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SSS랭크로 귀환한 사연 138화
확실한 긍정의 말.
하지만 예상했던 질문들은 없었다.
그들은 그저 말문이 막힌 듯 나를 멍하니 바라본다.
“……정령왕님?”
“됐어. 가 봐라. 앞으로는 사고 치지 말고.”
가볍게 손짓하자 이프리트는 주춤거리며 사라진다.
앞으로 정령계에 홀로 남은 정령왕이기에, 해야 할 일이 한두 개는 아닐 터.
아마 정령계를 둘러보고 다닐 셈으로 보였다.
“방금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 아니에요……?”
“맞는 것 같은데요. 정말로 진 헌터님이 정령왕이라니…… 그런데, 정령이 아닌데 가능한가요……?”
잠시 멈춰있던 그들은 이제야 수근대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 눈치였다.
“용병왕님이…… 마왕인데…… 정령왕?”
다들 삐그덕거리는게 고장 나기 직전의 기계와 비슷하다.
생각해보니 <왕의 길> 퀘스트에 대해서도 나와 주변 몇 명만 알 뿐.
이들에겐 듣도 보도 못한 정보겠지.
‘밖에 나가면 어느 정도 설명은 필요하겠군.’
이렇게 된 이상, 숨길 이유도 없었다.
또다시 헌터계가 발칵 뒤집히겠군.
할 일이 터져 버린 박신우의 절망 어린 얼굴을 상상할 때쯤이었다.
[이런. 받아야 할 게 하나 더 있지 않던가.]
갑자기 헌터들 사이로 비둘기 하나가 날아온다.
그러고 보니 그의 말대로 남은 게 있긴 했다.
사실상 이번 퀘스트의 하이라이트나 다름없는 것.
<검은 탑> 클리어 티켓이었다.
나는 정령신에게 바로 손을 턱하고 내밀었다.
구구?
하지만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가 내민 손바닥에 앉는다.
‘비둘기가 되더니 지능도 새대가리로 변한 건가.’
심지어 천연덕스러운 비둘기 울음소리까지.
그는 지금 영락없는 한 마리의 비둘기였다.
“정령계에 웬 비둘기……?”
“비둘기 정령도 있던가요?”
헌터들도 전혀 의심하지 못하는 눈치이다.
심지어 한 명은 귀엽다는듯 그의 꼬리깃을 슬쩍 쓰다듬어보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걸 보는 한국의 헌터들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걸 대체 왜 만져요?”
“왜요? 그냥 새잖아요.”
이윽고 그들은 더럽다는 둥 아웅댄다.
제아무리 몬스터를 맨손으로 잡는 헌터들이라도 닭둘기는 꺼림직한 모양이었다.
푸드득-
그 와중에도 정령신은 계속 날개를 퍼득이며 영문 모를 행동을 한다.
설마 헌터들에게 본인의 정체를 들키기 싫은건가.
“난 잠시 가 봐야 할 곳이 있으니, 너희는 돌아가도록 해라.”
“예? 용병왕님 혼자서요? 아니, 그것보다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겁니까?”
구구-
내 말이 끝나자마자 비둘기가 다시 소리를 낸다.
맞다는 듯 고개는 빠르게 끄덕이고 있는 중이었다.
‘이게 정답이었군.’
바로 <정령계의 문>스킬을 사용하자, 곧 주변에 수십 개의 문이 생긴다.
그러나 헌터들은 열린 문 앞에서 주춤거릴 뿐.
아무도 나가려는 시늉을 하지 않는다.
“다들 뭐 하는 거지.”
“아니……이거 설마 지구로 통하는 문입니까? 게이트도 아닌 곳이라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나 싶었는데…….”
눈은 장식이던가.
미간을 찡그리며 주변에 있던 헌터 한 명을 덥썩 잡아들었다.
“윽?진 헌터님?”
어리둥절한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잠시.
나는 즉시 그를 문밖으로 던져넣었다.
꽤 힘을 썼으니, 날아간 헌터는 아마 문밖의 사막에 얼굴을 처박았을 터였다.
“다음은 누가 나갈 테냐.”
“……저는 제 발로 나갈게요.”
주혜라가 제일 먼저 문밖으로 사라진다.
