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11화. 신입생 환영회(1)
레이첼이 그저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윌리엄은 민망해하며 아벨에게 묻는다.
“……오는 데 별일 없었어?”
아벨도 의자를 들고 와 그들의 반대편에 가 앉는다.
“네. 별일 없었습니다.”
“그럼 다행이야.”
‘습격이라도 받아야 한다는 건가?’
뭐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벨은 윌리엄을 더없이 싸늘하게 바라봤다.
스르르―
윌리엄은 아벨의 그 싸늘한 눈빛이 무서웠는지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눈을 내리깔면서도 그래도 말은 해야 하기에 용기 내 말을 다시 꺼낸다.
“……그런데 얼굴에 흉터 있던 거 아녔어?”
“네. 아니었습니다.”
“그럼 그 철가면은 그동안 왜 썼던 거야……?”
그 멍청한 말에 피식― 실소가 터져 나왔다.
“황후마마와 황비 마마들께서 쓰라 해서 썼습니다.”
“어?”
적잖이 당황한 얼굴이다.
“아무튼 이젠 더는 쓸 생각 없으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그, 그래?”
“네.”
둘은 아벨을 대단히 오랜만에 보는 것이기에, 변한 아벨에 쉽게 적응을 못 하고 있었다.
그런 변화에 짜증이 난 레이첼이 윌리엄에게 미간을 구기며 말한다.
“오빠. 그냥 할 말만 하고 가자.”
아벨도 레이첼의 말에 동의한다.
“누님 말씀대로 용건만 말씀하시죠. 이제 곧 입학식에 가야 하니 말입니다.”
윌리엄은 아벨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게…….”
뭔가 아벨에게 더러운 짓을 해야 하는데, 예전의 마냥 상냥했었던, 바보 같았던 아벨이 아니라 말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괜찮습니다. 어서 말씀해 보시지요.”
레이첼도 답답했는지, 왜 그렇게 쩔쩔매냐는 듯이 윌리엄을 불만스럽게 쏘아보았다.
그래도 시원스럽게 말 못 하자 다시 한 번 레이첼이 재촉한다.
“빨리 말해!”
윌리엄이 그 윽박지름에 흠칫 놀라며 입을 연다.
“어? 응…… 그게 다름 아니라…….”
“오빠!”
“저, 저녁에 있을 신입생 환영회 때문에 왔어…….”
‘그럼 그렇지.’
루드스는 비공식적으로 원하는 학생들에 한해서 신입생 환영회를 열었었는데, 그곳에서 매년 황실의 자제들이 아벨에게 창피와 무안을 줬던 것이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인 너를 소개해 달라는 애들이 많아서 말이야…….”
혹시 아벨이 안 나올까 봐 확답을 받으러 온 모양이었다.
‘세르지와 함께 매번 헛짓거리를 꾸몄었지’
소설에서 두 사람은 세르지 2 황자와 함께 아벨을 괴롭히려고 온갖 역겨운 것들을 매번 준비해뒀었다.
아벨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윌리엄을 경멸스런 눈으로 내려다보며 묻는다.
“안 가도 되는 겁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당연히 갈 생각이었다.
‘몸 한 번 제대로 풀겠군.’
반면 윌리엄은 아벨이 정말 안 올까 봐 더없이 간절한 표정으로 다급히 말을 잇는다.
“무, 물론……! 안 가도 되긴 하지만! 넌 너무 오래 동쪽 별관에서만 있어서! 그래서 친구가 별로 없잖아?! 내가 우리가 사귈만한 귀족들을 소개해줄게! 이 형만 믿으라고!”
그래도 아벨이 별말을 안 하고 무서운 표정으로 가만히 있자.
