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SSS랭크로 귀환한 사연 173화
콰직-!
차원문이 완전히 닫히는 순간, 마무리 작업도 끝이 났다.
이제 용언으로 만들어진 힘은 더이상 아렐리아의 몸에 붙어 있지 않는다.
그녀의 몸을 천천히 눕히고 상태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피해는 크지 않군.’
이미 기절해 버린 얼굴은 창백하지만 치명상은 피했다.
피와 함께 마나를 빼앗겼지만 이정도야 충분히 휴식을 가지면 금방 돌아올 수 있겠지.
그래도 피투성이인 모습이 영 보기에 좋지는 않다.
나는 잔뜩 꺼내 놓은 물약들 중 제일 등급이 높은 것을 잡아들었다.
퐁-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물약병이 열린다.
내용물을 몸 이곳저곳에 뿌렸다.
특히나 입 안쪽을 집중적으로 부어 주자, 낯빛이 눈에 띄게 좋아진다.
하지만 썩 만족할 만한 효과는 아니었다.
성수가 들어 있는 포션을 쓴다면 확실히 효과가 좋았을 텐데.
하지만 아렐리아가 마족인 이상 어쩔 수 없다.
이 상태에서 천신이 직접 축복을 내렸다는 성수를 뿌렸다간 한방에 마신 곁으로 가 버릴 테니.
“으으…….”
그래도 정신을 차릴 만한 수준은 되는지 아렐리아는 작은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익숙한 보랏빛 눈동자는 간신히 나를 향해 초점을 맞춘다.
꿈인지 생시인지 아직은 어리바리해 보이는 눈빛이다.
하지만 곧 투명한 시선에는 복잡한 감정이 진득하게 담긴다.
죄책감, 무력한 자신에 대한 증오.
아렐리아의 눈가는 또다시 축축하게 젖어 간다.
주저없이 혀를 깨물만큼 내 발목을 잡는 행동을 싫어했기에, 당연히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왜 저를 살리셨어요. 렌이 그토록 원하던 실험체예요. 분명 서채아로 완성하지 못한 실험을 다시 진행할 거예요.”
그리고 그 실험은 헌터들을 포함한 나에게 좋지 않은 작용을 할 테고.
아니, 더 나아가 인류 자체를 위협할 만한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갖은 개고생을 하면서 데려갔으니, 뽕을 뽑을 만큼 써먹어야 성에 찰 테니까.
“저 때문에…….”
그녀는 말꼬리를 흐리며 결국 고개를 푹 숙인다.
나를 위해 죽었어야 하는데.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생각하는 바가 잘 느껴진다.
“아니. 너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굳이 말하자면 나의 이기심이 문제였다.
세상 전체를 등져도, 나는 내 동료들만 살아남으면 아무래도 좋다는 놈이었으니까.
‘지구의 평화? 개소리지.’
맡겨 놓은 것도 아니고 그 따위 것을 위해 나와 주변을 희생시킬 필요는 없다.
나는 오랜만에 그녀의 머리카락을 잔뜩 헤집어 놓았다.
어린 아렐리아에게도 몇 번씩이나 해 줬던 행동이었다.
“나를 믿지 않는 건가? 렌이 만반의 준비를 해와도 나에게는 어림없는 소리야.”
“마왕님…….”
“그만. 계속 땅만 파고 있을 건 아니겠지?”
언제까지 여기서 구시렁거릴 생각은 없다.
나는 그녀에게 마나와 체력을 회복할 포션을 몇개 던져 주고, 주변에 있던 바위덩어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분명 별이 무수히 많은 공간이었는데.’
내가 차원계 박사쯤 되는 건 아니라지만, 그래도 들어본 정보는 꽤나 많았다.
하지만 아까 얼핏 살펴본 차원계는 생각지도 못한 풍경이었다.
마치 우주 한복판에 차원문이 열렸나 착각할 정도였으니.
그래도 생판 모르는 곳에 대해 작은 정보조차 없다며 좌절할 필요는 없었다.
