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SSS랭크로 귀환한 사연 102화
영국으로 갈 준비는 빠르게 완료되었다.
협회 쪽에서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딱히 말리는 눈치는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이유, 용기도 없었겠지만.
그래도 박신우와 통화하는 일만은 피할 수 없었다.
[원래라면 랭커를, 그것도 월드 랭킹 1위이신 진 헌터님의 출국은 엄격히 관리해야 합니다. 하지만 말린다고 가지 않으실 분도 아니시고…… 부디 이민을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길 빌겠습니다.]
어찌나 간곡하게 부탁하던지 생각에도 없던 이민을 고민하게 했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도망간다면 어떻게 할까.
내심 그 반응이 궁금할 정도였다.
“진 님, 전용기 준비되었습니다. 바로 가시면 될 듯합니다.”
강준하가 카페에 앉아 있던 나를 불렀다.
마지막 남은 음료를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얼굴이 많이 안 좋은데.”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레스 길드에서도 이번 <검은 탑> 26층에 참여하기로 했던가.
나도 공략대에 들어가기로 했지만 개인인 나보다는 길드들은 할 일이 더 많은 법.
거기에 블랙마켓의 일까지 나누어 하는지라 그는 피로에 찌들어 보인다.
“피로 회복 물약이라도 하나 주랴.”
그림자 길드에서 만든 스태미너 물약, 특제 봉봉 드링크를 꺼내 들었다.
꿀빛의 액체를 보자마자 그의 표정이 더욱 안 좋아진다.
“그거라면 하루에도 몇 병씩 먹는지라…….”
이미 많은 신세를 지고 있었던가.
그 정도라면 헌혈을 해도 피 대신 노란색의 봉봉 드링크가 뽑아져 나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이미 약간 누런 게…….
‘쯧, 이미 글렀나.’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찼다.
바쁜 와중에도 이럴 틈이 있는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미 여러 번의 만류에도 그는 완고하게 거절했었다.
“정말 혼자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는 마지막까지도 나와 함께 가겠다는 의견을 내보인다.
실제로 나와 셀 수도 없이 많은 전장을 휩쓸던 강준하다.
그라면 다른 자들보다 훨씬 나은 동료이긴 했다.
또한 강함도 강함이지만 항상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는 능력이 특히나 도움이 되었다.
아스티란에 있을 때도 날뛰던 나를 말리는 역할을 주로 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골드 드래곤을 마주칠지도 모르기에 데려갈 수 없다.
그의 바쁜 스케줄도 그렇고.
“아무리 너라도 위험할 수 있다. 널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명령이라면 그 어떤 위험도 감수하겠습니다.”
“그래서야.”
또 내 명령을 지킨답시고 제멋대로 목숨을 내던진다면 곤란했다.
이미 그런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다.
여전히 불안해하는 강준하에게 입꼬리를 들어 올려 보였다.
그제야 그는 포기하고 입을 다문다.
“그럼 다녀오지.”
그는 내가 비행기에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 * *
“여기인가.”
공항에서 내려 차로 두어 시간.
넓은 풀밭이 보이는 한적한 시골이다.
뜬금없이 백색의 탑이 세워져 있긴 해도 그럭저럭 주변과 어우러진다.
‘우선 오긴 했는데…….’
마탑이 동네 뒷산도 아니고 쉽게 들어갈 순 없을 것이다.
무작정 때려 부순다면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래서야 원래 온 목적에 맞지도 않는다.
우선 머리 좀 식힐 겸 돌아다녀 보기로 마음먹었다.
사람도 없는 풀숲을 걷는데, 함께 온 아렐리아가 주머니에서 빠져나왔다.
“[바로 들어가시지 않네요?]”
“글쎄…… 보호 마법과 결계가 몇 개나 있을지도 모르겠고. 파괴하는 거야 문제는 없다지만 그 즉시 침입이 알려지겠지.”
“[미다스의 손 연구소, 그때 그 물약을 사용하면요?]”
그녀는 부르르 떨며 입맛을 다신다.
다시금 그 역겨운 마나 봉인의 물약 맛이 떠오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몇 병이나 남았던가.
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자진해서 페널티를 안고 들어갈 순 없었다.
딱히 맛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고.
“몰래 결계를 파괴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소리 내지 않고 잠입하려면 잠깐 마나를 역류시켜 사이를 비집고 나가는 방법을 쓸 수 있어요. 그 정도라면 침입자가 누군지도 모르겠죠. 하지만…….]”
