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SSS랭크로 귀환한 사연 133화
‘구멍에 빨려 들어간 헌터들인가.’
“크윽!!!”
“이쪽 좀 도와주세요!!”
“거기 앞에, 당장 피하세요!!!”
슈욱- 콰아앙!!!!!!
익숙한 빛의 화살이 하늘을 수놓는다.
방금까지 연회장에 있었던 주혜라였다.
그녀의 한껏 차려 입은 드레스는 이미 엉망진창이어서, 정령계에서 즐겁지 못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제길, 정령이 너무 많아!!”
사방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린다.
슬슬 버티기도 힘들어 보인다.
나는 잠자코 따라오던 서채아와 눈을 마주했다.
그녀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필요 없었다.
쿠우웅!!!!!!!!
나와 서채아가 쏟아 낸 검기가 주변을 폭풍처럼 휩쓴다.
단 한 번의 공격에 정령은 모조리 사라졌다.
“헉!!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마력에 놀라던 헌터들이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얼굴에는 이제야 살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응? 진 헌터님!”
“용병왕!?”
“마왕이잖아!”
잠시 숨을 돌린 그들이 황소처럼 떼 지어 몰려온다.
나를 불러대는 온갖 호칭은 덤이었다.
“뭐? 마왕이라고요? 이게 무슨 소리죠?? 용병왕 아니었나요?”
“아시아 헌터 모임에 참여하지 않은 분들은 처음 듣겠군요. 얼마나 난리였는데요. <예언>에 따라 진 헌터님이…… 아, 다른 분들은 <예언>도 모르겠네요.”
주혜라가 웅성거리는 헌터들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한다.
왠지 모르게 뿌듯한 표정이었다.
“와…… 마왕이라니. 그런 게 가능할 줄이야…….”
그녀에게 이야기를 듣더니, 그들은 나를 보며 눈을 빛낸다.
지금 적진 한복판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잊기라도 한 것 마냥 즐거워 보였다.
“어차피 이건 협회를 통해 알게 될 사실이니 그만하지. 그보다 주몽 길드장, 이곳에서 다른 자들을 본 적 있나?”
“음, 글쎄요…….”
주혜라는 말꼬리를 흐린다.
그러다 곧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놀란 얼굴이 되었다.
“생각해 보니 위험에 빠진 헌터가 우리만이 아니겠군요.”
“우리야 진 헌터님이 구해 주셨다지만…….”
순식간에 분위기가 심각해진다.
정령계가 놀러 올 만한 장소는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흩어져서 찾을 순 없으니 빨리 움직여야겠어요. 사람 수가 불어나면 불어날수록 편해지겠죠.”
“서채아, 너도 이쪽에 합류해.”
잠자코 있던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났는지, 움찔거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진 헌터님은 함께하지 않으시나요?”
“난 정령왕들을 찾아볼 생각이다. 그들을 처치하면 답이 나오겠지.”
겸사겸사 내가 정령계의 왕이 되면 더 좋겠고.
여기에 직접 온 이유 중 하나였다.
언젠가 정령계에 직접 갈 생각이었는데, 마침 이곳으로 올 일이 생기다니.
‘렌은 헌터들을 처치할 생각이었겠지만, 나에게는 좋은 기회다.’
서채아가 아니었다면 꽤 애먹었겠지.
사막 한복판의 통로라니.
드넓은 아프리카 대륙을 모조리 뒤져도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들을 찾는다니…… 혹시 정령왕의 자리에 오를 생각이세요?”
“맞다.”
“와, 이걸 직접 듣게 되다니…….”
어차피 이들도 알게 될 일.
숨길 생각은 없었기에 내 생각을 알리자, 헌터들은 소란스러워진다.
본인들이 역사의 한복판에 서 있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다들 서둘러. 여유 부릴 시간은 없으니.”
“앗, 그렇죠. 그럼 밖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했어요!”
헌터들은 간단한 작별인사와 함께 황급히 자리를 뜬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 멀리 있는 화산에 시선을 던졌다.
‘이정도 마나면, 일반적인 정령은 아니겠군.’
붉디 붉은 산은 타오르는 용암을 끊임없이 뱉어 내고 있다.
그 뜨거운 열기가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
아마 불의 정령왕이라는 이프리트가 있을 장소였다.
나는 우선 인벤토리에서 화염 저항이 있는 아티팩트를 줄줄이 꺼냈다.
하나같이 전설에 속에 나온다는 물건들이다.
그중 제일 괜찮아 보이는 것들을 몇 개 장착하고, 바로 화산을 향해 이동했다.
* * *
발 딛는 곳마다 정령투성이다.
하나 내 발걸음을 멈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써겅!!
앞을 가로막는 정령들을 기계적으로 베어냈다.
거의 천에 달하는 수를 없앴을쯤, 슬슬 정령의 종류가 바뀌었다.
눈에 띄지도 않던 불의 정령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한데.’
저 멀리 작은 불덩이의 모습을 한 정령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은 이번에도 나를 보자마자 부리나케 도망간다.
뀨익!
이번으로 벌써 일곱 번째.
보자마자 입에 개거품을 물고 철천지원수라도 되는양 덤벼대는 여타 정령들과 다른 반응이다.
마치 <타락>하지 않은 정령처럼, 이성이 존재하는 듯했다.
‘혹시 불의 정령왕이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건가.‘
제일 그럴싸한 추측은 그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직접 만나봐야 확실시될 터.
나는 더욱 빠르게 용암을 밟으며 산을 올랐다.
그렇게 후끈한 바람을 맞으며 십여 분.
드디어 산의 끄트머리에 도착한 후, 사방을 둘러보았다.