“아벨! 우리는 네가 진짜 이번에 꼭 좀 참석했으면 좋겠어! 재학생 중에 진짜 괜찮은 귀족들만 오거든! 내가 그냥 싹 다 소개해줄게! 아 맞다! 그리고 나랑 약혼할 케이 영애도 이번에 입학하게 됐어! 너도 아주 예전에, 갇히기 전에 말이야! 그때 너도 황궁 무도회에서 봤을걸?! 케이 영애도 내가 소개해줄게! 그러니 제발! 제발 꼭 좀 왔으면 좋겠다! 응?! 올 거지?!”
말을 마치고 아벨의 대답을 기다리던 윌리엄은 아벨의 눈치를 보며 불안했는지 땀을 비 오듯이 흘리고 있었다.
‘걱정 마라. 꼭 갈 거니.’
“알겠습니다. 참석하지요.”
“정말?!”
“네. 그러니 이제 그만 나가주셨으면 합니다.”
“어, 어! 알겠어! 그래! 너도 좀 쉬어야지! 레이첼 가자!”
레이첼도 이번만큼은 아벨을 꼭 참석시켜야 했기에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랐음에도 어떻게든 참아 보려고 하는 듯했다.
“흥!”
레이첼이 콧방귀를 뀌며 나간다.
윌리엄은 헤헤― 처 웃으며 나가고.
‘재밌겠군.’
오늘 있을 저들의 재롱잔치가 불쾌하다기보다는 오히려 기대가 됐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니.’
루드스에서 황후와 황비들은 암살을 시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기회가 날 때마다 아벨이 황제가 될 자격이 없다는 걸 드러내기 위해 추종하는 세력들을 이용해 아벨에게 갖은 무안과 망신을 주었었다.
‘대놓고 아벨을 왕따시켰어.’
그들은 친구가 다프네밖에 없었던 아벨이 무엇보다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진짜 친구를 루드스에서도 간절히 소원한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세력 자제들을 이용해 아벨을 조롱하게 했고 따돌리게 했었다.
‘네까짓 것은 우리와 어울릴 수 없다며.’
조롱하거나 따돌리는 게 성격상 정 힘들다면 아벨을 없는 사람마냥 피해 다니기라도 하라고 했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아벨에게 진심을 준 소녀들이 있었으니.
그중 한 명이 바로 오늘 만날 케이 아슈트반이었다.
‘……케이 아슈트반…….’
케이 아슈트반은 아벨의 운명의 세 연인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조금 전 윌리엄은 케이 아슈트반이 자신과 약혼할 거라고 한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윌리엄은 아주 예전부터 케이의 스토커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케이에게 푹 빠져있던 놈이었다.
그래서 다른 경쟁자들이 붙는 걸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케이가 입학하기 전부터 자신과 약혼할 거라고 헛소리를 지껄이고 다닌 것이었다.
물론 케이의 아비인 스테판 백작이 윌리엄에게 조금의 여지를 주긴 했었지만 케이는 그 개소리를 매우 끔찍하게 생각했었다.
케이가 싫어하는 것도 모르고, 케이를 아벨의 마수에서 구하겠다면서 아벨과 케이가 가는 곳마다 쫓아와 훼방 놓았던 게 기억이 났다.
‘하지만 빌어먹게도 케이는 윌리엄과 약혼도 하고 결혼도 하게 됐었지.’
하지만 케이가 그토록 윌리엄을 혐오함에도, 빌어먹게도 결론적으로 보자면 케이는 윌리엄과 약혼도 하고 결혼도 하게 됐었다.
지금 그 사실을 말한다면 그 누구도 믿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 모든 게 다 아벨 때문이었으니.’
문제는 그렇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아벨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윌리엄과 결혼해선 안 됐어.’
분명히 말하지만 케이는 윌리엄이 아닌 아벨만을 사랑했었다.
그녀의 가문이자, 제국 3대 검술 명가 중 하나인 아슈트반 백작가가 적에게 빠진 딸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케이를 윌리엄과 강제로 결혼시켜서 그렇지.
