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SSS랭크로 귀환한 사연 134화
그와 동시에 주변의 풍경이 흐릿해진다.
온통 용암으로 가득했던 대지는 어느새 오색 빛깔로 가득한 공간으로 변했다.
‘또 신인가. 이번에는 정령신이겠군.’
아스티란에 몇백 년 동안 있을 때에는 신들의 머리카락 하나 볼 수 없었는데.
왠지 모르게 요즘은 엮이는 일이 꽤나 많은 듯하다.
특히 목소리만 듣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의 현신을 목도하는 일은 더더욱 희귀한 일.
보통의 인간들이라면 감동으로 졸도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이쯤 되면 뻔질나게 찾아오는 신들이 지겨울 지경이다.
[쉽게 수긍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짜고짜 이프리트를 소멸 직전까지 몰아붙일 줄이야.]
곧 등장한 이는 백발의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가진 존재였다.
선이 고운 얼굴과는 정반대의 탄탄한 체격.
그리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칠흑의 눈동자까지.
그는 이제껏 본 신 중 제일 신비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분명 그의 입을 빌어 말하긴 했지만 나의 의지라는걸 알았을 텐데.]
“그런가? 하지만 초면에 헛소리를 지껄이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그 태도 역시 듣던대로군. 이제껏 내 앞에서 그런 당당한 태도를 지닌 자는 본 적이 없어.]
“피차일반이군. 나 역시 그렇게 뻔뻔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놈은 없었던 것 같군.”
있었어도 이미 그들은 산 자가 아닐 터였다.
그를 향해 비아냥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정령신은 나를 빤히 보더니, 크게 한숨을 쉰다.
자포자기한 듯한 태도였다.
[……나도 내가 어떻게 비춰질지 잘 아네. 하지만 유일한 방법은 자네의 도움을 바라는 것밖에 없고. 그리고 이건 정령계뿐만 아니라, 전 차원을 위한 일일세.]
그는 부드럽게 손을 허공에 휘둘렀다.
그러자 바닥에서 물이 조금씩 솟아나오더니, 조그마한 웅덩이를 만들어낸다.
‘전 차원이라…… 허튼 소리를 하는 것 같진 않은데.’
[이프리트를 제외한 정령왕들이 <타락>한 건 알 거라 믿네. 타락이 정신까지 침투했기 때문에, 그들은 오직 무언가를 파괴하는 일밖에 할 수 없지.]
정령신은 쓰게 웃으며 웅덩이에 손을 대었다.
그의 힘에 작게 흔들리던 표면에는 무지개빛이 일렁인다.
몇 초 뒤, 투명한 샘물은 정령계 곳곳을 비추기 시작했다.
[보이나? 아름다웠던 정령계가 무너져가는 이 모습이. 요정수가 요정계 전체를 지탱하는 것처럼, 정령계는 사대 정령왕의 존재 자체가 이곳을 유지시키고 있었어. 그리고 지금의 정령계는…… 거의 멸망 직전과 다름없다네.]
정령신이 안타까운 말투로 중얼거린다.
그의 말대로, 정령계 대부분은 <타락>으로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나마 멀쩡한 장소는 이프리트가 있던 활화산 부근뿐.
하지만 그것도 시간 벌기에 불과하다.
“길어야 5년, 짧으면 3년이겠군.”
[맞아. 그리고 이건 정령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온 차원계의 문제라네. 물과 불, 대지와 바람이 없는 차원계는 존재하지 않으니.]
그 차원계에는 아스티란부터 지구까지 포함되리라.
슬슬 정령신이 나를 불러 낸 의도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대로 다같이 멸망하느냐, 사느냐.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소리군.’
그래도 굳이 봉인이라는 길을 선택해야 할까.
아직 봉인의 방법은 듣지 않았지만 거쳐야 할 단계가 한두 마리가 아닐 것이다.
심지어 마왕처럼 한 명도 아니고, 정령왕은 총 네 마리.
하나씩 잡아올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귀찮음이 앞선다.
‘그러고보니 정령왕도 수명이라는 게 존재했었지.’
한 이삼천 년 정도였던가.
징그럽게 길긴 해도 어찌되었든 그들은 언젠가 자연적으로 소멸한다.