그녀는 설명을 하다 뚱한 얼굴을 했다.
영문을 모르겠지만 은근 자존심이 상해 보이기도 했다.
“[한두 개라면 모를까 분명 고서클 마법이 몇 개씩이나 중첩되어 있겠죠. 고작 인간의 마법이지만 9서클인 저 혼자로는 힘들어요. 적어도 7서클 마법사 20명, 8서클이라면 10명 정도. 대충 환산해도 그 정도의 마법사들이 필요하겠군요.]”
파닥거리는 아렐리아의 날갯짓에서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남의 마법을 소리 없이 파훼하는 일이라 그런 걸까.
전 세계에 있는 고위 마법사 헌터들을 다 긁어모아도 그 정도는 안 될 터였다.
“많긴 하군.”
“[고위 마족들을 전부 호출할까요? 계약 없이 오는 것이라 힘은 좀 빠지겠지만…… 일단 물량으로 밀어붙이면 되지 않을까요.]”
“그 마기는 어떻게 감당하려고.”
몇십 명의 고위 마족들이 한꺼번에 마법을 쓴다라…….
지구 반대편의 마탑까지도 알아차릴 방법이다.
나중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내가 마왕임을 밝히기는 곤란했다.
아렐리아는 그제야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알아채고, 멋쩍은 듯 헤헤 웃는다.
“뭐, 천천히 생각해 보지.”
“[저도 계속 고민해 볼게요. 몇 가지 아티팩트를 사용하면 되려나…….]”
급한 것도 없으니 일단은 느긋하게 생각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김상수가 죽어 나자빠지진 않겠지.
보통의 마법사 체력이라면 약간은 걱정했겠지만 그라면 전혀 문제없다.
닭가슴살과 프로틴을 매일같이 갈아 먹는 헬스 중독자니.
지금도 감옥에서 근 손실 온다며 맨몸 운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냥 하던 대로 하시죠. 인간 제깟 놈들이 마석으로 하면 뭘 하고 있겠어요. 그냥 폭탄 같은 거나 만들겠지.]”
아렐리아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재잘거린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했다.
점점 길은 험해지고, 주변은 울창한 나무들로 가득하다.
풀벌레 소리나 들리는 가운데, 내 귀에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그나저나 강준하 그 인간 놈, 재수 없는 낯짝부터 고고한 척하는 게 전부터 마음에 안 들–]”
“아렐리아, 조용.”
내 말에 그녀는 짜리몽땅한 앞발로 입을 틀어막는다.
그러곤 내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주변을 훑었다.
“……끄윽-”
자세히 들어 보니 그건 고통에 찬 신음이었다.
그것도 애써 숨죽이려 하지만 차마 막지 못해 흘러나오는 소리.
천천히 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반인 수준으로 풍기게끔 맞춘 마나의 양도 가능한 줄인 상태.
마침내 도착한 곳은 작은 동굴이었다.
아렐리아에게 눈짓을 주자 자리 잡고 있던 어깨에서 떨어져 나온다.
곧 그녀는 입구 한가운데 서서 사방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몸뚱이에 눈을 부라리는 모습을 뒤로하고 동굴로 들어갔다.
“흐윽…… 끅…….”
“……해독제도, 해독 마법도 통하지 않아! 대체 무슨 독에 당한 거야??”
“……8서클, 큭, 독…… 마법…….”
“스스로 치유할 수도 없고…… 나는 7서클이라 방법이 없어……. 아, 어떻게 하면 좋아…….”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들의 당혹스러움이 잘 느껴진다.
아마 한 명은 죽어 가는 중이리라.
또 다른 한 명은 그걸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인데.’
7서클 마법사라는 가느다란 목소리의 여자.
왠지 모르게 익숙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점점 다가갈수록 기분은 확신으로 변했다.
“대체 무슨 방법을 써야 하지……? 이럴 때 마탑장님만 있으셨다면…….”
“……신연주?”
“누구…… 진 헌터님!?”
동굴의 끄트머리에는 역시나 신연주가 있었다.
그간 고생했는지 항상 윤기 나게 손질하고 다녔던 단발머리는 부스스하다.
생채기 가득한 얼굴도 그렇고, 군데군데 찢어진 로브 위로 드러난 팔에도 피가 엉겨 붙어 있다.
