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SSS랭크로 귀환한 사연 178화
“[……정말 저를, 아니. 이 몸뚱이를 알아볼까요?]”
아렐리아는 긴가민가한 표정이다.
하지만 본인도 궁금하기는 했던지 곧 잔뜩 흥미생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방심했을 때 빈틈도 노릴 수 있겠고…… 일이 좀 더 수월해지겠네요. 뭐, 그래도 드래곤을 잡는다는 게 그렇게 쉬운 건 아니겠지만요.]”
누가 마족 아니랄까 봐, 그녀는 전투에 이득이 될 만한 냉철한 판단을 내린다.
이제는 슬슬 몸이 달아오르는지 안절부절하기까지 한다.
강자와의 전투를 앞둔 마족 특유의 호승심이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
이미 멀리 있는 드래곤의 포효 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하다.
전에 쥐어 팼던 레드 드래곤과는 차원이 다른 힘이 느껴졌다.
“우선 주변부터 샅샅이 뒤져 보지. 그 어린 거인족도 찾아야 하니까.”
“[아, 도루쿤이라는 이름을 가진 거인이었나요. 하여간 어린 개체들은 왜 이렇게 무모한지……]”
그녀는 투털거리며 내 어깨에 올라탄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 마법 주문을 웅얼거렸다.
곧 짙은 마기가 우리를 중심으로 넓게 퍼져 간다.
아마도 상대의 생명력을 탐지하는 마법인 듯했다.
“[……응?? 마왕님, 뭔가 이상한데요. 느껴지는 기운이 너무 많은 곳이 있어요.]”
아렐리아의 짧은 앞발이 어느 한 군데를 가리킨다.
한눈에 봐도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동굴이었다.
‘은신처로 삼기에 적절한 장소군.’
전대 거인왕의 말에 따르면 도루쿤은 드래곤 주변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릴 거라 예상했었다.
그렇다면 저 동굴만큼 만만한 곳은 없었을 터.
예상과 좀 다른 것이 있다면 그가 홀로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뜻을 같이하는 동료 몇을 모으는데 성공한 듯하다.
“간이 배밖으로 나온 놈들이 이리도 많았던가.”
대륙 끝으로 도망이나 칠 것이지, 그렇다면 어떻게든 목숨은 연명할 수 있었을 텐데.
딱 보니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상대는 무려 드래곤.
그것도 꽤나 오래 살아온 고룡인지 느껴지는 힘은 웬만한 차원계의 왕보다 강하다.
덤벼 봤자 개죽음 당할 것이 뻔했다.
“낯짝이나 구경해야겠군.”
우리는 빠르게 동굴 입구로 다가갔다.
과연 굳이 집중하지 않아도 개미떼마냥 바글바글한 마력들이 느껴진다.
애초에 숨을 마음도, 그럴 여유도 없어 보였다.
저벅저벅-
동굴에 발을 내딛자 조금씩 들리던 소음이 사라진다.
고요한 내부에는 내 발걸음 소리만 들려온다.
그쪽 상황은 안 봐도 훤했다.
“[다들 잔뜩 얼어붙었네요.]”
아렐리아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친다.
그러더니 익숙하게 주머니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렇게 그녀와 함께 빠르게 오 분쯤 갔을까.
점점 살기와 매서운 기세가 피부로도 느껴진다.
그래 봤자 전혀 위협적이지는 못했지만.
“여기군.”
긴 통로에 얼기설기 엮인 통나무들이 보인다.
어설픈 방어막이었다.
가볍게 부셔버리고 들어가자, 가려져 있던 거대한 공동이 보인다.
그곳에는 족히 수백은 되어 보이는 자들이 잔뜩 날이 선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에 엘프들? 응? 몬스터들도 있네요. 조합이 특이한데요?]”
그녀의 말대로 어디서 보지도 못한 조합이다.
이종족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지를 가지고 있는 오크 따위의 몬스터들도 섞여 있었다.
그러나 제각각 생김새와 다르게 꼴들은 비슷했다.
패잔병들.
그들을 보자마자 생각난 단어다.
하지만 고생이 많았는지 꼬질꼬질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눈빛은 하나같이 형형하다.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자들의 독기가 느껴졌다.
“……인간?”
긴 창을 꼬나 쥐고 있던 다크 엘프가 의아한듯 중얼거린다.