그리고 그 즉시, 다른 정령왕이 태어나 자리를 이어간다.
마치 인간의 왕처럼 세습하는 것이다.
나는 거기까지 생각을 마치고 바로 정령신에게 운을 띄워 보았다.
“기존 정령왕이 소멸하고 다시 태어난다면, <타락>에 영향을 받은 상태는 아니겠지?”
내가 생각한 방도는 깔끔한 재시작이었다.
종종 사용하던 방법이기도 하고.
원래 무언가가 꼬여간다 싶으면, 모조리 치워버리고 새로운 기분으로 시작하는 것이 더 빨랐다.
그것이 일이든 간에, 사람이든 간에.
[그렇지. 우리는 그 어떤 종족보다 순수한 자연에서 태어나는…… 잠깐.]
순순히 대답하던 그가 멈칫한다.
얼굴은 점점 경악으로 굳어 가고 있었다.
[설마 내가 짐작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지?? 지금의 정령계는 오염되었기에 다른 정령왕이 태어나지 못해! 그대로 영원히 정령왕을 잃는다는 말일세!]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안타까운 마음을 참을 수 없어, 샘물에 발길질을 했다.
콰앙-!!
발이 닿자마자 샘이 큰 굉음과 함께 폭발해버린다.
물방울은 사방으로 비산한다.
신의 힘이 고여 있던 공간은 이제 메마른 바닥으로 변해 있었다.
[……제발 기다려 보게. 차원계의 왕을 봉인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은 맞지만, 정령왕의 경우에는 성격이 조금 달라. 그리고 분명 들어보면 자네에게도 도움이 될 일이야.]
그는 이제 거의 울먹이며 부탁한다.
조금만 있으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 기세였다.
[그냥 어딘가에 가두면 스스로 정신을 차리게 될 거야. 마나가 풍부할수록 좋은 장소일 테고.]
무력화시킨 후, 특정 장소에 던져 놓으라는 건가.
예상보다는 어렵지 않은 방법이긴 했다.
[지금의 정령계는 마나가 극도로 적기에 적합하지 않지. 하지만 그대는 좋은 감옥 하나를 가지고 있지 않던가.]
그는 싱긋 웃으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내가 가진 감옥이라?
딱히 생각나는 것은 없는……아, 설마 그건가.
“<변화하는 공간>?”
[정답이지. 그건 생각보다 대단한 물건이야. 무려 <그녀>가 직접 만들어 준 작은 차원계와 마찬가지니. 그리고 거기에 내 힘을 보태 주지.]
마법 약초 따위를 위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쓸모를 다한 장소다.
애초에 마탑이 재료 수급을 막아 버렸기에 설정했던 것이니.
‘굳이 있는 거라고 해 봤자 크레아시론의 오두막 정도인가.’
졸지에 크레아시론은 거리에 나앉게 생겼다.
하지만 상관은 없었다.
그는 월세 한번 내지 않았던 세입자였으니.
나는 그를 향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정령신은 금세 화색이 되어 손가락을 한번 퉁겼다.
띠링-!
[히든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정령왕 봉인>: 정령신이 당신에게 간절히 부탁해 왔습니다. <타락>으로 미쳐 버린 다른 정령왕들을 봉인하세요.
물의 정령왕 봉인:0/1
대지의 정령왕 봉인:0/1
바람의 정령왕 봉인:0/1
*보상:4대 정령왕의 왕관, 대한민국 채널 <검은 탑> 41~50층 클리어, <변화하는 공간> 스킬 각성]
또다시 떠오른 퀘스트 메시지.
하지만 절박한 정령신의 심정이 적용되었는지, 퀘스트 설명이 약간 바뀌었다.
더불어 보상의 내용도.
“이제 좀 괜찮아 보이는군.”
흡족한 미소를 띄운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그는 안심되는 표정을 짓는다.
왕관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검은 탑> 클리어라니.
그것도 30층대와 비슷하게, 무려 한번에 10층을 클리어 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만하면 나도 최선을 다한 셈이야. 이 이상은 아무래도……]
“<세계의 율법>에 걸리겠지.”
[잘 아는군. 그럼 일단 빠르게 시작하지 않겠나? 바람의 정령왕부터 시작하지.]
그는 내 마음이 바뀔까 걱정되는지, 황급히 다시금 힘을 사용했다.