‘그 도마뱀새끼…….’
다시금 드래곤이 서채아를 냅다 들고 튀려던 장면이 기억난다.
그때도 놈의 눈알에는 내가 박아 넣은 검이 장신구마냥 덜렁 매달려 있는 상태였다.
물론 그 급박한 상황에서 검이고 나발이고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었다는 건 잘 안다.
하지만 그게 어떤 물건인지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더라면 그 따위 멍청한 일은 하지 않았을 터였다.
“폭렬의 페르아렌.”
나는 오랜만에 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마력을 조금 꺼내 올리자, 눈앞에는 예전에 자주 보았던 시스템메시지가 올라온다.
[폭렬의 페르아렌[L급]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추적, 복귀, 속성 부여……]
페르아렌이 내 애검이 된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검 자체에 있는 기능들 때문이었다.
전투에 도움이 되는 스킬은 물론이고 자질구레한 효과도 여럿 있었다.
[……세탁까지 36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그래도 세탁은 선 넘었다고 생각하지만.’
이쯤 되면 검이 아니라 만능 도구에 가까웠다.
고대의 유물이라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작자가 유난히도 게을렀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추적>을 사용한다.”
[폭렬의 페르아렌이 있는 위치를 <추적>합니다.]
[검색 중……]
혹시나 다른 차원이라 안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만능 페르아렌에게 불가능이란 없었다.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다시금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에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추적>완료. 현재 폭렬의 페르아렌은 차원계:<별의 무덤>에 있습니다.]
별의 무덤이라고?
난생 처음 들어보는 차원계의 이름이다.
하지만 드래곤이 피신처로 삼을 만한 장소이니 누구나 아는 곳이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지도.
우선 나는 <별의 무덤>에 대해 물을 만한 존재를 찾았다.
“헤르멘, 지금 뭘 하고 있지?”
하도 말랑한 구석이 있어 무시하고 있었지만 헤르멘 역시 차원의 틈에서 태어났다는 드래곤이다.
차원계를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종족이니만큼 그라면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오, 친우여. 나는 지금 남은 몬스터를 처치하고 있다네. 그대가 부탁한대로이지.]
손등의 은빛 문양이 살짝 빛나더니 재깍 대답이 들려온다.
아직도 제주도에 있다는 소리였다.
어차피 이곳에서의 볼 일은 모두 마친 상태.
이제는 슬슬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럼 그쪽으로 이동할 테니 기다려.”
[알겠네. 마침 여기 상황도 마무리되어 가고 있는 참이었어.]
“아렐리아, 몸은 회복했나?”
바위에서 일어나 휴식을 취하고 있던 아렐리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아까보다는 생기가 도는 얼굴로 빙긋 웃어 보인다.
“이정도쯤은 전혀 문제가 아니죠.”
죽을 뻔한 주제에 큰소리는.
누가 봐도 걱정 끼치지 않기 위해 애써 밝은척하는 목소리다.
뭐, 그래도 이정도 장단 맞춰 주는 건 어렵지 않겠지.
나는 그녀와 함께 헤르멘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 * *
“무슨 일이 있었나보군. 그대 권속의 낯빛이 굉장히 나쁜데…….”
도착하자마자 헤르멘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확실히 복장이며 기운이 평소 같지 않음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방금 전 일을 간단하게나마 설명하기에는 주변 상황이 영 탐탁치 않았다.
와글와글-
“좀 시끄럽군.”
이번 몬스터는 인가에 나타났는지 주변은 온갖 사람들로 가득하다.
헤르멘이 직접 나섰으니 위험한 일은 없었겠지만, 또 그만큼 현실감없이 강한 탓에 사람들은 이미 구경꾼모드가 된 상태였다.
“그럼 자리를 옮기지. 우선 남은 정리를 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게.”
그는 뒤늦게 달려온 헌터와 협회직원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더니 구해 낸 민간인 무리로 다가간다.
그들은 연신 감사 인사를 하며 귤이나 주전부리 따위를 헤르멘에게 건넸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으나, 바로 옆에 몬스터 사체가 산처럼 쌓인 광경임을 감안하면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고맙수다. 맹심행 갑써.”
