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SSS랭크로 귀환한 사연 176화
[<위험에 빠진 거인족>-1: 거인왕을 찾으세요.]
“거인족이 위험에 빠졌다라…… 이번 퀘스트는 좀 특이하군.”
탑을 통과하자마자 보인 풍경도 이상하다.
잿빛 하늘과 검은 돌덩이들이 가득한 이곳.
눈앞에 넓게 펼쳐져 있는 거친 황무지는 아무리 봐도 거인계 그 자체였다.
<검은 탑>으로 입장할 경우, 보통은 막혀 있는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과는 달랐다.
“[거인족들이 탑의 임무를 제공할 상황이 안 되나 보네요?]”
주머니가 잠깐 꿈틀거리더니 아렐리아가 튀어나온다.
동그란 눈은 잔뜩 찡그려져 있어, 불쾌함이 여과없이 드러나 있었다.
마계와는 다른 낯선 마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다.
“짐작가는 거라도 있나?”
“[글쎄요. 거인계는 워낙 교류가 없는 곳이라…… 아, 전에 마계에 있던 붉은 탑 기억하세요? 원래라면 각 차원계에 있는 <탑>안에서 특정 임무를 진행하게 돼요. 하지만 해당 종족이 도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건이 생겼을 경우에는……]”
“기존의 임무가 변경된다는 거겠군.”
“[정확해요. 이 경우에는 거인왕에게 피치못할 사정이 생겼겠죠.]”
전의 수인계와 비슷한 상황이다.
그때도 임무를 내려 줘야 할 수인왕이 공석이었기에, 자연스럽게 파렌을 돕는 퀘스트로 변했었다.
지금의 거인계도 그만큼 큰 사건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거인족을 찾아야 한다는 소린데…….’
명칭에 걸맞게 거인족은 웬만한 이삼 층 건물 크기는 기본이었다.
더 큰 객체들은 마치 움직이는 산을 마주하는 착각이 들 정도라고.
그 정도면 분명 쉽게 발견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주변은 아무리 둘러봐도 무채색으로 가득하다.
기껏 해 봐야 있는 거라곤 여기저기 야트막하게 쌓여 있는 돌더미들뿐.
“설마 시스템이 첫 시작점을 허허벌판으로 잡아 놓았나.”
“[제가 봐도 이상해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아렐리아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린다.
본인이 생각해도 난감하다 싶은 표정이었다.
와락 얼굴을 구기고 우선 앞으로 나아갔다.
차라리 저 멀리 보이는 까마득히 높은 산쯤 가면 뭐라도 있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너무 조용한데.”
와그작, 이름모를 돌들이 밟히는 소리밖에 나지 않는다.
이렇게 고요할 수가 있을까.
아무리 봐도 이상한 광경이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기감을 널리 퍼트려보았다.
“……흐음?”
꿈틀, 작은 움직임이 느껴진다.
분명 눈 씻고 쳐다봐도 주위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생명체 특유의 마나의 흐름이 확실히 읽힌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닌데다 바로 주변이었다.
“여기 설마…….”
“[마왕님, 왜 멈춰 서세요?]”
발걸음을 멈추자 아렐리아는 어리둥절한 얼굴이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약간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정령신의 가호>”
[<정령신의 가호>를 발동합니다. 효과를 골라 주세요.(지진/홍수/폭풍/용암)]
효과는 폭풍으로, 그러나 소모되는 마나는 아주 적게.
스킬을 발동하자마자 내 몸 주위로 작은 바람이 몰아친다.
파괴력은 없으나 발 밑의 무수히 많은 돌덩이를 치워 낼 정도로는 충분했다.
와르르!!!!!!
주먹만 한 돌부터 몸뚱이만 한 바위까지 모두 폭풍에 밀려난다.
치워진 물체들이 하나의 산을 이룰 때쯤.
바닥 쪽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우우…… 너무 밝…… 아.”
“아직 잠…… 을 자야 하는데…….”
걷어낸 검은 돌들 사이.
마치 동면을 취하는 것마냥 잠들어 있던 거인족들이 꿈틀거린다.
그들은 비몽사몽하며 서서히 거대한 몸을 일으킨다.
