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SSS랭크로 귀환한 사연 183화
내 말에 몇몇 천족들이 뒷목을 잡는다.
심약한 자들은 비틀거리며 주저앉기까지 했다.
“마왕이……성검을……허허…….”
“그, 그게 정말 성검이 맞단 말이오????”
그럼 야광봉이겠냐.
지금도 지독하게 성력을 뿜어내는 검.
누가 봐도 천족들의 보물인 성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지, 천족들은 마치 꿈이라도 꾸는 표정이다.
그것도 아주 끔찍한 악몽이 틀림없었다.
“……물론 마족이, 심지어 마왕이 성검을 자유롭기 쓰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인 당신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겠죠? 마왕 진.”
또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천족 하나가 앞으로 나온다.
눈부신 백금발을 흔한 머리장식 하나없이 길게 내려뜨린 여자였다.
아름다운 외모에 가녀린 체구는 숟가락 들기도 어려워 보일 정도로 약해 보인다.
하지만 걸음마다 묻어 나오는 여유는 힘에 자신 있는 강자의 것이었다.
“대천사장님!”
그녀의 등장에 천족들이 하나 둘 예의를 갖춘다.
공손한 태도에는 존경심이 물씬 묻어난다.
그러나 다가온 그녀를 마주한 아렐리아의 얼굴에는 짙은 경멸이 서려 있었다.
“그동안 깃털 하나 보이지 않기에 이미 소멸한 줄 알았는데. 아직 그 질긴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네, 가브리엘.”
“……남부 공작.”
“아쉽게도 치매도 오지 않은 것 같고.”
“당신과 지겨운 말싸움을 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다른 싸움이라면 흔쾌히 받아 주죠. 물론 이곳이 아닌 전장에서.”
순해 빠진 인상과는 다르게 말투는 호기롭다.
당당하게 전투를 들먹이는 그녀에게 아렐리아는 발끈하며 손에 마기를 응축시킨다.
“건방진……!!”
“아렐리아, 그만. 우리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지 않나.”
“……죄송해요. 마왕님.”
바로 꼬리를 내리는 아렐리아가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녀의 눈빛에 잠깐 이채가 돈다.
“저 망아지같은 공작이 인간인 마왕 꽁무니만 쫓아다닌다더니…… 정말 소문대로네요. 이미 남부 공작이 소개했지만 저는 대천사들을 대표하는 대천사장 가브리엘이에요. 결국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요. 마왕과 천족이 아닌, 도전자와 길잡이의 관계로요.”
도전자와 길잡이라.
그녀는 내가 천계에 온 목적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이번 임무에서 가브리엘은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상태인 듯했다.
[<천왕의 시험>의 길잡이, 가브리엘을 만났습니다. 곧 <천왕의 시험>이 시작됩니다.]
과연 말이 끝나자마자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그녀는 방긋 웃으며 어느 한 방향을 손짓으로 가리킨다.
“사실 왕궁이 아니라 정문에서 맞이했어야 했지만…… 성검의 힘으로 왕궁 깊숙한곳까지 와 버렸나 보군요. 어쩔 수 없죠. 자, 이곳으로 오세요.”
적개심과 호기심이 뒤엉킨 눈동자들이 계속 우리를 주시한다.
확실히 이곳은 긴 대화를 나누기 좋지 않은 장소였다.
나는 흔쾌히 그녀가 안내하는 곳으로 향했다.
“마왕님…… 조심해야해요. 저 여자, 저렇게 개미새끼 한 마리 못 죽일 것처럼 보여도 정말 잔인하고 악독한 천족이니까요.”
잔인과 악독이라는 단어가 마족 입에서 나오니 기분이 좀 이상한데.
하지만 농담이 아닌지 그녀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다.
아까부터 느꼈지만 어지간히도 사이가 안 좋아 보였다.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렐리아가 만족한듯 내 뒤를 쫓아온다.
끼익-
가브리엘이 우아하게 조각된 문 앞에 멈춘다.
