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SSS랭크로 귀환한 사연 174화
……방법이 있긴 있다고?
나는 유전자 조작실험을 당한 서채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헤르멘의 대답은 단호했다.
하지만 그는 더 설명을 요구하는 내 시선에도 입을 꾹 다문다.
말해주지 않겠다는 것보다는 차마 말할 수 없다는 기색이 강했다.
“난 반드시 그곳에 가야 해.”
주저하는 그에게 다시한번 강조했다.
그러자 헤르멘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눈을 꾹 감는다.
“……어차피 그대는 <별의 무덤>에 당도하게 될 거야. 그곳은…… <검은 탑>과 연결되어-”
쾅!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순식간에 벼락이 내려친다.
익히 보던 <세계의 율법>을 누설한 자에게 내려지는 패널티였다.
그에게서 느껴지던 강력한 마나는 어느새 반절 가까이 줄어든 상태였다.
“예상했지만 역시 꽤 아픈데.”
헤르멘은 담담하게 중얼거리며 손바닥을 심장 부근에 가져다댄다.
안 그래도 하얗던 얼굴은 툭 치면 쓰러질 듯 창백해 보였다.
“……고맙군.”
모든 걸 각오하고 말해 준 헤르멘 덕분에 원하는 정보는 얻었다지만, 왜인지 모르게 씁쓸하다.
잔뜩 인상을 구기고 있자 쓸데없이 위로하는 말이 들려온다.
“나는 괜찮으니 걱정 말게. 다만 오랜만에 본체의 모습으로 휴식을 잠깐 취해야겠어. 차원이동도 지금은 부담되니 웬만하면 지구에서 머물고 싶은데…… 특히나 자연의 마나가 풍부한 곳에 말이야.”
싱긋 웃는 얼굴에 음흉해 보이는 눈빛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이 말은 결국 제주도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싶다는 소리였다.
‘마나 절반을 털리고도 저 정도 요구만 하다니.’
욕심 많기로 유명한 드래곤치고는 꿈이 소박하다.
이쯤 되면 다른 곳에서도 호구소리 듣기 딱 좋았다.
나는 그에게 한동안 아스티란보다 더 냉혹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설명했다.
특히나 보증을 서달라는 부탁 따위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 브레스를 쏴서 내쫓으라는 말을 강조라면서.
“재물 따위는 인간을 위해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지만…… 일단은 알겠네.”
그는 어린아이마냥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앞으로의 행복을 꿈꾸며 반짝이는 눈동자는 영 믿음직스럽지 못했지만.
“그럼, 나는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야 하니 이만 떠나겠네. 작별 인사는…… 짧은 게 좋겠어. 그대라면 분명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고 당당히 다시 돌아올 테니까.”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헤르멘은 나를 향해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리고 텔레포트를 준비하며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부디 원하는대로 선택하길.”
뜻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그가 떠나간 빈 자리를 지켜보다, 묵묵히 곁을 지키던 아렐리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또다시 탑 등반이겠군.”
이놈의 탑은 좀 쉬엄쉬엄할 기회 따윈 주지 않는다.
심지어 이제부터는 지구에 돌아올 시간조차 아깝게 느껴질 터.
여러모로 준비할 것이 많았다.
“……제가 함께할게요.”
아렐리아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고요히 나를 마주한다.
나는 피식 웃으며 다시금 그녀의 머리를 헤집어 놓았다.
* * *
먼 여정을 떠나기 전.
아렐리아는 잠시 마계에 다녀온다며 곁을 비웠다.
나 역시도 나머지 준비를 위해 버릇처럼 헌터 협회에 방문했다.
이미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기에 게이트 폭주 사건은 거의 안정이 된 상태.
덕분에 이후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협회는 상당히 북적였다.
“저쪽 좀 보세요. 용병왕님 아닌가요?”
“와…… 정말이네요. 그 영상만 몇백 번 돌려봤는데 직접 보니 실물이 더…….”
도착하자마자 나를 알아본 헌터들이 쑥덕거린다.
