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SSS랭크로 귀환한 사연 93화
[으흐흑……!! 그렇지 않아도 몇 개 남지 않은 성물들을……. 난 이제 망했어…….]
“아리엘 교단에 성물이 한두 개 없어지던 것도 아니고.”
이제 와서 웬 쓰잘데기 없는 투정인지.
오랜 전쟁통에 사라진 신전이며 성물이 몇 개인지 셀 수도 없다.
저까짓 물건 몇 개 없앤다고 망할 교단이면 진즉 망했을 터였다.
[그것들도 다 네가 그랬잖아! 심지어 서쪽과 동쪽에 있던 대신전들도 무너트리고!]
그런 적이 있었나.
기억이 좀 가물가물한데,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마 대규모 군대를 이끌 적에 가야 할 길목을 떡하니 막고 있던 신전이었나.
[내가 특별히 아끼던 예언자도 죽도록 때린 후 첨탑에 가둬 놓고! 평생 동안 못 나왔지, 아마!?]
“내 앞날이 고난만 가득할 거라 예언했지 않나.”
면전에 대고 저주를 퍼붓는데 누가 가만히 있는단 말인가.
말이 예언이지 사실상 고상하게 포장된 쌍욕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예언이 틀렸었어?]
이번만큼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게도 내 운명은 어둡기 짝이 없었으니까.
[내 예언자는 맞는 말을 한 것뿐인데…….]
“맞는 말을 해도, 기분 나쁘게 말했다면 후드려 맞아야지.”
[하여간 한순간도 지는 법이 없네…… 짜증 나.]
그녀는 허망하게 중얼거린다.
어느새 눈물은 그쳤는지 울음기는 사라진 상태였다.
콰아앙-!!
마침 타이밍 좋게 큰 굉음이 들린다.
지상에 있는 크레아시론이 신전을 때려 부수는 소리였다.
‘여기가 아마 마지막 남은 대신전이었나.’
대륙 통틀어도 이만한 크기의 신전은 없다.
모르긴 몰라도, 이제 아리엘의 교단은 크게 힘을 잃을 것이다.
제 신전 하나 지키지 못하는 신을 따를 자는 별로 없을 테니까.
[헉, 당장 저걸 말려!! 너는 대체 신전을 몇 개나 없애야 직성이 풀리는 거야?]
아리엘 역시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는 다급하게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빌빌 기면서 말해도 들어줄까 말까 한데, 명령에 가까운 어조라니.
자연스레 내 말투는 띠꺼울 수밖에 없었다.
[뭐…… 뭐?? 이제는 <그녀>가 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잖아!]
“그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너도 딱히 좋아하는 신은 아니어서.”
축복도, 그럴싸한 아티팩트 하나 던져 주지 않았던 신이다.
뭔가 요구하려면 뭐라도 손에 쥐여 주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쥐뿔도 없으면서, 이제 와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신벌이 무섭지도 않은 거야!?]
그녀는 이제 협박까지 시도한다.
나는 그녀의 말에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런 걸 할 수 있었으면 진작에 했겠지.’
쿵-!!
[아악!! 안 돼!!]
콰앙-!!
[악!!]
계속 신전을 때려 부수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리엘의 비명도 그에 맞춰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묘하게 그 둘의 합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훌륭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고 있는 기분이다.
하지만 즐거워하는 건 나뿐.
보이지는 않지만 그녀의 얼굴은 점점 사색이 되어 가고 있을 건 뻔했다.
[아리엘, 내 마왕에게 그런 말이 통하지 않아. 방법을 바꿔 보는 것이 어떤가.]
[방법……?]
보다 못한 마신이 안타까운 어조로 말을 했다.
잠시 신들끼리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무언가 대책 회의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까지 하긴 싫은데…….]
[어쩔 수 없지 않나. 협박을 하면 더욱 엇나가는 인간이니.]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그녀가 시무룩하게 다시 등장했다.
대체 뭘 하려고 하기에 이러는 건지.
마지못해 억지로 한다는 말투에 약간의 호기심이 생긴다.
[큼큼…… 인간이여, 우리 거래를 하자.]
방법이 저거였나.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온다.
‘마신이 나를 잘 파악하고 있나 본데.’
아마도 어르고 달랜 결과일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구미가 당긴다.
신과의 거래라니.
몇천 년 역사를 가진 아스티란에서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
아마 인간으로서는 내가 최초이지 않을까.
“내가 거래할 것은 신전을 부수지 않는 것이겠지?”
[맞아, 그리고 내가 줄 것은…… <행운의 축복>이야. 그것도 특급으로 내려 주지.]
<행운의 축복>이라면 몇 번 들어 본 적 있었다.
행운과 운명을 주관하는 그녀의 주요 권능 중 하나였다.
축복을 받은 자에게는 엄청난 행운이 내려진다 한다.
‘그 와중에 특급 축복이라…….’
여태껏 인간에게 내려진 축복은 상급이 최고였다.
그것만 해도 로또 1등 정도는 가벼운 수준이다.
특급이라면 아마 길 가다 로또 용지 20장을 줍는데, 그게 모조리 1등에 당첨될 정도가 아닐까.
[그런데, 이 축복은 너에게 직접 내리진 못해. 그래도 네 운명을 읽으니 적절한 물건이 있네.]
“물건? 혹시 무작위 상자를 말하는 건가.”
[그건 이미 마신의 권능이 깃들어서 불가능해. 하지만 그걸 배가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어.]
그녀는 애매모호한 말을 지껄인다.
역시 그녀도 신이긴 하다는 걸까.
저렇게 돌려 말하는 수법은 그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인상을 찌푸리자 그녀가 재빨리 말을 더한다.
[잠깐! 그걸 보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거야. 장담할 수 있다고!]