쿠구궁-
온통 시뻘건 용암으로 가득한 가운데.
넓은 분화구 안에서 무언가 몸을 일으켰다.
“왔는가, 인간이여. 나는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
‘정말 <타락>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군.’
집채만 한 덩치의 이프리트가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온다.
용암으로 이루어진 얼굴 부분이 이상하게 기분 좋아 보인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화르륵!
순간, 그가 거세게 타오르는 화염으로 뒤덮여 버린다.
그리고 형태는 점점 작아져, 인간으로 변한다.
붉은 장발이 휘날리는 호쾌한 사내의 모습이었다.
“그대가 왕이 될 자인가. 음, 확실히 강해 보이는군.”
그는 나를 찬찬히 뜯어본다.
눈에는 감탄이 어려 있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분명 내가 적으로 온 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
하지만 그는 마치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느낌이었다.
“나의 행동이 의문스러운가 보군.”
날카로운 눈초리로 바라보자, 이프리트가 곧 눈치채고 어깨를 으쓱한다.
싸울 생각은 조금도 없다는 듯이 유유자적한 모습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확실한 건, 나는 자네를 적대할 생각이 없다는 거네.”
“나보고 그걸 믿으라는 건가. <예언>때문에 니시크라메 대륙이 정령들의 손에 멸망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인데.”
“......조금 다르다네. 그보다는 인간들에 의해 파괴된 자연때문에 정령이 노했다는 게 더 맞겠지.”
“책임 전가를 하는 건가? 변명거리 한번 그럴싸하군.”
내 비꼬는 말에 이프리트가 쓰게 웃었다.
“그럴지도. 하지만 믿지 않아도 사실이야. 그리고 나는 그대를 애타게 기다려 왔지.”
“......기다려 왔다고? 나를?”
인간에게 왕을 뺏길 수 없다며 덤비는 왕들은 봤어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대체 무슨 개수작이지.’
하지만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그는 잠자코 있을 뿐.
심지어 눈빛에는 슬픔이라는 감정마저 떠올라 있었다.
“그대라면 율법을 어긴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겠지. 불의 정령을 제외한 나머지는 <타락>해버렸어. 말려보려 했지만, 나 혼자로는 역부족이었지. 그대는 아는가? 점점 미쳐 가는 동료들을 잠자코 지켜보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지.”
이프리트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들어올린다.
그와 동시에 내 눈앞에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히든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정령왕 봉인>: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가 정령신을 대신해 도움을 요청합니다. <타락>으로 미쳐버린 다른 정령왕들을 봉인하세요.
물의 정령왕 봉인:0/1
대지의 정령왕 봉인:0/1
바람의 정령왕 봉인:0/1
*보상:4대 정령왕의 왕관]
“제발 다른 정령왕들을 구원해주게. 신께서도 흔쾌히 그대를 도울 테니 방도만 찾는다면-”
더이상은 들어주기가 힘들다.
나는 마나를 담은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크악!!”
가죽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이프리트가 바닥에 처박혔다.
얻어맞은 얼굴을 부여잡은 그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개소리하고 자빠졌네.”
“이…… 이게 무슨 짓인가!?”
“도와 달라고? 살다 살다 이런 멍청한 소리는 처음 듣는군.”
니시크라메 대륙을 공격한 정령들에게, 굳이 내가 죗값을 물을 생각은 없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곳의 귀환자들은 대륙을 건 전쟁에서 진 패배자.
힘이 약한 세력이 땅을 빼앗기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령족 따위를 도울 입장도 아닌데. 정령신이란 놈은 양심이 존재하기나 하는건가.’
마신보다 더한 신이 있다니.
차라리 마신은 보상이라도 확실한 편이다.
그러나 이번 퀘스트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고작 정령왕의 자리뿐.
“그딴 왕관, 어차피 빼앗으면 그만이지.”
편한 방법이 있는데 돌아갈 이유는 없다.
퍼어억!!!!
쿠웅!!!
“크아악!!”
주먹에 담긴 마나가 회오리를 만든다.
복부를 얻어맞은 이프리트는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정신조차 차리지 못하겠는지, 눈은 허공을 바라본다.
나는 그를 향해 재차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그리고 말이야…….”
쿠웅-!!!
“부탁하는 정령이, 좀 공손한 맛도 있고 그래야지.”
콰아아앙!!!
“감히 건방지게.”
이만하면 적당히 잘 다져진 것 같군.
나는 손에 묻은 잿더미를 가볍게 털었다.
불타는 활화산과 같았던 이프리트는 이제 시꺼멓게 죽은 색깔로 변해 있었다.
텅 빈 눈이며, 아까부터 비명소리조차 없는 걸 보니 대충 봐도 소멸 직전의 상태였다.
‘왕관은…… 저건가.’
온몸을 흠씬 두들겨 맞았기에, 이프리트는 성한 곳 하나 없다.
머리 위에 달려 있는 뿔 같은 것도 마찬가지.
덜렁거리는걸 보니 조금만 힘을 가하면 떨어져 나올 것 같았다.
콰직-
[정령왕의 왕관(1/4)를 획득할 수 없습니다.]
[정령왕이 되기 위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게 왕관이긴 했군.
다만 조건이 맞지 않아 얻을 수 없다는 말처럼, 그의 뿔은 아무리 강하게 쥐어도 뽑히지 않는다.
“……죽여야 하나.”
설마 소멸하는 즉시 뿔도 사라지진 않겠지.
미간을 찡그리며 움직이지 않는 이프리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즉시 휘두르려는 순간.
[마신 말이 맞았나…… 이 인간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군.]
마치 바람에 날리는 듯한 목소리.
그와 동시에 마치 시간이 멈추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