꿈뻑거리는 눈에는 아직도 졸음이 묻어 있었다.
“[엑!? 우리가 밟고 다녔던 게 전부 거인족?]”
아렐리아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날아오른다.
그러자 붉은 머리의 거인족 하나의 눈동자가 조그마한 그녀를 향한다.
“벌…… 레?”
하도 덩치가 크니 강아지만 한 아렐리아는 그렇게 보이는 건가.
그녀는 기분이 확 상한 듯 마기를 끌어올린다.
“[무식한 거인족 주제에……<다크 스피어>!]”
쾅!!
그저 한 방 먹이기 위함이었는지 공격에 살기는 없었다.
하지만 피부 두껍기로 소문난 거인족조차 정신이 번쩍 들 만한 수준은 되었다.
“으윽. 따가워…….”
덕분에 남들보다 더 빨리 잠에서 깰 수 있던 녀석은 우리를 향해 서서히 고개를 내린다.
그리고 계속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곧 눈은 놀란 토끼마냥 크게 뜨였다.
“인…… 간?”
“오냐.”
나는 가볍게 웃으며 여유롭게 대꾸했다.
그러자 그는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로 나를 살펴본다.
덩치만 컸지 순진한 어린아이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인간을 싫어하다 못해 혐오하는 타종족과는 반응부터 달랐다.
‘거인족은 침략전쟁을 하지 않았다고 했던가.’
물론 거인계와 연결된 리카 대륙도 망해가고 있는 건 비슷하다.
하지만 그 이유는 다른 차원의 대륙들과 많이 달랐다.
리카에서 온 귀환자의 말에 따르면, 거인족은 코빼기도 구경할 수 없었다고 한다.
다만 어디서 튀어 나온지도 모를 정신나간 마법사 하나가 온 대륙을 휩쓸고 다녔다고.
정말 제대로 미친 놈이라 대화는커녕, 지나간 길에는 풀 한 포기 남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때는 녀석의 낯짝이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지만 귀환한 이상 이미 이삼백 년도 지난 일.
아무리 초월자라도 인간인 이상 백골로 돌아간 지 오래일 터였다.
‘한번 붙어 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설마…… 도…… 전자……?”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녀석의 느릿한 말이 이어진다.
인간 구경은 이미 끝났나 싶을쯤.
하나둘 몸을 일으키던 거인족들이 술렁인다.
“뭐…… 인간 도전자…… 라고?”
“어디…… 응? 옆에는 파리가…… 허억……!!”
쿵쿵거리며 다가오던 작은 거인족 하나가 다가오더니 경기를 일으킨다.
바들거리며 손가락질까지 하는데, 그 끄트머리는 아렐리아를 가리키고 있었다.
“드래곤이야……! 작은 드래곤!”
“뭐어……!? 날벌레……아니고……?”
순식간에 거인족들이 흩어진다.
신기하다며 다가올 때는 언제고, 지금은 누가 봐도 공포에 질린 모습이었다.
졸지에 3연속 벌레 취급을 받아 버린 아렐리아는 당연스럽게도 기분이 저조해졌다.
“[얘네 대체 왜 이러는걸까요.]”
그러게나 말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슬그머니 그녀의 곁에서 멀어졌다.
그러자 거인족들이 내 뒤로 옹기종기 모여든다.
마치 자신들을 아렐리아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듯한 몸짓이었다.
얼굴도 잔뜩 울상으로 변한 지 오래.
덩치 값 못하는 그 모습에 아렐리아는 작은 미간을 구기고 으르렁거린다.
“드래곤…… 무서워…….”
그래 봤자 거인족 기준으로 손톱만 한 작은 헤츨링일 텐데 이렇게 공포에 질리다니.
사실 가진 힘으로 따지자면 나를 무서워하는 게 당연할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어디서 드래곤에게 단체로 삥이라도 뜯긴 건가.’
일단 이래서는 대화조차 불가능한 상태다.
아렐리아에게 더 멀리 가라는 눈짓을 보내자, 투덜거리며 어디론가 날아갔다.
그제서야 거인족들은 눈에 띄게 안도하며 주저앉는다.