가볍게 문을 열자 안쪽은 높은 천장부터 화사한 빛이 내려오고 있는 공간이었다.
여기저기 신전 특유의 기둥과 조각상들이 놓여 있는 곳은 누가 봐도 성스럽다 감탄할 정도.
하지만 더욱 짙게 느껴지는 성력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더러운 기운이 느껴져요.”
마족인 아렐리아도 강하게 성력에 짓눌리는지 입술을 살짝 깨문다.
가뜩이나 하얗던 얼굴색은 이미 백지장처럼 변해 버렸다.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어하는 기색이었지만 나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버티고 있는 모습이다.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붙잡고 마기를 조금 나눠 주었다.
그러자 아렐리아의 얼굴이 천천히 풀려간다.
우리를 흘깃 쳐다보던 가브리엘은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점점 중앙으로 향했다.
“여기는 역대 천왕들의 조각상과 그들이 사용하던 무구를 보관하고 있는 곳이에요.”
그녀의 말대로 거대한 조각상 발 밑에는 검이며 방패 따위가 놓여있다.
한눈에 봐도 하나하나가 대륙에 있는 신관들이 거품 물고 숭배할 성물이었다.
“그러나…… 딱 하나. 저희가 물려받지 못한 것이 있죠.”
사뿐거리는 발걸음이 제일 끝에 있는 조각상 앞에 멈춰 선다.
흰 대리석 받침대에는 응당 있어야할 물건이 없었다.
작은 홈을 보아하니 검이 박혀 있던 자리였다.
‘이거 설마…….’
성검을 뽑아들자 가브리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자애롭던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맞아요. 초대 천왕의 성검이죠. 천왕이 소멸하기 직전, 그를 특별하게 여기신 천신께서 영혼을 담아 주겠다며 잠시 걷어간 물건입니다.”
쿵!!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성력이 묵직하게 바닥을 내리친다.
순간 우리가 서 있던 공간은 움푹 패여 버렸다.
“그런데…… 그런 성물이 왜 당신께 있는 거죠? 그것도 마족들의 왕에게?”
“내놓으라 위협이라도 할 셈인가.”
“마왕님께 무슨 망발을!!!”
“위협이라니요. 그저 작은 내기를 요청하려는 것뿐이에요. 아, 오해하지 마세요. 이건 당신이 진행하려는 임무의 일부분이니까. 그러면 일단 하던 것부터 마저하죠.”
가브리엘의 하얀 손이 성검을 살짝 부여잡는다.
대체 뭘 하려나 가만 보는데, 갑자기 검이 작게 진동하며 은은한 빛을 머금기 시작한다.
[<천왕의 시험>-1: 초대 천왕의 영혼을 담은 성검을 되찾아라.]
[<천왕의 시험>-1 해당 임무가 완료되었습니다. (플레이어가 이미 성검을 소유 중입니다.)]
“시험이라는 게 성검을 되찾아오는 임무였나.”
자신들이 찾지 못하니 도전자의 힘을 빌려 볼 계획이었던 듯하다.
‘오랜만에 마신이 도움이 되는군.’
이걸 알고 미리 내게 준 건가.
그렇다기엔 신이라는 이름값도 못하던 장난스럽던 미소가 걸린다.
보나마나 본인이 가지고 있기에는 언젠간 들킬 것 같으니 선물이랍시고 떠넘긴 거겠지.
어찌되었든 내게는 잘된 일이었다.
“네. 맞아요. 본디 천왕께서 직접 주관하셨어야 할 임무지만……수명이 얼마 안 남으신 상태라 남은 시간은 신전에서 보내시고 계시죠. 하지만 임무 내용은 같았을 거예요.”
“그 늙은이 언제 소멸하나 했는데, 드디어 가나 보네요. 곧 마계에 축제가 열리겠어요.”
아렐리아가 속 시원하다는 얼굴로 밝게 웃어 보인다.
