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SSS랭크로 귀환한 사연 111화
“헤르멘, 날 믿나?”
“그게 무슨……”
헤르멘이 뜬금없는 내 말에 잠시 당황한다.
이 상황에서 나올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 듯했다.
잠시 나와 그의 시선이 얽힌다.
그의 눈동자 속 흔들림은 이제 거센 폭풍과도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믿음이라는 단어 자체는 모르겠어. 그동안 혼자 지내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 생각했기에.”
헤르멘은 쓰게 웃어 보인다.
미소에는 지독한 외로움이 얼핏 스쳐지나간다.
‘한시가 급한데 왜 이렇게 진지해?’
갑자기 튀어나온 그의 인생, 아니 용생 고백에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다.
분위기가 슬슬 이상해진다.
온몸이 간지러운 기분.
마치 참된 우정이 무엇이냐, 라는 주제를 가진 영화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나는 그저 마나 좀 빌리려 했을 뿐인데.
“처음에는 호기심이었지. 사실 그대가 나를 무시하는 느낌이 좋았던 건 아니야. 하나, 점점 아스티란에서 수호용으로 다른 인간들과 지내다 보니 알겠더군. 그대는 종족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온전히 나를 대하고 있었어.”
‘아니, 내 한마디를 이렇게 받아들여?’
내가 이놈이 왕따용이라는걸 잠시 잊고 있었다.
친구하나 없던 헤르멘은 점점 듣고 싶지도 않았던 말을 줄줄 꺼낸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렇게 나에게 미소 지어 주는 친구는 평생 한 명이겠지.”
누가 봐도 어이없는 웃음이 아니었나.
이게 어떻게 저딴 해석이 되어 버렸을까.
나는 헤르멘의 머리통 안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좋아. 이제야 잘 알겠어.”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했다.
떨리던 눈빛이 단단해진다.
그리고 그만큼, 오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간다.
“나는 그대를 영원한 친우로 받아들이겠네. 이것은 내 드래곤 하트를 건 맹약이며, 죽음조차 우정을 갈라놓지 못할걸세.”
[헤르멘의 친밀도가 극도로 상승합니다.(현재: 최상급)]
[<우정의 맹약>을 <영혼을 건 우정의 맹약>으로 바뀝니다.]
[드래곤 헤르멘은 당신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것입니다.]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몇 개씩이나 떠다닌다.
그와 동시에 손등에 불에 데인 듯한 고통이 느껴진다.
<우정의 맹약>의 문양이 있는 위치였다.
은빛의 문양은 점점 커져 내 팔 전체를 휘감았다.
[영혼을 건 우정의 맹약:현재 실버 드래곤 헤르멘과 친구를 맺은 상태입니다. 그는 당신을 돕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것입니다.]
[드래곤 헤르멘의 힘의 대부분을 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힘을 빌리시겠습니까? 예/아니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더니.
거창해지긴 했어도, 결국 목적은 이뤄 냈다.
심지어 일부분을 빌려 준다던 시스템 메시지는 대부분이라는 단어로 바뀐 상태.
이 정도라면 빠져나간 마나를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힘을 빌리겠다.’
나는 냉큼 힘을 빌린다는 선택지를 골랐다.
그와 동시에 헤르멘의 몸에서 눈부신 은빛 마나가 흘러나온다.
목적지는 내 심장 부근이었다.
“큭-”
폭발할 듯한 마나가 흡수된다.
마치 거센 파도에 맨몸으로 맞서는 기분이었다.
밀려드는 마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양보다 배는 많았다.
확실히 마나에서 태어나는 종족다웠다.
[드래곤의 마나를 더 이상 흡수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 흘러오던 마력은 서서히 끊겨간다.
남은 마나는 공중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몸 상태를 확인해 보니, 바닥을 향해 가던 마나양은 이제 꽉 차 있었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질적으로 향상된 느낌이었다.
“후…….”
컨디션은 최고조였다.
오랜만에 느끼는 개운함이 이루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제 좀 괜찮은가?”
헤르멘 역시 내 몸 상태를 확인했는지, 슬쩍 웃으며 물어온다.
어딘가 고민을 내려놓은 듯한 미소였다.
“덕분에.”
이제야 평정심이 되찾아진다.
약간의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그 와중에 머릿속은 골드 드래곤인 렌의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이제 어째서 게이트에 묶여 있었는지 설명해 줄 수 있나? 혹시 렌…… 그자를 만난 건가?”
“만나기만 했을까.”
“그래도 무사히 돌아왔으니 다행이야. 아무리 그대가 강해도, 그자가 쌓아 올린 경험과 지혜는 무시할 게 못되니.”
나도 그를 만만하게 보았던 건 아니다.
스킬을 섣불리 사용하지 않고 아껴 두기까지 했으니.
하지만 그래도 예상치도 못했던 수법에 결국 당하고 말았다.
‘게이트라니, 그걸 이용할 줄은 생각도 못했지.’
확실히 오래 살았던 드래곤이라 그런가.
일반적으로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게이트에 마력을 흡수하게 하더군. 잔머리 하나만은 제대로 굴리던데. 오랜만에 애먹었어.”
“잠깐, 그대를 곤란하게 할 정도로 힘을 썼다라……? 혹시 직접적인 힘을 썼단 말인가? 수하를 이용하거나 하지 않고?”
“그건 확실히 그의 마력이었어.”
“하지만…… 드래곤이 <예언>을 진행하고 있는 헌터를 건드는 건 불가능 해.”
헤르멘이 눈에 띄게 당황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표정이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이상하긴 했다.
‘분명 방어만 하고, 도망갈 정도로 나에게 손대지 못했지.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아닌 헌터 자체겠지만.’
율법을 신경 쓰고 있던 게 확실하다.
