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SSS랭크로 귀환한 사연 94화
“오셨군요, 마왕님!”
마왕성에 도착하자 아렐리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맞이했다.
아름다운 얼굴은 마치 해바라기처럼 밝고 환한 미소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경쾌하게 다가오던 발걸음이 점점 머뭇거린다.
내내 짓고 있던 웃음은 떠나간 지 오래였다.
“……괜찮으세요?”
저조한 기분을 여과 없이 드러냈던가.
그녀는 내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핀다.
말에는 나에 대한 염려로 가득했다.
하지만 표정 관리를 할 기분은 생기지 않는다.
“전에 말했던 마신의 기운이 서려 있다는 장소, 거기로 가지.”
나는 이전의 이야기를 다시금 꺼냈다.
창밖을 힐끗 보자 산 위의 탑은 여전히 고고하게 서 있다.
오늘은 날이 맑은지 구름마저 걷혀 검붉은 그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그…… 정말 가시게요? 가 봤자 별거 없을 텐데…….”
그녀가 말을 흐리며 나를 말린다.
얼굴은 점점 하얗게 질려 간다.
그때와 같은 반응이다.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인데.’
그저 무슨 용도의 탑인지 말해 주면 될 터.
굳이 가 보지 않아도 그 정도면 깔끔하게 해결된다.
하지만 그녀는 끝끝내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너, 그럴수록 더 의심스러워 보인다 생각하진 않는 건가.”
“앗…….”
“텔레포트나 시전해.”
“네에.”
그녀는 그제야 텔레포트를 시전한다.
하기 싫어 죽겠다는 마음은 숨기지 못한 채였다.
마나가 우리를 감싸고, 순식간에 눈앞의 풍경이 바뀐다.
공기마저 희박한, 높은 산이었다.
주변은 하얀 눈으로 뒤덮여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저 앞까지는 바로 이동하진 못하고요, 여기서 좀 더 걸어가셔야 해요.”
시선을 위로 올리니 산 끄트머리에 탑이 보인다.
여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발자국 하나 없는 새하얀 눈 더미를 밟으며 천천히 산을 올랐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내 뒤를 쫓아온다.
내 분위기가 계속 좋지 않은 탓에 침묵만 이어진다.
그저 눈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주변을 맴돌 뿐이다.
“저…….”
한동안 조용하다 싶더니 도저히 못 참겠는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말 많은 아렐리아로서는 잘 버텼다 싶었다.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공손하게 두 손으로 무언가를 받쳐 들고 있다.
자세히 보니 뜨끈한 김을 올리고 있는, 새까만 액체다.
‘……웬 커피?’
익숙한 원두의 향이 느껴지는 걸 보니 따듯한 아메리카노였다.
위에는 작은 꽃 하나가 둥둥 떠 있다.
이 주변에 계속 보이던 흰색의 꽃이었다.
“그…… 마왕님이 좋아하시는 커피 드시면서 올라가시는 건 어때요? 날도 춥고요, 그러니까…….”
그녀는 차마 끝말을 잇지 못하며 대뜸 텀블러를 내민다.
얼떨결에 받아 들자 손에 따끈한 온기가 맴돈다.
‘춥다니? 내가 추위를 느끼지 않는 건 잘 알 텐데.’
냅다 던진 변명치곤 비루했다.
어이가 없어 피식 웃자 그녀는 헤헤 웃으며 나를 마주 본다.
바보같이 헤실거리는 미소다.
하지만 눈치 보던 아까의 모습보다는 보기가 좋았다.
“아공간에 담아 두고 다녔던 보람이 있네요! 이제 좀 기분이 괜찮으세요?”
내내 그걸 신경 썼던가.
어차피 기분이야 가만히 두면 저절로 풀렸을 텐데.
하여간, 아렐리아는 마족답지 않게 세심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 덕분에.”
“다행이네요! 앗, 식기 전에 마시세요!”
“……께에엑-”
들고 있던 커피를 마시려는 때.
텀블러에서 들려서는 안 되는 소리가 들린다.
‘비명 소리?’
무언가 몬스터의 울부짖음과 비슷하기까지 했다.
의문을 삼키고 안을 살펴보았다.
검은 커피 위에 대조되는 흰 꽃이 지르는 비명 소리였다.
자세히 보니 자그마한 꽃 중앙에는 노란 촉수 몇 개가 꿈틀거린다.