바로 가브리엘의 사나운 눈초리가 쏘아졌지만, 오히려 그것마저 포상으로 여기는 듯했다.
뒤바뀐 그녀들의 분위기를 지켜보는 사이.
또다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며 다음 임무를 알려 왔다.
[<천왕의 시험>-2: 성검에게 인정받는 자. (1단계:무관심~9단계:주인) 성검에게 최소 3단계 이상의 신뢰도를 받으세요. 성공 여부에 따라 다음 임무의 방향성이 결정됩니다. *주인의 인정을 받을 경우, 숨겨진 임무가 생성됩니다.]
‘허? 퀘스트 내용이…….’
잠시 멍하니 설명 글을 읽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내용에는 단순히 성검의 인정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딱히 누구의 영혼이라고는 적혀 있지는 않았다.
‘지금은 에우로델이 성검에 깃들어 있는데…… 이거 설마.’
“다음은 성검에게 인정받는 임무입니다. 성검을 얻은 직후부터 깃들어 있는 초대 천왕의 영혼이 당신을 평가하고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고귀한 영혼이니만큼 그의 호의를 얻기는 힘든 일이죠.”
가브리엘이 눈에 띄게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마치 모든걸 다 안다는 듯, 승리에 도취된 웃음이었다.
얼떨떨해하는 내 반응을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듯했다.
“혹시 실패할 것 같으면 미리 말해 주세요. 자격도 없는 주인에게서 성검을 거둬가야겠으니까요. 그걸 넘겨주신다면 천왕의 시험을 그대로 이어 갈 수 있게 해 드리죠.”
선심 쓰는 듯한 말이었다.
원래라면 나도 대충 똥 밟았다 치고 냉큼 성검을 넘겼을 것이다.
탑의 임무를 이대로 실패한 채 나갈 수는 없고, 애초에 손에 맞는 검도 아니었으니까.
‘만약 정말로 천왕의 영혼이라면 1단계인 무관심이 아니라, 그보다 더 바닥인 마이너스 단계로 도달하고도 남았겠지만…….’
그러나 그 영혼은 이미 아르모데스의 봉인과 함께 송두리째 소멸해 버린 상황.
그리고 그 빈자리는 나의 드래곤 노예가 차지하고 있다.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데.’
“……마왕님? 성검의 영혼이라면…….”
이미 에우로델의 눈물 젖은 쇼를 모두 보았던 아렐리아가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짓는다.
가브리엘은 슬슬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날카롭게 우리를 주시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너네 천왕 영혼은 소멸한 지 오래라고 말해 주지 않는다면 이런 상황은 짐작조차 못할 터.
일부러 무뚝뚝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상관없다. 이미 그와는 어느정도 통하는 듯하니. 이후의 임무는 어떻게 진행되는 거지?”
“……하. 그럴 리가? 그래도 이정도 당당한걸 보니…… 최소한의 인정은 받은 모양이군요. 원래라면 일주일 정도의 시간은 드리지만, 바로 가시죠. 고위 천족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성검의 말을 들어야하니까요.”
신경질적인 발소리가 홀로 문 밖으로 나선다.
그제서야 아렐리아는 애써 참아 왔던 웃음을 작게 터트린다.
“저 콧대 높은 가브리엘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네요.”
물론 그것도 제법 재밌는 구경거리이긴 했다.
하지만 그보다 설명에 적힌 숨겨진 임무라는 게 거슬린다.
그러려면 성검에게 9단계 이상의 인정을 받아야했다.
“어이, 에우로델. 다 듣고 있는 거 알고 있으니 말해 봐.”
[큼큼! 그대가…… 헛소리 지껄이면 당장 고철로 만들어 버리겠다 하지 않았나.]
“이것만큼은 헛소리가 아니지. 보아하니 확성기마냥 네 말을 들어볼 셈인가 본데……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잘 알고 있겠지?”
[당연하지. 맡겨만 주게.]
확고한 의지를 담은 든든한 대답이 들려온다.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