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SSS랭크로 귀환한 사연 177화
거인왕의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물론 원하던 바이다.
어차피 진행해야 하는 퀘스트에 왕좌까지 덤으로 따라오는 셈이니.
그러나 동네 이장을 할 때에도 순서와 규칙 정도는 있는 법.
하물며 모든 거인족을 책임지는 한 차원계의 왕 자리이다.
기가막힌 타이밍도 그렇고, 일이 너무나 쉽게 풀리니 오히려 의심스럽다.
‘분명 뭔가 더 있을 텐데.’
순간, 거인왕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다 이해한다는 듯 따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도전자여, 고민스러운가.”
“당연히. 거인족도 분명 <예언>을 알고 있을 텐데?”
“아아. 인간이 왕이 된다는 그녀의 <예언>말이지. 물론 알고 있지. 그러니 그대에게 이 무거운 자리를 넘기려 하는 것이고.”
그동안 다른 종족들은 인간을 방해하려 애를 써왔다.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건 오직 거인족뿐.
사실 그것 자체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그래, 그대의 의심 먼저 풀어 주어야겠군. 도전자여,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우리는 인간의 왕을 기다려 왔다네. 이 차원계에서 벗어나지도 않은 채 묵묵히 오랜 시간을 보내왔지.”
“……확실히. 거인족이 다른 차원계에서 목격되었다는 소리조차 들은 적이 없어요. 그저 게을러서 그런 거라 생각했는데.”
아렐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친다.
그래도 게을러서라는 소리도 맞는 것 같긴 한데.
나는 주변에서 아직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거인족들을 보다, 다시금 거인왕에게 시선을 돌렸다.
“<예언>의 대상이 인간을 가리키는 건 별 다른 이유가 아니야. 그저 인간만이 자격이 된다는 소리지. 물론 타종족들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지만……우리는 다르네.”
그는 싱긋 웃으며 나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왕관을 들어올려 건네 준다.
거대한 왕관은 내 손끝이 닿자마자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사실 왕에 적합한 자인지 판단하는 임무도 따로 주어야 맞지만…… 그대가 오기 전에 신께서 오랜만에 말씀을 내려 주시더군.”
갑자기 얼굴이 가까이 들이밀어진다.
내내 인자한 미소를 짓던 그는 갑자기 장난스럽게 씨익 웃어 보였다.
“괜히 귀찮게 일 만들었다간, 차라리 거인족 모두를 멸망시키고 왕좌를 차지할 인간이라고. 기왕 줄 왕관이라면 순순히 넘기는 게 좋을 거라 하던데.“
신이 별 말을 다 하는군.
체통 챙길 여유 따윈 없던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니 여태껏 보아 왔던 신이라는 명함을 가진 작자들은 다 비슷했다.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미 넘치는 행동에 놀랄 지경이었으니.
아직 만나지 못한 거인신도 아마 비슷한 부류겠지.
‘어찌됐든 나야 좋은 일이지.’
나는 줄어든 왕관을 받아들였다.
자세히 살피니 장식없이 수수한데다가 재질도 무거운 돌이라 좀 이상한 생김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물건은 맞는지 시스템 메시지는 연달아 떠오른다.
[거인왕의 왕관[???]: 거인족의 왕이 된 자가 가질 수 있는 왕관. 깊은 땅에서 꺼내 올린 돌을 거인족들이 999일간 다듬어 만든 물건이다.
6개의 종족들이 가진 모든 왕관을 모은다면 신에 필적할 만한 힘을 얻게 된다고 한다. <보유한 왕관:5/6 요정왕의 왕관, 마왕의 왕관, 정령왕의 왕관, 수왕의 왕관, 거인왕의 왕관> ]
[위대한 업적! 인간의 몸으로 거인왕이 되는 믿을 수 없는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칭호 <거인왕>을 얻습니다.]
[<거인왕>: 모든 거인족의 든든한 울타리이자 지배자에게 주어지는 칭호입니다.