이런 반응이 한두 번은 아니라지만, 오늘따라 좀 다르다.
평소에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더 강했다면 지금은 그보다 더 존경과 호기심이 잔뜩 섞인 느낌이었다.
“헉! 빨리 눈 내리 까세요!”
물론 트집이라도 잡힐까 봐 눈도 못 마주치는 건 비슷하다.
순식간에 앞을 가로막던 헌터들이 썰물처럼 밀려난다.
나는 그들 사이를 지나 로비 중앙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역시. 로비가 이상하게도 갑자기 조용해진다 싶었더니.”
엘리베이터로 향하기 직전, 많이 듣던 목소리가 들린다.
뒤를 돌아보자 차은진이 여전히 구김 하나 없는 셔츠를 걸친 채 싱긋 웃고 있었다.
“버림받은 땅 이야기는 정보원을 통해 들었습니다. 아주 말끔하게 정리했다던데…… 그곳은 지금 갑자기 나타난 금발 청년때문에 난리라죠?”
그녀는 내 옆에 바짝 붙어 소근거린다.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보아하니, 무법지대의 상황에 상당히 관심이 가득한 듯하다.
“그리고 그의 부하를 자처하는 고위 마법사라…… 어디서 나타난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만큼은 저희의 정보망에도 걸리지 않더군요. 기회가 되면 저와도 만남을 주선해주시지 않겠어요?”
“글쎄. 딱히 상관은 없다지만 그가 싫어할 것 같군.”
크레아시론의 성격에 차은진과 만나면 분명 질색할 게 뻔하다.
과거의 일 탓인지, 그는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말해도 그녀라면 무조건 한 번 이상은 접촉할 것이다.
하다못해 우연을 빙자해서라도.
‘조심하라고 일러둬야겠군.’
“어머, 저희를 막으려고 하시는군요.”
전부터 생각했지만 이 여자는 눈치 하나는 정말 끝내준단 말이지.
속내를 읽힌 내가 바로 눈살을 찌푸리자 그녀는 입가에 손을 살풋 가져다대며 진한 미소를 띄운다.
“그래도 앞으로의 이야기를 들어 보시면 마음이 바뀌실 겁니다. 장담하죠.”
“서채아의 일 때문에 전에는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았지만 그건 일시적인 동맹일 뿐 아니던가.”
“일시적인 건지, 장기적일 건지는 추후에 따져 보세요.”
차은진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최상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박신우 지부장의 사무실이 있는 곳이었다.
“우선 같이 가시죠. 모두가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기다린다는 말은 그렇다 치더라도, 자연스러운 동행이 신경쓰인다.
그러고보니 우연처럼 차은진이 나타날 리는 없었을 터.
아마 슬슬 이쯤이면 내가 협회에 올 것이라 생각하고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모두라, 그래. 나 역시 할 말이 있던 차였으니 좋군.”
그녀가 ‘모두’라고 지칭할 만한 인물들은 몇 없다.
차은진이 교묘하게 깔아 놓은 판이었지만 나도 그들을 만나려던 참이다.
어찌되었든 간에 나에게는 여러모로 이득인 일이기에 말없이 앞장섰다.
벌컥-
“형님!!!”
“진 님 오셨네요!”
“드디어 오셨군요. 천상 길드장님, 모시고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자유 길드만 오면 되겠군요.”
“거긴 허구한날 지각이야…….”
문을 여니 역시나 아는 얼굴들이 잔뜩이다.
예상처럼 꽤 오래 대기했는지 테이블에는 다 식은 찻잔이 널브러져 있었다.
“형님 오늘은, 아니 평소에도 주로 그러셨지. 여튼 주인공이시니 이쪽으로 앉으시죠.”
박민호는 오두방정을 떨며 나를 상석으로 이끈다.
나이도 어느 정도 먹은 놈이 언제쯤 차분해질런지.
여전히 철없는 태도지만 오늘따라 더욱 붕 뜬 모습이 가관이다.