‘잘못 본 건가?’
얼핏 보면 암술과 수술로 착각할 정도로 작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이건 명백한 촉수였다.
“……이게 뭐지?”
“앗,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먹을 수 있는 거랍니다!”
“전혀 먹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
“식물 형태 몬스터이긴 한데, 단맛이 나서 마족들은 많이들 먹는걸요?”
단맛이든, 쓰레기 맛이든 어찌 되었든 간에 몬스터다.
그리고 나는 이딴 걸 즐겨 먹는 마족도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 아렐리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생글거리며 텀블러를 향해 손짓한다.
어서 먹으라는 듯한 제스처였다.
“지구에서 보던 사극을 보니 체하지 않게 드시라고 이런 걸 띄우더라고요. 어때요? 후후 불어 드세요!”
다큐멘터리에 이어 사극까지 봤었나.
어쩐지 많이 보던 형태다 싶었다.
그래도 거기에서도 몬스터를 집어넣지는 않았을 텐데.
‘돌아가면 리모컨을 숨겨야 하나.’
어린아이가 TV를 보며 이상한 걸 따라 하면 이런 기분일까.
가정 교육을 잘못시킨 기분이다.
커피는 아직 입에도 대지 않았는데, 묘하게 입맛이 썼다.
“께에엑!”
텀블러를 기울여 몬스터가 있는 부분을 따라 냈다.
작은 비명 소리와 함께 꽃이 바닥에 떨어진다.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고 발로 밟아 짓이겼다.
얼마 남지 않은 커피는 이미 한입에 털어 넣은 뒤였다.
“앗…… 얼음의 망령꽃은 드시지 않는 건가요…….”
저게 저런 이름을 갖고 있던가.
꽃 이름치고 살벌하기 그지없다.
“다시는 몬스터를 내 입에 들이밀지 마.”
“네에…….”
차갑게 내뱉자 그녀는 시무룩하게 대답한다.
그래도 내내 말 없던 아까보다는 기분이 나아 보였다.
뒤를 돌아 걸음을 옮기자 다시금 나를 쫓는 그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몇십 분 정도 걸었을까.
산 정상으로 갈수록 마기가 점점 무겁게 내려앉는다.
과연 마신의 기운이 가장 짙다는 장소다웠다.
“후우…… 마기의 농도 때문에 힘드네요.”
아렐리아가 힘겹게 말을 내뱉는다.
“그래도 거의 다 온 것 같군.”
고개를 들자 검붉은 탑의 모습이 더욱 잘 보인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마왕님, 저는 계속 말렸던 거 아시죠?”
아렐리아가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한다.
얼굴을 바라보니 작은 소동물마냥 불쌍한 표정이다.
그녀는 내 대답만 바라며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걸 왜 묻지? 억지로 끌려왔다고 시위라도 하는 건가.”
“당연히 아니죠. 어찌 되었든 저는 말렸고, 마왕님은 스스로 오신 거고. 뭐, 이만하면 충분하겠죠.”
그녀는 눈동자를 굴려 힐끗 탑을 바라본다.
‘내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군.’
마치 탑에게 들으라는 듯 작위적인 말투다.
탑에게 귀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한 행동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급기야 그녀는 허공을 바라보며 시선을 회피한다.
“나중이라도 지금 그 행동을 설명해야 할 거야.”
“제발 설명이나 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여전히 수상쩍게 구는 그녀를 뒤로 한 채 걸음을 마저 옮겼다.
말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새하얀 눈밭과 어울리지도 않는 건물이 우뚝 서 있다.
벽돌처럼 보이나 재질조차 예상할 수 없는, 묘한 검붉은 외벽.
그리고 굳게 닫힌 문의 끝이 보이지 않는 건물의 높이까지.
처음 보는 낯선 건물에서 익숙한 향기가 느껴진다.
“……<검은 탑>?”
물론 생김새는 다르다.
세상 모든 빛을 모조리 흡수할 듯한, 칠흑같이 어두운 색도 아니다.
하지만 저렇게 기이한 분위기를 내뿜는 건, <검은 탑>밖에 없다.
‘안에는 뭐가 있는 거지.’
굳게 닫힌 문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팔을 뻗어 손잡이를 잡으려는 그때였다.
“딸꾹!”
뒤에서 아렐리아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마족도 딸꾹질을 하는 줄은 처음 알았다.