헌터들은 그제서야 황급히 그녀를 따라 떠났다.
“진님, 설마 저희를 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와 주신 건가요?”
거의 모든 헌터가 나갔을 쯤.
이도윤이 슬그머니 다가와 감동한 듯 말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지만.’
정령왕 자리도 얻을 겸, 겸사겸사 온 것이니 영 잘못된 말은 아니었다.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헤벌쭉 하고 웃는다.
“역시 진 님……”
“이만 가지. 진 님은 할 일이 남아 있는 듯하니.”
“앗, 잠깐만요!”
무어라 더 떠들려는 그를 강준하가 끌고 나간다.
이제 모든 사람이 떠나고.
이곳에는 나와 정령신만이 남아 있었다.
“이제 말 좀 하지. 같잖은 비둘기 흉내는 그만하고.”
[그래도 제법 비슷하지 않았나.]
그는 작게 날갯짓을 하며 거들먹거린다.
본인의 연기가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말하는 비둘기는 좀 그렇지 않나. 내가 신이라는걸 알리고 싶지도 않았고.]
결국 들키면 쪽팔렸을 거라 이건가.
이미 신으로서의 체면은 바닥에 떨어진 듯한데.
지금 와서 챙길 자존심이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럼, 가 볼까? 멀지 않은 곳에 있다네.]
대체 어딜 간다는 거지.
의문스럽지만, 우선 공간 이동을 준비하는 그를 기다렸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정령계의 한 가운데였다.
그곳에는 오색찬란한 거대한 빛줄기가 있었다.
하늘을 뚫을 듯 길게 이어져 있는 그것은, 어울리지 않게 작은 문까지 달려 있다.
어디서 익숙하게 본 모양이었다.
‘설마 이게 <검은 탑>인가.’
겉으로 보기에는 무지개 탑에 가깝다.
하지만 이미 마계에서도 이름만 <검은 탑>일 뿐, 형태도 색도 다른 탑을 본 뒤이다.
정령계에도 그와 비슷한 것이 있으리라는 건, 짐작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냥 <검은 탑> 클리어권을 주면 끝나는 게 아니던가.”
[단번에 10층을? 그건 아무리 나라도 힘든 일이야.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어도, <그녀>의 힘과 세계의 율법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과 다름없으니.]
신이라는 놈이 무능하기 짝이 없군.
심지어 당당하기까지.
나는 얼굴을 잔뜩 구긴 채 그가 안내하는 탑으로 향했다.
[원래라면 나는 함께하지 못하지만, 지금은 안내자의 신분이니 괜찮겠지.]
덜컹-
작은 보석들로 치장된 문에 손을 대자 부드럽게 열린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서자 뜨거운 열기가 훅 하고 느껴진다.
내부는 오직 타오르는 불만 있을 뿐.
[<검은 탑> 41층에 입장하셨습니다.]
[41층부터 50층까지 연계 퀘스트<자연과 하나되는 자>가 진행됩니다.]
[도전자가 정령왕이므로, 퀘스트가<자연과 하나되는 자>-쾌속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여긴 뭐지. 지난 층처럼 마계의 존재들과 싸우게 되는 것인가?”
[우린 그런 무식한 마족들과는 다르네. 음, 보자. 우선 불 속에서 3일 버티는 것이던가. 자네는 정령왕이니 하루나 반나절이면 되겠군.]
미친, 이 속에서 버티는 게 퀘스트라고?
물론 불속성 저항력을 올려주는 각종 아티팩트와 연금술 물약들이라면 가능은 할 것이다.
내 인벤토리에는 아직도 써먹지 못한 물건들이 산처럼 쌓여 있으니.
하지만 줄어들어서 하루지, 분명 지루한 시간이 될 터.
심지어 아직 여긴 41층에 불과하다.
만약 내 예상이 맞다면…….
‘다음 층들은 바닷속이나 땅에 파묻히는 거겠지.’
사실상 산 채로 생매장 당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지금 차력쇼라도 시키려는 건가.
헛웃음을 삼키고 정령신을 돌아보았다.
그는 왜인지 모르게 자신만만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퀘스트로 약조한 것도 있으니, 걱정 말게.]