거인족의 존경+100% 힘 +200% 체력 +200% ]
[<퀘스트:왕의 길>이 갱신됩니다.]
[<왕의 길>-(5)
-요정계의 왕:달성
-마계의 왕:달성
-천족의 왕:미달성
-수인계의 왕:달성
-거인계의 왕:달성
-정령계의 왕:달성
]
이제 남은 왕의 자리는 딱 한 개인가.
분명 탑의 다음층은 천계일 터.
곧 이 퀘스트도 끝이 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축하드려요, 마왕님. 이제 거의 끝나가네요.”
아렐리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곁으로 다가온다.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걸 보니 진심으로 기뻐 보인다.
정작 거인왕이 된 나는 덤덤한데도.
그 모습이 재밌게 느껴져 피식 웃음이 나온다.
[스킬 <거인신의 가호[L]>를 얻습니다.]
[거인왕의 권한으로 거인계로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스킬 <거인계의 문>[L]을 얻습니다.]
<거인신의 가호[L]:일주일에 한번 끓어 넘치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시전 시 10분간 지속되며, 해당 스킬은 힘 스탯에 영향을 받습니다.>
이어서 제일 중요한 보상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른다.
애매한 설명이지만 거인신의 가호씩이나 되는 스킬이 그저 그런 효과를 보여 주지는 않을 것이다.
수인계에서 허탕친걸 상쇄할 만큼 꽤나 만족스러운 스킬이었다.
특히나 지금 내가 가진 힘 스탯도 거의 최고치인데, 여기서 가호 스킬까지 쓴다면 맨손으로 모든걸 파괴할 정도는 될 터였다.
“고맙네, 거인왕이여. 덕분에 편안히 쉴 수 있겠어.”
전대 거인왕은 후련한 표정으로 자세를 편하게 고친다.
하지만 만족스럽다는 표정도 잠시.
곧 그는 수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혹시 떠나기 전에 하나 더 부탁해도 되겠는가.”
대체 뭘 말하려고 저렇게 뜸들이는 건지.
일단 들어나 보자 싶어 그를 쳐다보았다.
“어린 거인족 중에 광룡을 처치하겠다며 떠나간 아이가 있다네. 이름은 도루쿤라고 하네. 분명 그의 주변에서 머무르고 있을 텐데…… 찾는다면 거인계로 데려와 주면 좋겠어.”
게을러터진 거인족들 사이에서도 그런 돌연변이 하나쯤은 존재했던가.
그쯤이야 별 큰 부탁도 아니었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그는 안도한 얼굴로 말을 잇는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도루쿤은 지난 오백 년간 태어난 거인족 중 제일 몸집은 작지만 차기 거인왕으로 불릴 정도로 대단한 아이야. 분명 자네에게도 도움이 될걸세.”
보기보다 세심한 성격인지 그는 이런저런 설명을 이어한다.
거인계에 대한 이야기와 광룡에 대한 정보를 다 들으니 재차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위험에 빠진 거인족>-1:거인왕을 찾으세요.(완료)]
[<위험에 빠진 거인족>-2:거인계를 위협하는 광룡, 에우로델을 처치하세요. *보조 임무: 거인족 도루쿤을 구출하기.]
퀘스트가 갱신되었으니 이제 거인계에서의 할 일은 모두 마쳤다.
지체할 시간은 없었기에 나는 그가 일러 준 대로 리카 대륙으로 통하는 입구로 향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잘 부탁하네. 짧은 만남이지만 즐거웠네. 그대라면 믿고 맡길 수 있겠군. 과연 소문대로야.”
대체 어떤 소문이 차원계에 퍼지고 있는 거지.
거인신의 대뜸 굽히고 들어오는 반응도 그렇고.
다른 건 모르겠지만 소문의 진원지만은 확실했다.
분명히 장난기 많은 마신일 것이다.
“빠르게 돌아오지. 그 도루쿤이라는 거인족도 함께.”
간단한 작별인사와 함께 우리는 거대한 돌산에서 벗어났다.