순식간에 주변은 술렁거리는 말들로 가득해졌다.
“드래곤이 변신한 모습은 아닐까요?”
“하지만 아무리 폴리모프해 봤자 눈과 머리색은 바꾸지 못해요. 보세요, 검은 머리카락인걸요? 오히려 마족에 가까워 보여요.”
“마기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생김새도 대륙의 인간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데…… 설마 차원 이동한 이방인?”
그들은 서로 온갖 추측을 내놓는다.
집단지성의 힘으로 그럴싸한 해답을 내놓을쯤, 나는 주위를 살피던 눈을 한곳으로 고정했다.
소란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는것마냥 벽에 기대어 있던 거구의 한 사내였다.
‘생김새를 보아하니 저자인가.’
까무잡잡한 피부에 흔치 않은 은빛 머리카락. 그리고 거인족 치고는 걱정될 정도로 작다던 키까지.
전대 거인왕에게 들었던 설명과 똑같았다.
물론 인간에 비하면 거대한 덩치지만, 그는 몇 미터는 기본으로 넘어가는 거인족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좀 우기면 바바리안 일족이라고 우길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자들을 헤치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내내 눈을 감고 있던 도루쿤이 슬쩍 눈을 뜬다.
“……넌 누구지.”
초록빛 눈동자에는 강인한 전사의 투지가 가득하다.
남은 거인족들을 지킨답시고 혼자 내려올 만큼 혈기왕성해 보였다.
“도루쿤이 저렇게 친절하게 말하다니, 신기하군. 보아하니 모르는 사이 같은데…….”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우리를 주목한다.
그러면서도 차마 가까이 오지 못하는걸 보니 도루쿤이 어지간히 성깔 부려 댔던 모양이었다.
심지어 대뜸 누구냐고 물어보는 대화도 친절하다고 할 정도라니.
지구에 있는 어느 길드장 생각나는 싹퉁머리였다.
“날 아나? 왠지 모르게 기운이 익숙한데. 이상하게 거인족의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는 한번 물꼬를 트니 궁금한 것투성인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이런저런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나는 첫만남에 통성명도 없이 자기 할말만 하는 대화에 어울려 줄 생각이 없었다.
그것도 저런 곱지 않은 말투라면 더더욱.
“널 아냐고? 물론. 아주 잘 알지.”
“뭐? 혹시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었던가?”
다급한 질문이 쏟아졌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저 입매를 비틀어 웃어 보일 뿐.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진한 미소를 봤는지, 아렐리아가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린다.
“[……우리 마왕님은 예의 없는 놈을 제일 싫어하는데.]”
부스럭거리면서 주머니에 있던 아렐리아가 튀어나온다.
곧 있을 상황을 대비해서 피신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우리를 구경하던 자들이 크게 경악한다.
“드, 드래곤!?”
“……그런데 좀 작지 않아? 헤츨링인데…….”
“아직 어려 보이긴 해도 광룡과 같은 종족이잖아!!”
각자 들고 있던 무기의 날카로운 끝은 나와 아렐리아를 향한다.
당장 싸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저쪽이야 전혀 위협스럽지도 않았기에 나는 여전히 도루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좋군. 거인족이라 그런가, 확실히 튼튼해 보이고. 몇 대 맞아도 죽지는 않겠어.”
“뜬금없이 그게 무슨-”
퍼어억!!!
평소보다 더 강한 마력을 두른 주먹을 내질렀다.
역시 느껴지는 손맛이 꽤나 묵직했다.
질긴 가죽안의 뼛속까지 단단한지 돌덩이를 때리는 기분이다.
하지만 돌은커녕 세상에서 제일 단단하다는 미스릴도 맨손으로 쪼개는 힘이다.
놈의 몸뚱이가 버틸 수는 없었다.
도루쿤은 저항없이 날아가 동굴 벽을 깊숙이 처박힌 지 오래였다.
후두둑-
떨어지는 돌의 잔해들이 그의 몸을 덮는다.
구경하던 자들은 입을 떡 벌리고 움직이지도 못한다.
“헉!! 도루쿤!!!”
“[역시……]”
나는 저 멀리 구석으로 나가떨어진 도루쿤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의 주먹질이었지만 실력은 녹슬지 않았는지 부러진 곳 하나 없어 보였다.