당시 아벨이 3 황자파에 속해 있던 아슈트반 백작가의 적이기도 했었지만, 그것보다는 아벨이 항상 적들에게 둘러싸여 당장에라도 죽을 것만 같았기에, 딸을 가진 아비로선 도저히 아벨에게 딸을 줄 수가 없다는 게 스테판 백작이 케이에게 한 설명이었다.
가슴 아프긴 했지만 이해가 가는 선택이기도 했다.
‘이해는 가다만.’
머리는 이해가 갔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었다.
둘의 사랑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케이.’
케이가 아벨을 진심으로 사랑했었던 것처럼, 아벨 역시 그녀에게 마음이 없었던 게 아니었었다.
아벨도 케이를 진심으로 사랑했었기에, 그래서 그녀를 자신의 그 불운하고 슬픈 운명에서 놓아주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약혼 직전에 오빠 죠슈아의 도움으로 아벨에게 찾아가 함께 도망가자며 울고 불며 애원하던 케이가 떠올랐다.
‘외면했었지.’
그렇게 간절히 매달렸었지만 아벨은 끝내 그녀의 사랑을 외면했었다.
적들에게 둘러싸여 매일매일을 사선의 기로에 서 있던 자신보다는, 아덴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가진 형과 결혼하는 것이 그녀를 위한 일이라 생각했었기에.
‘응원했었는데…….’
정말 애정하던 캐릭터였다.
주원은 케이가 등장할 때마다 함께 울고 웃으며, 케이의 사랑을 진심으로 응원해왔었다.
환경에 의해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 얼마나 힘들고 가슴 아픈 일인지 잘 알기에…….
‘아님 행복하게라도 해주든가.’
변태 작가 ‘난좋은작가’는 케이가 행복하길 바라는 독자들의 마음과는 반대로 케이를 끝끝내 불행하게 만들었었다.
결혼하자마자 남편 윌리엄을 형인 하베츠를 통해 죽여 버린 것도 부족해, 남편을 죽인 원수의 첩으로 만든 것이었다.
‘첩이 되지 않는다면 아슈트반 백작가를 반역죄로 멸문시키겠다고 협박했었어.’
작가 ‘난좋은작가’의 만행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마치 그것이 시작이라는 것 마냥, 유일하게 케이의 편이었던 오빠 죠슈아를 누구도 아닌 아벨을 돕다 죽게 만들었었고, 그것뿐이었으면 차라리 다행이었을 정도로 죠슈아의 죽음 이후에도 케이에겐 슬프고 아픈 일들이 끊이질 않고 일어나게 했었다.
아벨만큼이나 작가가 신경 써서 괴롭힌, 소설 『에브니아 전기』 속 가장 비운의 여주인공이라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아르시아도 만만치 않다는 거지…….’
문제는 작가가 아벨의 진정한 연인인 아르시아도 케이만큼이나 불행한 여주인공로 만든 것이었다.
아르시아가 케이와는 달리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했다는 것 빼고는 케이나 아르시아나 거기서 거기였었다.
덕분에 주원과 같이 케이를 애정하던 독자들은 아벨을 뺏어간 아르시아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저 작가를 욕하며 댓글을 쓸 수밖에.
진심 지금 다시 생각해도 정말 악독한 놈이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던 주원이었다.
‘이번에는 달라.’
케이를 애정했었던, 응원했었던 독자로서 이번 케이의 삶만큼은 반드시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비록 주원의 목표가 예전 세계로 돌아가 다시 살아난 어머니와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기에, 아벨과 함께하긴 무리겠지만 말이다.
‘마음만 안 주면 돼. 그래. 그러면 될 거야.’
스테판 백작이 케이를 강제적으로 윌리엄과 결혼시키긴 했었지만, 사실 그는 자식들의 의견을 최대한 받아들이고 존중하려던 사람이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딸이 원치 않는다면, 적과 사랑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은 경우만 아니라면, 웬만해선 딸이 원하는 남자와 결혼시키려 할 것이다.