아렐리아가 미리 파악해 놓은 좌표로 텔레포트를 사용하자, 눈 앞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보인다.
리카 대륙과 이어져 있는 통로였다.
“미리 이야기했지만, 위험하다 싶으면 도망쳐.”
“[마계로 귀환하란 명령 말씀이시죠. 확실하게 지킬게요.]”
자신만만한 대답이다.
하지만 이미 혀까지 깨문 전적이 있기에 영 미덥지는 못했다.
그때에는 반드시 강제로라도 소환을 해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녀와 함께 구덩이에 몸을 던졌다.
* * *
도착하자마자 보인 풍경은 거인계보다 삭막하다.
이미 광룡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인지 주변은 아무것도 없는 폐허에 가까웠다.
“전에 왔을 때에는 이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과거의 모습을 기억하는 아렐리아는 씁쓸하게 중얼거린다.
그 와중에 한번 왔던 대륙이라.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에 나는 그녀를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아, 말씀드린 적 없었나. 한 삼백 년 전쯤인가. 전에 저의 계약자가 리카 대륙의 인간이었거든요. 욕심 내던 것도 얻었고. 꽤 재밌는 계약이었어요.”
웬만한 재물에는 눈 깜짝하지 않는 그녀다.
그저 집에서 다큐멘터리나 틀어 주면 행복해하는 성격을 잘 알기에, 자연스레 얻었다는 물건이 궁금해졌다.
“계약에 걸린 물건이 뭐였지?”
“마왕님도 잘 아실 텐데요. 이거요.”
퐁-
그녀는 대뜸 드래곤으로 변신한다.
검은 비늘이 빛나는 작은 헤츨링의 형태는 여전히 위압적이기보다는 애완동물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 보신 검은 알 기억하세요? 전 계약자가 마침 드래곤의 레어에 들락거릴 만큼 신임받고 있기에, 훔쳐오라고 했죠. 대신 왕국을 일으켜 세울 만큼 강력한 힘을 원한다나?]”
무려 드래곤에게서 알을 훔친 건가.
만나지도 못한 계약자 놈은 어지간히 담이 큰 인간이었던 모양이다.
“[당연히 분노한 드래곤의 화를 입었고, 애써 세운 왕국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는데?]”
재잘거리던 그녀가 멈칫한다.
무언가 중요한 것이 떠오른 얼굴이었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설마 알을 훔친 드래곤이 그 광룡 에우로델이냐.”
“[그, 그런 이름인지까지는 모르겠는데…… 아니, 그 드래곤이 아닐 수도 있지 않나요?]”
물론 아렐리아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넘기기엔, 드래곤은 지금 발 밑에 깔려 있는 잡초마냥 널려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뜬금없이 미쳐버린 광룡은 더더욱 흔치 않을 테고.
“네가 알을 훔쳐서 미쳐 버린 거겠군.”
타이밍과 사건의 원인.
모든 것이 딱 맞아떨어진다.
아렐리아 역시 더이상 발뺌하기 힘든지 날갯짓에 힘이 없다.
“[그래도…… 고작 보호하고 있던 알 때문에 그렇게까지 된 건 이상해요. 그냥 화 좀 내고 말 줄 알았는데…… 드래곤은 본래 차원의 틈에서 태어나는 존재잖아요. 본인이 낳은 것도 아닌데 모성애같은 절실한 감정이 있을 리가 없어요.]”
“여러가지겠지. 하필 믿고 있던 인간의 배신도 그렇고.”
크아아아-!!!
때마침 멀지 않은 곳에서 드래곤의 울부짖음이 들려온다.
“직접 찾는 수고는 덜었나.”
“[앗, 드디어 전투인가요. 그럼 저도 변신을 풀-]”
“아니. 아직은 헤츨링의 모습으로 있어.”
“[……예?]”
아무리 광룡이라지만 설마 본인이 보호하던 드래곤도 못 알아 볼까.
다시 아렐리아를 알 속으로 집어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시도해 볼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생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