“정말 진 헌터님 맞으신가요? 대체 여긴 어떻게……?”
“흡…… 누구……?”
“에밀리, 일어나려 하지 마!”
옆에 누워 있던 여자가 경계심을 숨기지 못하고 반쯤 일어난다.
하지만 그 정도만 해도 힘에 부치는지 바로 숨을 몰아쉬며 쓰러졌다.
긴 금발을 한쪽으로 땋은 에밀리라는 자.
그녀 역시 마법사인지 마탑 특유의 로브를 입고 있다.
상처투성이인 것은 신연주와 비슷했지만 상태는 더욱 나빠 보였다.
“큭…… 아악!!”
“에밀리!!”
고통이 심해지는 것일까.
애써 신음을 참던 그녀가 눈물범벅인 얼굴로 비명을 지른다.
가까이서 보니 이미 시력마저 잃은 듯 초점이 흐리다.
“무슨 상황인지는 나중에 묻겠다. 아렐리아!!”
“[네에~?? 마왕님, 무슨 일 있으신가요?]”
내 부름에 아렐리아가 뽀르르 날아온다.
경쾌한 날갯짓 소리가 멈추고, 도착한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법사들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았는지 재빠르게 다가온다.
“독 마법인 것 같군.”
“[알겠어요. <큐어 포이즌>!!]”
그녀는 바로 앞발을 얹고 마법을 시전했다.
검붉은 마나가 일렁이더니 곧바로 에밀리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고통에 찬 거친 숨소리가 잦아든다.
독에 중독된 푸른 얼굴색도 빠르게 돌아오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저는 다시 밖에 나가서 경계 서고 있을게요! 또 필요한 게 있다면 불러 주세요!]”
아렐리아는 우리를 흘깃 쳐다보더니 바로 밖으로 향한다.
신연주는 아직도 얼떨떨한 얼굴이다.
“대체 이 헤츨링은……? 아니, 우선 감사합니다. 에밀리를 잃는 줄 알았어요…….”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고통이 사라지자 기절해 버린 에밀리의 몸은 축 늘어진다.
신연주는 허둥대며 편안히 몸을 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려 서둘렀다.
‘보아하니 영국 마탑의 소속인가.’
대체 왜 마탑 본부의 마법사가 여기에 누워 있는 건지.
하지만 정신없어 보이는 상황이기에 잠자코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편안하게 에밀리를 눕힌 뒤, 회복 마법을 시전했다.
“<리커버리>!!”
마법이 발동되자 에밀리의 찡그린 얼굴이 천천히 펴진다.
그제야 한숨 돌렸는지 그녀가 참았던 눈물을 터트린다.
덜덜 떨리는 손은 연신 에밀리의 뺨을 쓰다듬는다.
“으흑…… 정말 감사합니다…….”
중독된 상태에서 사용해 봤자 회복 마법은 독의 효과를 더 가중시킬 뿐이다.
그녀로서는 차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안심하고 있는 지금도 얼굴에는 자신의 무력함을 탓하는 기색이 가득하다.
“에밀리는 제 오랜 친구예요. 아스티란에 가기 전부터 알던 사이였죠. 하필 이렇게 둘이 귀환자가 될지도 몰랐지만…….”
한참 눈물을 떨구던 그녀가 로브 자락을 쥐고 눈을 벅벅 문지른다.
눈가는 이미 벌겋게 변한 지 오래였다.
“친구도 좋지만 본인도 좀 살피는 게 어떤가.”
인벤토리에서 치유 물약 하나를 던져 주었다.
그녀는 그걸 얼떨결에 받아 들곤 멍하니 나를 바라본다.
나 역시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 여기저기 나 있는 상처를 쳐다보았다.
“아…….”
눈치챈 듯 그녀는 황급히 물약을 삼킨다.
곧 몸 상태가 완전히 돌아왔는지 훨씬 편해 보이는 낯빛으로 변했다.
“그래, 이제야 이야기할 상태가 되었군.”
나는 동굴의 벽에 비스듬히 기대었다.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는데, 그녀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는다.
“이야기…… 그래요. 진 헌터님도 영국 마탑 때문에 오셨군요.”
“김상수가 납치되었다던데, 어떻게 된 거지.”
“마탑장님…… 하…….”
말꼬리를 흐린 그녀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