“……진 님, 최근 일은 어느정도 들었습니다. 저도 시간이 있었다면 당연히 따라갔을 텐데 아쉽군요.”
앉자마자 강준하도 한마디 건넨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무뚝뚝한 목소리는 살짝 격양되어 있다.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귀 끝은 살짝 빨갛게 물들어 있다.
그가 극도로 기분이 좋을 때만 나타나는 반응이었다.
‘이놈들이 단체로 약을 처먹었나.’
찻물에 이상한 약이 타져 있던 건가.
평소보다 훨씬 들 떠있는 행동들이 이상했다.
가만 보니 각 길드의 길드장과 부길드장들 역시 반응이 묘하다.
당장 무슨 속셈들이냐고 윽박지르려는 그때.
다시금 문이 열리더니 두 명의 헌터가 들어온다.
“아이고, 역시 다 모여 계셨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우리 길드장님이 또 잠깐 말없이 사라져서 찾느라…….”
“난 분명히 낮잠 자러 간다 이야기했는데 갑자기 스케쥴 잡- 뭐야? 이 표정들은.”
눈치 없기로는 대적할 자가 없는 홍현민조차 이상한 기류를 느끼고 흠칫한다.
그리고 자리도 앉기 전에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바로 뒷걸음칠 준비를 했다.
“나, 나는 없어도 될 것 같은…….”
“물론 우리 길드장님은 없어도 되지만, 그래도 어렵게 만든 자리니까요. 일단 들어오시죠? 우린 여기 앉으면 되겠네요!”
쾅-
자유길드의 부길드장에 의해 문이 닫힌다.
퇴로는 완벽히 차단된 상태였다.
홍현민이 어쩔 수 없이 똥 씹은 얼굴로 의자에 앉는다.
“그래서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아레스, 자유, 천상, 나비, 주몽 길드.
그리고 그림자 길드까지.
국내를 쥐락펴락한다는 단체의 길드장과 부길드장들이 공식적인 자리도 아닌데 모여 있다.
그것도 한껏 무언가를 기대하는 얼굴들이었다.
아, 저 궁시렁거리는 한 놈은 빼고.
“진 헌터님, 모두를 대표해 제가 말하겠습니다.”
박신우는 한껏 진지하게 무게를 잡는다.
하지만 곧 튀어나온 말은 개소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진 헌터님. 부디 국내 길드 연합인 <대한>의 대표자리를 맡아 주시길 바랍니다.”
“……X발. 뭐라고?”
이놈이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지.
뜬금없이 길드의 연합이라고?
5대 길드들이 눈에 불을 키고 경쟁하고 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말이 좋아 연합이지, 하나로 뭉쳐 활동하면 과거만큼 이득을 챙기지 못할 터.
가지고 있는 것이 많은 그들이기에 포기해야 할 것도 너무나 많았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당혹감에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모두 담담한 표정이다.
‘미리 짠 건가.’
“우리가 대항하려는 세력은 한 길드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라는걸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저희를 규합할 만한 단체가 필요합니다.”
박신우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 간다.
하지만 이 미쳐 돌아가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든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뭐……뭐?? 길드 연합이라고???? 잠깐, 세하 형!! 형은 미리 알고 있었던 거야!??”
“네. 수인계에 가시기 전부터 나오던 말이니까요.”
“그렇게 오래전부터?? 왜 나에게는 감춘 거야!?”
“이렇게 될 걸 알았으니까요. 흐음, 뭐. 사실 길드장님이 반대해 봤자 바뀌지도 않을 계획이었지만.”
벌게진 얼굴로 홍현민은 연신 김세하에게 삿대질을 한다.
하지만 그는 태연하게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아, 물론 자유 길드의 입장은 바뀌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시고요.”
“혀어엉!? 길드장은 난데?”
“그래그래. 우리 자유 길드장님, 나가서 이야기할까요?”
저기 길드도 어지간히 개판이군.
시끌벅적한 놈이 나가자 다시 사무실은 고요해진다.
스무 명이 넘는 시선은 오로지 나를 향한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지금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