에서 부리나케 적어나간다.
사사사사삭―
지옥 불꽃.
운석 마법.
순간이동.
변신 마법.
시간 정지 마법.
봉인 마법.
.
.
.
.
한 50개는 써내려갔다.
“그만. 일단 그것만 줘 보시지요.”
간절한 눈빛으로 쓴 종이를 넘긴다.
훑어보다가.
“아는 것들이 꽤 있군요.”
버럭 소리친다.
“정말이십니까?!”
“네. 확실히 기억하는 마법들입니다.”
“그렇다면!”
“저기 적혀 있는 마법들 중 절반 이상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럴 수가!!”
대단히 흥분하는 쥬디스를 차분히 부른다.
“그런데 쥬디스 교수님.”
“네, 네?!”
아벨은 하베츠의 사악함 때문에서라도 조금 더 빨리 이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건 인공 팔을 만들어 주는 조건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제가 교수님이 원하시는 마법들을 모두 알려드릴 테니, 앞으로 저와 함께하겠습니까? 황후마마가 아니라 말입니다.”
쥬디스는 그것만 준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듯이, 별생각 없는 얼굴로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격하게 끄덕인다.
그렇다면 이제는 마고스 차례였다.
고개 돌려 마고스를 바라보며 묻는다.
“마고스 교수님께도 질문 하나 해야겠군요. 교수님은 정말 저에게 월광참검을 가르치시고 싶으신 겁니까? 하베츠에게 몹쓸 짓을 당할 것임에도 말입니다.”
잠시 아벨의 무심한 눈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연다.
“저하께서 월광참검을 완성만 해주신다면.”
그의 의지가 굳건한 눈빛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좋습니다. 그러면 우선 우리 셋이서 맹세의 마법을 해야겠습니다. 절대 우리 세 사람이 서로를 배신하지 않기로 말입니다.”
쥬디스가 놀라 멍청한 소리를 냈다.
“네, 네?”
“아시다시피 절 죽이고자 하는 자들이 너무 많아서 말입니다. 제가 두 분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드렸는데, 그런데 두 분께서 절 배신하면 제가 뭐가 되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 전에.”
마고스가 말했다.
“그 전에 저하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것인지 대략적인 계획이라도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분명 저희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하시는 거 같은데 말입니다.”
“맹세의 마법을 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아 물론 제가 하는 일이 여러분들이 보셨을 때 비인간적이고, 도덕적이지 않은, 정의롭지 않은 일이라면 절대 돕지 않겠다고 맹세문에 기입하셔도 됩니다.”
“음…….”
“전 하베츠와 다르다는 걸 알아주시길.”
두 사람은 한참을 고심했다.
쥬디스는 마음을 정한 듯 보이나 마고스는 그게 쉽지 않은가 보다.
하지만 마고스도 이번 일로 하베츠가 대단히 사악하다는 걸 새삼 다시 한 번 깨달았으니.
오래지 않아 결정을 내린다.
“알겠습니다. 저 역시 함께하겠습니다.”
바로 맹세의 마법을 할 마법 양피지를 꺼냈다. 그리고 아벨은 그들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맹세문을 양피지에 썼다.
세 사람은 절대적인 운명공동체 관계로써 서로가 도움이 필요할 땐 적극적으로 도와야 하고 서로를 절대 배신해서는 안 되며, 그렇지만 협력을 요구할 때 비인간적이거나, 도덕적이지 않은, 정의롭지 않은 일은 협력하지 않아도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