“그대야말로 조심히 가게.”
알아듣기 힘든 제주도 방언도 헤르멘은 여유롭게 받아 친다.
그새 제주도 도민이 다 된 모양이었다.
“정말 귀엽지 않나? 확실히 지구의 인간들은 아스티란과 다른 맛이 있어. 특히나 여기는 서울이라는 곳보다 공기가 좋아서 그런지, 사람들도 더 순수하더군.”
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아쉽다는 듯이 사람들을 쳐다본다.
누가 봐도 지구의 생활이 마음에 쏙 들어 보인다.
‘이정도면 여기다 터 잡는다며 난리 치겠는데.’
조만간 한라산 근처에 드래곤 레어가 생겼다는 목격담이 들려올 듯하다.
제주도 지역을 관리하는 협회 지부장은 뒷목 잡고 넘어갈 테고.
뭐, 그거야 내 알바 아닌데다가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나는 곧바로 잡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헤르멘을 한적한곳으로 이끌었다.
“친구여, 이제 말해보게. 드래곤을 만난 건가? 그대에게서 동족의 냄새가 나.”
이제 보니 드래곤이 아니라 개새끼쯤 되는 건가.
그는 뜬금없이 냄새를 운운하며 얼굴을 굳힌다.
설마 무언가 알고 있는 건가.
이어서 말하는 목소리에서는 조급함마저 느껴진다.
“혹시 나처럼 친구를 하자며 들이대지는 않았겠지? 이미 그대에게는 우정의 맹약을 맺은 내가 있으니-”
“……무슨 미친 소리를.”
이제 보니 그의 은빛 눈동자에서 일렁이는 것은 다름아닌 질투였다.
한마디로 나랑만 친구해, 정도인가.
유치원때도 못 들어본 말을 300년 넘게 지나서 들어볼 줄이야.
무슨 상상을 하는지 홀로 전전긍긍하는 헤르멘을 아렐리아가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바라본다.
“드래곤씩이나 되는 종족이 경망스럽기는.”
결국 그녀가 톡 쏘는 한마디를 던진다.
헤르멘은 그제서야 제정신을 차린다.
벌게진 얼굴로 애써 체통을 찾으려는 그에게 나는 툭하고 말을 내뱉었다.
“<별의 무덤>에 대해 알고 있나?”
“……뭐?? 그대가 그곳에 대해 어떻게…….”
헤르멘은 여태껏 보지 못했던 표정으로 크게 당황한다.
어찌나 놀랐는지 흔들리는 동공은 좀처럼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게 그렇게 당황할 일이던가.
그의 반응에 놀란 건 오히려 나였다.
“왜 그렇게 놀라는 거지?”
“아니, <별의 무덤>에 대해 어디서 들은 건가? 필멸자들은 절대 알 수 없는 장소야. 문헌이나 입으로도 퍼지지 않는 숨겨진 곳인데…….”
그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이다.
딱 봐도 이걸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헤르멘은 결국 길게 한숨을 쉬더니, 천천히 설명을 이어 갔다.
“그래. 그대가 이렇게 물어볼 정도면 대충 설명해선 안되겠지. <별의 무덤>의 목적은 간단하네. 수명이 다해 가는 드래곤들이 머무르는 차원계이지. 그리고 그곳은 드래곤의 힘을 지닌 자만 갈 수 있고.”
“드래곤의 힘을 가진 자만? 하지만 서채아는…….”
의문을 표하려다 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렌에게 당한 실험,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에 얼핏 보이던 금빛 기운들.
이제야 모든 게 설명된다.
서채아는 지금 드래곤의 힘을 이어받은 상태였다.
“……그럼 그 차원계에 마왕님이 가시는 건 무리겠군요.”
아렐리아가 침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다시금 그녀가 미안함을 표출하려는 찰나.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나를 또렷이 쳐다본다.
“아니. 전혀 방법이 없는 건 아닐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