그런데도 게이트를 이용해 나를 약화시키는 데에는 성공했다.
직접적으로 손을 쓴 건 아니라지만 <세계의 율법>이 그렇게 허술할까.
하물며 아렐리아가 말 한 마디조차 조심할 정도였다.
모르긴 몰라도, 엄격한 규칙이 있긴 했을 것이다.
“……팔.”
왜 이제야 알았을까.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그의 팔을 뒤덮었던 힘은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끈적하고 음습한,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쁜 기운.
그건 요정계 곳곳을 망가트린 <타락>이었다.
“<세계의 율법>을 어긴 자라면 <타락>이 진행되는 것, 맞나?”
“그걸 어떻게 알고 있나? 쉽게 볼 수 없는 일인데.”
헤르멘은 크게 당황한다.
그 반응에 나는 확신을 얻었다.
‘도망을 위해 팔 한쪽을 희생했나.’
렌의 못마땅한 얼굴이 다시금 생각난다.
그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야 하는 표정이었다.
하기사, 강하기로 손꼽히는 자인데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겠지.
“이제부터 더 몰래 다니겠는데.”
특히나 나에게는 더더욱.
그도 생각이라는 걸 하는 자라면 당연했다.
좀 지는 척해 줄 걸 그랬나.
드디어 찾았는데, 결국 전보다 흔적을 발견하기 힘들어질 듯하다.
“렌을 말하는 건가?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헤르멘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 * *
아렐리아를 챙겨 마탑을 빠져나왔다.
들어올 때만 해도 분명 해가 중천에 떠 있었는데, 어느새 밖은 어두컴컴하다.
하지만 주변은 온갖 조명으로 한낮만큼이나 밝다.
그리고 그 조명만큼이나 사람은 더더욱 많았다.
이미 마탑은 많은 숫자의 사람이 들락날락 하고 있었다.
덕분에 입구에서 나오는 날 이상하게 보는 자들은 없었다.
“게이트에 들어가려면, 이정도 인원 가지고는 안 됩니다.”
“지금 다른 나라의 마탑에도 지원을 요청한 상태입니다. 조금 기다려 보시죠.”
“여기, 마법사들을 또 발견했습니다!!”
수백 명의 헌터가 심각하게 수군거린다.
계속해서 기절한 마법사들이 실려 나오고, 그걸 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이래서야, 마탑은 이제 끝이군요.”
누군가가 혀를 차며 말한다.
나 역시 그 말에 바로 공감했다.
비록 지금은 영국 본부의 일이지만, 다른 마탑 지부들도 영향을 받는 것은 자명한 바.
이미 신뢰를 잃은 마탑은 천천히 무너져 내리겠지.
“진 헌터님!!”
어디선가 신연주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서 그녀가 뛰어오고 있었다.
“게이트에 들어가시고 한참을 나오지 않으셔서 걱정했어요.”
그녀는 주변을 흘깃 쳐다보며 조그맣게 속삭인다.
혹여 누군가 들을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김상수는?”
“마탑장님은 대륙간 긴급 텔레포트로 한국에 돌아가셨어요. 며칠이나 잠들어 계셔서 몸이 좋지 않으세요. 아마 꽤 오래 병원 신세를 져야겠죠.”
본인이 불러온 재앙이라며 그녀는 작게 구시렁거렸다.
“그나저나, 방금 전 마탑에서 엄청난 마나가 휘몰아쳤는데. 혹시 아는 것 있으세요?”
아마 내가 마나를 흡수하고 남은 것이겠지.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은 채, 아직까지 내 곁을 지키고 있는 헤르멘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는 그저 슬쩍 웃어 보일 뿐이었다.
“당분간은 그대도 바빠지겠군.”
“아마도. 이미 마탑과 너무 엮여 버렸어.”
벌써부터 나머지 일들을 처리할 생각에 귀찮아진다.
가능한 무시하겠지만, 그래도 협회나 마탑에 몇 가지 정보는 줘야 할 듯하다.
이곳에 나만큼이나 마탑의 사건에 대해 아는 자는 없을테니까.
“아쉽지만, 나는 이만 돌아가려해. 그대가 내게 부탁한 일을 계속 해야 하니.”
헤르멘은 신연주의 눈치를 보며 요령껏 돌려 말한다.
아마 수호용으로서 제국을 지키는 일을 말하는 것이겠지.
별 생각 없이 시킨 일인데, 그는 왠지 모를 사명감을 느끼는 듯했다.
“마법사님, 돌아가시게요?”
신연주는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그의 얼굴에 집중되어 있다.
눈빛은 잡아먹을 듯 강렬하다.
드래곤의 질긴 피부가 뚫릴 지경이었다.
헤르멘이 돌아가기 전, 잘생긴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돌아가야지요. 그래도 친우의 일에는 언제나 발 벗고 나설 생각입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마나를 끌어올렸다.
다정한 말투에는 나에 대한 걱정도 슬쩍 내비친다.
“아, 맞아. 이건 선물일세.”
헤르멘은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손가락을 퉁긴다.
허공에 마법진이 새겨지고, 무언가 툭 떨어졌다.
“으, 으아악!!!”
신연주가 바닥을 기는 마법사를 보고 눈을 부라린다.
“……부마탑장?”
영국 마탑의 부마탑장이었나.
그러고 보니, 마탑장인 에드워드는 있는데 저놈은 코빼기도 비치질 않아 이상하다 싶었다.
“그대가 말한 대로 위층에 가 보니 있었지 뭔가. 아는 정보가 제법 있어 보이니, 마음대로 써먹게나.”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사라진다.
작별 인사 하나 없는 깔끔한 이별이었다.
나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보고 피식 웃었다.
“선물, 잘 쓰지.”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아니라, 드래곤인가.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드는 작별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