그는 부리를 벌리며 웃는다.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고만 있을 쯤.
비둘기가 한차례 크게 날갯짓한다.
동시에, 그의 신력이 온 공간에 퍼져 나갔다.
[안내자(정령신)의 힘이 탑에 영향을 미칩니다.]
반짝거리는 가루들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 불꽃에 내려앉았다.
거친 열기는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삽시간에 사그라든다.
저 멀리에는 높은 화염에 가려져 있던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탑>41층이 클리어 되었습니다.]
바닥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비워졌다.
비둘기는 거보라는 듯, 의기양양하게 가슴 부분을 쭉 내민다.
[자, 어떤가! 그대는 그저 계단만 오르면 되네!]
분명 물을 냅다 부어버리는 일 따위로는 꺼지지 않는 불 일터.
시스템이 그렇게 허술한 방식으로 탑을 만들었을 리가 없다.
확실히 신력으로만 가능한 방법이겠지.
그러나 그의 모습에서 떠오는 건 단 한 가지였다.
‘……소화기?’
[무얼하는가? 어서 가지 않고.]
비둘기, 아니 날으는 소화기가 앞장선다.
꽤나 거들먹거리는 모습이었다.
* * *
[<검은 탑>42층이 클리어 되었습니다.]
.
.
.
[<검은 탑>49층이 클리어 되었습니다.]
뒤의 층들도 순식간이었다.
고속도로처럼 뻥 뚫린 공간을 그저 지나가기만 하 일은 어렵지 않았으니까.
‘다른 헌터들은 고생 좀 하겠는데.’
한국을 제외하고, 제일 <검은 탑>을 빠르게 클리어 하고 있는 곳이 미국이던가.
아마 그들은 곧 우리가 아스티란의 과거를 겪었던 것처럼, 시오스 대륙의 과거와 관련된 퀘스트를 진행할 터였다.
그리고 그 뒤는 마계와 정령계가 연달아 나올 테고.
하지만 마족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화염이나 바닷속에서 한 달 넘게 버텨야 한다니.
그들에겐 속성 저항에 관련된 아티팩트가 반드시 필요하게 될 것이다.
‘사재기를 해 봐야 겠군.’
돈 냄새가 난다.
최근 블랙마켓 지점들을 확장하려던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나가자마자 이도윤을 들들 볶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검은 탑>50층이 클리어 되었습니다.]
[아시아-대한민국 채널이 <검은 탑> 50층 공략을 완료했습니다.]
[50층부터는 해당 채널에 특별한 혜택이 부여됩니다. (현재 탑 내부에 있으므로, 알 수 없음.)]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 마지막 층이 클리어되었다.
다른 건 다 평소 보던 그대로인데, 특별한 혜택이라는 것이 눈에 띄인다.
‘어차피 이건 지금 알 수도 없겠고…….’
지금은 작별 인사나 할 때이다.
앞에서 퍼덕거리는 비둘기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망울은 어째서인지 촉촉했다.
[……이제 정령계를 떠나겠군. 정말 고마웠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대가 없었다면 내 자식같은 정령왕들은 영혼까지 타락했을 거야.]
커엉-
어디서 코 먹는 소리가 난다.
설마 우는 건가.
‘진짜 가지가지 하는구나.’
정령신은 여태껏 보아왔던 신들 중에 제일 감정적이긴 했다.
그래도 그렇지, 신이 눈물을 보이다니.
누군가에게 말해도 거짓말 말라며 코웃음칠 상황이다.
떨떠름하게 그를 지켜보자, 비둘기는 포옹이라도 할 것처럼 자세를 잡는다.
[갈 땐 가더라도, 껴안는 것 정도는 괜찮잖나.]
전혀 괜찮지 않은데.
차갑게 그를 쳐 내려는 그때였다.
[해당 도전자가 <검은 탑> 51~60층에 대한 특별한 조건을 이뤄 낸 상태입니다.(조건: 요정왕)]
[이어서 51층에 도전하시겠습니까?]
도전하겠냐고?
당연하지.
못 먹어도 고인데, 이건 무조건 되는 판이었다.
철퍽-
[꿱!]
나는 비둘기를 내팽개치고 바로 확인 버튼에 손을 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