“예의 없는 새끼 같으니라고. 대체 어떤 천하의 쌍놈이 처음보는 사람에게 반말 찍찍 갈기더냐.”
힘없이 숙여진 머리통을 잡아채 들어올렸다.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초점 없는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본다.
“……대체 이 힘, 아니. 이 기운은……? 설마…….”
주륵, 검붉은 쌍코피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그는 닦을 겨를도 없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는 혼잣말만 중얼거린다.
“아냐, 그럴리가…….”
“고작 한 대 맞고 정신이 나간 건가.”
그 정도 약골로 보이지는 않았건만.
미간을 찌푸리며 한 대 더 때리기 위해 적당한 부위를 살피는데 놈이 대뜸 무릎을 꿇는다.
눈빛을 보아하니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느낌이었다.
“설마…… 도전자님이십니까? 거인왕의 기운도 느껴지는 게, 벌써 왕좌도 물려받으신 것 같고요.”
눈치 하나는 빠르군.
공손해진 태도에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잠자코 지켜보던 자들이 크게 동요한다.
“저분이 도루쿤이 말하던 구원자……?”
“정말로 이 땅을 구해 줄 인간이 나타났다고??”
쿵-쿠웅!!
사방에서 거친 소음이 들린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자들이 나를 경외감 가득한 눈동자로 쳐다보고 있었다.
몇명은 감동에 겨워 울먹이는 표정이었다.
“구원자님……!! 제발 저희를 광룡에게서 지켜 주세요!”
“이미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어요…….”
인간과 이종족들이 한데 섞여 같은 심정을 토로한다.
그 모습을 보던 아렐리아는 기분 나쁘다는 듯이 툴툴거린다.
“[누가보면 구원을 맡겨 놓은 줄 알겠어요. 염치도 없어라.]”
정작 염치없는 건 아렐리아가 아니었던가.
결국 이 사단도 알을 훔치라 사주해서 생긴 일이었다.
어이없는 눈초리로 쳐다보자 그래도 찔리기는 하는지 그녀가 뜨끔한다.
“[드래곤씩이나 되는 종족이 이깟 일로 미칠 거라 누가 예상했겠어요……그래도 저 때문에 귀찮은 일 생기게 해서 죄송해요.]”
결국 그녀는 순순히 사과한다.
나는 몸을 배배 꼬며 날아오는 그녀의 머리를 차분하게 쓰다듬었다.
“알면 되었다. 그래도 마족인 네 잘못은 마왕인 내가 책임져야겠지.”
수습하기에 아직 지나치게 늦진 않았다.
그리고 내게 그 정도 힘쯤은 있었고.
광룡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쯤.
갑자기 본능이 위험을 경고함과 동시에 오싹한 마력이 느껴진다.
[스킬:강렬한 직감이 발동합니다.-알 수 없는 위험이 다가옵니다.-]
여전히 뒷북 치고 있는 시스템 메시지를 치우자마자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거대한 동굴의 천장에서는 흙먼지와 돌가루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마왕님, 이건……]”
“그래. 왔군.”
분명 거리가 꽤나 떨어진 곳에 있던 것 같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방문할 만큼 급한 사정이 생긴 듯했다.
초대하지도 않은 손님의 등장.
그 손님의 정체를 짐작한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드래곤이다!!!!”
“우리 부족의 원수……!!!!”
죽음을 각오한 자들의 눈동자가 번뜩거린다.
하지만 나는 이 깊은 동굴을 수백 명의 무덤으로 만들 계획 따윈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재빨리 <거인계의 문> 스킬을 사용하자 옆에 있던 도루쿤이 크게 당황한다.
“설마, 다 함께 도망치실 생각이십니까?”
“도망은 맞다만, 다 함께는 아니지.”
나는 그의 뒷덜미를 휙 낚아채 차원문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러자 아렐리아가 눈치 빠르게 바람 마법을 일으켜 거대한 차원문 안으로 모두를 집어넣는다.
여유만 있다면 박수라도 쳐주고 싶을 만큼 상당히 깔끔한 솜씨였다.
“제법인데.”
“[이 짓도 몇 번 하다 보니 익숙해지네요.]”
그녀는 농담처럼 중얼거리며 위를 올려다본다.
단단한 동굴 천장은 이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크게 진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