‘그래. 그땐 아벨 때문에 스테판 백작도 나사가 하나 빠져 보였었어.’
그러니 분명 이번 아벨만 케이를 사랑하지 않으면 됐었다.
“그래. 내가 케이를 사랑하지만 않으면 돼.”
반드시 이번 케이의 삶도 아벨의 삶이 달라진 것처럼 반드시 바꿔 놓겠다고 다짐하던 주원이었다.
* * *
입학식 때부터 시작해 이제 시작하는 신입생 환영회 때도 아벨에 대한 관심은 좀처럼 끊이질 않았다.
모두가 힐끔힐끔 계속해서 아벨만 바라보고 있었다.
‘불편하군.’
다른 학생들보다 아벨은 분명 과도한 관심을 받고 있었다.
“와 저게 사람이야?”
“너무 아름다우시다.”
“어쩜 저렇게 잘 성장하셨을까?”
“수잔 황비 마마를 닮으신 거 같아!”
“진짜! 이제 보니 수잔 황비 마마를 똑 닮으셨네!”
“왜 일찍 태어나시지 않으셨나이까!”
“요즘은 연상연하가 대세인 거 몰라?”
“그, 그래……?”
눈에 핑크빛 하트를 그린 여학생들의 입에서는 끊임없이 희열 섞인 경탄이 터져 나왔었다.
반면 눈에 질투의 불꽃을 피우던 남학생들에게서는.
“근데 왜 철가면은 안 쓴 거야?”
“쳇! 두고 보자! 하베츠 황태자 저하께서 가만 안 두실 테니까!”
“세르지 황자 저하도 마찬가지지!”
“윌리엄 황자 저하도!”
“반드시 철가면이라도 다시 쓰게 만들겠어!”
살기 짙은 위협이 터져 나왔었고 말이다.
물론 아벨은 여학생들이든, 남학생들이든, 그들이 뭐라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었지만.
그저 무심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케이 빼고 다 모였군.’
신입생들 중에선 케이 빼고 중요인물들은 다 모인 듯했다.
황실의 자제들 중에선 하베츠 빼고 다 모인 듯했고 말이다.
아벨은 그들의 헛소리들을 흘려들으면서, 아벨을 배신한 연놈들부터 훑어보았다.
훗날 검왕이라 불리는 검술 강국 아덴의 카시드 우니베르스 왕자와 권왕이라 불릴 바일 왕국의 지산 푸뉴스, 10 서클 대마법사가 될 제국 중앙 마탑 소속의 쿠리엘 테젤, 정의의 신 타티스의 대신관이 될 로디아까지.
그 마지막 멤버가 모두 이 자리에 있던 것이었다.
그들 또한 아벨을 바라보며 꽤나 순진한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재밌겠어.’
주원은 소설 속 아벨처럼 등수에 크게 집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소설에서는 아벨이 어머니 수잔 황비를 기쁘게 하기 위해 매 순간 전력을 다한 탓에 단 한 번도 1등을, 전체 만점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주원은 아벨과는 달리 수업에 적당히 대충 임할 생각이었다.
‘인간의 마력을 파악할 마법이나 아티팩트가 없어 다행이야.’
나라 간 이동을 가능하게 한 ‘이동 워프’가 있을 정도로 마도공학魔道工學이 발달했었지만, 인간의 마력을 정확히 파악하는 마법이나 아티팩트는 이 에브니아 세상에 없었다.
마력을 표출하지 않는 이상 그 사람이 지닌 정확한 마력을 측정할 수단이 전혀 없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수업 시간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뭐라고 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모름지기 조금의 힘은 항상 숨겨야 하는 법.’
그래야 경계심도 줄일 수 있었고, 정말 필요할 때 적의 방심을 이용할 수도 있었고.
그때였다.
덜컥―!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누군가가 뛰어 들어왔다.
다름 아닌 신입생 환영회의 시작을 늦춘 장본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