어이가 없어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얼굴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히끅……! 전 그 탑에 대해 아무 말도 못해 드려요!”
제 발 저린 아렐리아가 대뜸 소리친다.
“아직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딸꾹!!”
그녀는 급기야 가슴께를 퍽퍽 친다.
저래서야 제대로 된 대화를 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고개를 돌리고 다시 탑의 문고리에 손을 대었다.
퍼억-!!
“허?”
무언가 터져 나가는 소리.
그리고 손끝에 느껴지는 약간의 저릿함.
모든 게 어이없는 상황이 펼쳐진다.
문고리를 쥐고 있던 손은 튕겨져 나간 지 오래였다.
삐빅-
“미친…….”
내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을 때 꼭 울리던 경고음이 들려온다.
그와 동시에 떠오른 붉은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을 어지럽혔다.
[경고! 비정상적인 접근입니다.]
[아직 <검은 탑> @%층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해당 플레이어의 국가, 대한민국 채널은 현재 <검은 탑> 20층을 공략할 차례입니다.]
마치 19층이었던 잿빛 수수께끼의 미궁과도 같은 설명이다.
다른 점이라면 지금은 진입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
하지만 진입이고 나발이고, 이건 마계에서 절대 보여서는 안 되는 메시지였다.
“제가 탑에 대해 언질 드린 적은 없었어요, 그렇죠? 직접 찾아내신 거죠!”
그녀는 은근슬쩍 눈치를 살피며 말한다.
책임을 회피하는 듯한 말투였다.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간다.
“전에 말했던 율법인가…….”
“아무리 마왕님이라도 결국은 탑의 도전자셔서…….”
아렐리아는 굉장히 미안한 얼굴이다.
본인도 설명하지 못하는 게 답답해 보였다.
확실한 대답은 해 주지 않지만 어차피 이미 눈치챌 건 다 챈 상태다.
이 정도까지 상황이 떠먹여 주는데, 모른척할 수도 없었다.
“언젠가 탑을 공략하다 보면 마계에도 온다는 소리겠군.”
“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요. 율법에 따라 정확히 말씀은 못 드리지만 아마도……?”
아렐리아는 슬며시 웃음을 지으며 말꼬리를 흐린다.
아닌 척하지만 결국은 맞다는 소리였다.
‘차라리 미리 와 봤던 게 다행인가.’
“저는 아무 말도 안 했답니다, 그렇죠?”
아렐리아는 여전히 필사적으로 의뭉스러운 표정 연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기에는 영 재주가 없는지 어색하기만 하다.
그 꼴을 더 이상 봐주기 힘들어 바로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그래, 전혀 모르겠군.”
아렐리아는 내 대답에 만족했는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 뒤에 있는 탑에는 어느새 석양이 드리운다.
검붉은색의 건축물은 더욱 붉은색이 강조되어 빛난다.
<검은 탑>을 어서 공략하고 찾아오라는 듯이.
“……이만 지구에 가야겠군.”
그 모습을 보니 지구의 <검은 탑>이 생각난다.
슬슬 이곳의 일도 마무리되었으니 귀환할 때도 되었다.
“좀 더 아스티란에 있어 주시면 좋겠지만…… 안 되겠죠?”
그녀가 은근슬쩍 기대하며 말했다.
지구에 별다른 사건은 없으니 그래도 될 테지만 하루가 이틀이 되고, 그 이상도 가능할 터.
이 이상 과거의 인연들에게 발목 잡힐 순 없었다.
‘작별 인사도 충분히 했고.’
갑작스러운 귀환 탓에 신경 쓰이던 것도 이제는 전혀 없다.
한스는 여전히 못 미덥지만 카일이 있으니 제국 연합의 미래는 괜찮을 것이다.
뒷일은 남은 자들에게 맡기기로 이미 결심했다.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는 걸, 잘 알지 않나.”
“맞긴 하죠. 그래도 간간이 놀러 오세요. 이곳은 모두 마왕님의 것이니까요.”
아렐리아는 이내 포기한 듯 작게 웃는다.
손을 가볍게 휘두르자 차원의 문이 열린다.
일렁이는 마력의 문 안쪽에는 집의 거실이 살짝 비쳐 보였다.
“그럼 가실까요?”
“그래, 집으로.”
나와 그녀는 차원의 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