우우웅-
무지개빛 기운이 번쩍이던 곳은 순식간에 바뀐다.
발 밑에는 검은 먹구름이 떠다니고 있었다.
아마도 정령계의 하늘에 서있는 듯했다.
[우선 완료 보상을 일부분 부여해 주겠네.]
띠링-
[스킬 <변화하는 공간>이 각성했습니다.]
[변화하는 공간의 문[???급]:변화하는 공간으로 이동 할 수 있는 문이 생깁니다. 퇴장 시 문을 이용하면 마지막에 있었던 곳으로 이동합니다. 소유자가 허락한 상대는 모두 사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정령신의 힘이 깃들어, 해당 공간은 보다 풍부한 마나가 깃듭니다.
*각성 효과: 100일에 한번, 변화하는 공간 내부를 원하는 조건으로 수정할 수 있습니다.(현재: 마법 재료)]
신의 힘이라더니, 과연.
원래의 변화하는 공간은 초기 설정을 바꿀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약초 빼고는 쓸모 없던 곳을 변경할 수 있게 되었다.
신의 힘까지 깃들었으니 그 활용도는 무궁무진할 터.
1회용품이 재활용품으로 변한 것이다.
[준비하게. 내 기운을 느낀 실피드가 곧 도착할 거야. 그럼 그대의 스킬 안으로 밀어 넣기만 하면 되네.]
그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감돈다.
동시에, 멸망하기 직전인 정령계를 되돌릴 수 있을 거라는 설렘도 느껴졌다.
하지만 복합적인 감정으로 가득한 그와 다르게, 나는 옆을 돌아보고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잠깐, 너 모습이…….”
[아, 이것 말인가. 아무래도 본래의 형태는 소모되는 힘이 상당해서 잠시 변한 것뿐. 신경 쓰지 말게.]
정령신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해온다.
그러나 나는 간단하게 넘길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런 게, 그는 도시 사람이라면 모두 혐오해 마지 않는 생물로 변신해 있었다.
저 몸으로 날 수는 있을까 싶은 뚱뚱한 몸뚱이에 군데군데 거뭇한 얼룩까지.
국가 지정 유해 동물인, 완벽한 비둘기의 모습이었다.
‘저 정도면 그냥 비둘기도 아니고, 닭둘기 수준인데.’
왜 하필 저 모습일까.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 아니 닭둘기를 움켜쥐었다.
[뭐 하는 거지?? 지금 이 형태는 본래 신력의 일부분밖에 가지지 못해! 자네 정도의 힘이면 내게도 충분히 위협적이라고!]
그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친다.
목소리는 두려움으로 잘게 떨리기까지 했다.
“정령신씩이나 돼서 놀라기는.”
신들이 내 눈치를 살핀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나에게 벌벌 떨지는 않았다.
이정도로 자존심도, 힘도 없는 모습이라니.
나조차도 코웃음 칠 정도였다.
[윽……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아네. 하지만 정령계는 다른 차원들보다 <타락>의 정도가 가장 심하단 말일세.]
그는 부끄러운 듯 투덜거린다.
그러면서도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리는 몸은 어찌 못하겠는지, 연신 날개를 파닥이고 있었다.
[그러니 이만 놓아……]
우웅-
손을 떼려는 찰나.
순식간에 하늘에 세찬 바람이 불어온다.
사람 하나는 가볍게 찢을 수 있을 정도였다.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가 등장합니다.]
[주의! 현재 정령신의 상태(위협)으로 광폭화 중입니다.]
꼴에 본인의 주인 걱정은 한다는 건가.
나는 쥐고 있던 비둘기를 놓고 손을 가볍게 풀었다.
[광폭화라니?? 그렇지 않아도 미쳐 있는 상태인데!]
어려운 단어로 포장 되어있지만 결국 시스템 메시지가 말해주는 것은 딱 하나.
미친 놈이 더 미쳤다는 소리였다.
그는 실피드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른다.
차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걱정 마라. 다 방법이 있으니. 수백 년간 실험해 본 결과, 이만한 것도 없었지.”
[그런 좋은 방도가 있단 말인가??]
뚜둑-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고로 미친 놈에게는 매질이 약인 법.”
[야,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