“인간 도전자…… 고맙다…… 드래곤은 너무 무섭다…….”
할 이야기가 길어질 듯하다.
주변의 돌덩이에 걸터앉자 거인족 몇 명이 가까이 다가온다.
경계라고는 조금도 없는 모습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드래곤을 두려워하지?”
“드래곤…… 우리를 다 죽이려고 한다. 인간도, 몬스터도…… 모두다.”
“리카는 이미 멸망하고 있다…… 남은 건 거인계…… 그래서 숨어서 잠들어 있었다. 모든 게 끝날 때까지.”
느릿느릿한 말이 속 터지지만 이해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웬 미친 드래곤이 나타나 대륙을 멸망시키고, 연결된 거인계까지 노리고 있다는 것.
그런데 듣자마자 비슷한 일이 떠오른다.
바로 리카 대륙을 뒤흔들었다던 미친 마법사였다.
‘설마 그 마법사가 드래곤인가.’
가늠조차 할 수 없다던 막강한 힘.
그리고 파괴만을 일삼는 미쳐버린 존재.
다른 경우의 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게 맞아떨어진다.
“인간 도전자…… 발견하면 왕이 데려오라고 했다…… 같이 가자…….”
거인족 하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민다.
손바닥으로 올라오라는 뜻이었다.
퀘스트를 진행하려면 무조건 거인왕을 찾아야했기에, 나는 주저없이 훌쩍 몸을 날렸다.
살갗 치고는 바위마냥 딱딱한 손바닥에 올라서자 그들은 단체로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한다.
“마왕님~~이야기는 다 끝난 건가요?”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던 아렐리아가 슬그머니 내 옆에 선다.
눈치껏 드래곤 형태에서 벗어나 마족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왕에게 데려다준다더군.”
“마침 잘되었네요. 퀘스트 말고도 목적이 있으시잖아요?”
그녀는 섬뜩하게 웃으며 목에 손을 긋는 시늉을 한다.
물론 거인왕의 자리도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탑 공략 그 자체.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 왕을 대뜸 죽일 수는 없었다.
‘상황이 복잡하게 굴러가는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
우리는 어느새 멀리서 보이던 검은 산 중턱까지 도달했다.
언제쯤 도착하나 싶을쯤 나를 태운 거인족이 어느 돌더미 앞에 멈춰 선다.
“왕…… 도전자 데려왔다…….”
“……드디어.”
쿠쿠쿠쿵!!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산이 몸을 일으킨다.
아니, 산만큼 거대한 거인족인가.
올려다보기도 힘들만큼 커다란 덩치가 자연스럽게 손바닥을 내민다.
말없이 그곳에 올라타자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인간 도전자여, 환영하네.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네. 그대의 소문은 여기까지 들려올 만큼 아주 대단했으니까.”
왕이라더니 느릿느릿한 다른 거인족과는 말투가 다르다.
그는 굉장히 공손한 태도로 인사를 건네왔다.
“나도 이야기는 대충 들었다. 거인족이 드래곤때문에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지.”
“맞다네. 어느정도 알고 있다니 대화가 빠르겠군.”
그는 집채만 한 입술로 씨익 웃는다.
하지만 미소 짓는 얼굴은 왜인지 모르게 괴로워 보인다.
의아하게 쳐다보자, 거인왕은 천천히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죽어 가고 있다네. 정확히는 노화로 인한 자연스러운 죽음이지. 하지만 내가 죽는다면 이 어린 아이들을 지킬 자가 없어. 이미 어른 거인족들은 드래곤과의 싸움에서 전사했으니까.”
쓸쓸한 눈빛이 주위에 모여 있는 거인족들을 한바퀴 둘러본다.
어린 것 치고는 하나같이 듬직한 체구였지만, 확실히 거인왕보다는 작은 개체들이다.
“도전자여,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겠나. 부디 드래곤을 처치하고 거인계를 지켜 주게. 만약 그래 준다면…….”
거인왕은 천천히 무릎을 꿇고 한쪽 손을 올린다.
그리고는 머리 위에 있던 커다란 왕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기꺼이 이 왕관을 바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