“흠…….”
저 정도까지 말하는데 한번 믿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처절한 반응을 보아하니 거짓은 아닌 듯했다.
긍정의 의미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신성력이 내려온다.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포근함이 몸을 감싼다.
[<행운의 축복: 특급>이 당신의 운명에 관여합니다.]
[<업적: 신과 거래하는 자>를 달성했습니다.]
[<신과 거래하는 자>: 최초로 신과 거래한 인간에게 내려지는 칭호입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이는 다시 없을 영광임은 확실합니다. 거래 성공률 +200%, 양심 –10%]
[더 내려갈 양심 수치가 없습니다. 해당 수치는 0으로 고정됩니다.]
[다양한 신들이 당신에게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부정적인 영향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양심 수치라는 것도 계산되던가.
게다가 0이라니.
‘나같이 착실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똥 씹은 얼굴로 있는데, 아리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고 있어!? 줄 건 줬으니 빨리 가서 저거 좀 막아 봐!]
“뭐, 그러지.”
나는 바로 뒤를 돌아 계단으로 향했다.
그제야 안심한 듯 작은 한숨 소리가 들린다.
[다시는 보지 말자…….]
“피차일반이다.”
[저…… 저!!]
[아리엘, 다 끝났으니 그대가 참아.]
나 역시 굳이 신전을 오고 싶진 않았다.
이런 일만 아니었다면 절대 발도 들이지 않았을 텐데.
한껏 신성함을 드러내는 건물 모양이며 거들먹거리는 신관들까지.
고상 떠는 그 모습들은 내가 딱 질색하는 것 중 하나였다.
‘차라리 용병대와 먼지와 땀으로 얼룩진 곳을 뒹굴고 말지.’
“응? 벌써 오셨습니까, 주인님?”
위로 올라가니 크레아시론이 바로 발견하고 뛰어온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신전은 아직 절반밖에 파괴되지 않은 상황.
그만하라고 손짓하니 그는 재빨리 하던 일을 멈춘다.
망치를 열심히 휘둘러 대던 스켈레톤들은 하나둘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아도 됩니까?”
“이만하면 됐어. 원하던 바는 아니지만 비슷한 것도 얻었고.”
“그렇습니까? 그럼 바로 나가시죠.”
그는 들고 있던 몽둥이를 스태프마냥 휘둘렀다.
곧바로 텔레포트가 시전되고, 신전이 보이는 인근 언덕에 도착했다.
쿠우웅-!!
기둥 몇 개를 무너트렸는지 멀리 있던 신전이 허물어진다.
순식간에 거대한 신전은 반 토막이 났다.
이미 주변은 아우성치는 신관들로 아비규환과 다름없었다.
아리엘의 절규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저거 다시 세우려면 고생 꽤 하겠는데.”
그래도 완파된 건 아니니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옆이 유난히 조용하다.
의아한 마음에 크레아시론 쪽으로 흘깃 시선을 돌렸다.
그 역시 멍하니 신전을 바라보고 있다.
표정을 보아하니 무언가 떠올리는 듯하다.
“……테론 왕의 무덤도 저렇게 무너졌겠죠.”
생각해 보니 무덤이 파괴되는 모습은 못 보고 나왔던가.
저렇게 좋아할 줄 알았다면 그 정도 여유 시간은 줄 것을.
나중에 폐허라도 가 보라 일러 줘야겠다 생각했다.
“혹시 이 이후에 또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그의 말에 다음 계획을 떠올려 보았다.
‘남은 건 마계인가.’
이제 아스티란에서의 일은 모두 마무리 지은 상태.
크레아시론이 필요할 만한 일은 없었다.
고개를 젓자 그가 덜그럭거리며 턱뼈를 움직인다.
그러나 나오는 말은 없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고, 그제야 그는 입을 어렵사리 뗀다.
“저는 딸아이의 무덤을 찾아가 볼까 합니다.”
그가 종종 이야기해 왔던 말이다.
대충 예상한 바이기도 했다.
복수를 마무리한 자가 가야 할 곳이야 뻔했다.
“이제야 가 볼 면목이 생기는군요.”
크레아시론은 슬쩍 웃는 시늉을 한다.
억지로 짓는 미소에는 쓸쓸함이 묻어나 보인다.
그 모습에 나 역시 덩달아 기분이 묘해진다.
‘면목이라…….’
나는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복수를 완성해야만 찾을 수 있는 곳은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내 혼잣말에 대답한다.
아마 본인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구태여 오해를 풀어 주지는 않았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럼 이만…….”
텔레포트를 시전한 그의 몸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울창한 숲속에는 나 혼자만 남아 버렸다.
주변은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그녀의 무덤도 이 근처였던가.’
석양을 닮은 눈동자를 가졌던 사람이 떠오른다.
지금의 나를 만든, 멸망한 왕국의 왕녀.
‘내가 찾아갈 수 있을까.’
지나간 기억에 입맛이 쓰다.
나 역시 살아갈 이유가 없던 적이 있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전투와 낯선 세계에서의 삶.
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온전한 정신으로 버티는 건 힘들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했다.
‘이래서 아스티란이 싫었는데.’
여전히 그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시선조차 두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옛 기억들은 천천히 떠오른다.
[그쪽을 보면 마치 죽어 있는 것 같아요. 분위기 좀 풀어요. 그러니까 아무도 곁에 다가오지 못하잖아요.]
[또 너인가.]
[다가올 사람이 저 말고 누가 있겠어요? 누구 하나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얼굴인데. 오늘은 오랜만에 날씨가 좋아요. 우중충하게 이러지 말고, 밖으로 나가죠.]
[……젠장. 너는 대체…….]
[그래요, 차라리 그렇게 욕이라도 해요. 무슨 사람이 그렇게 감정이 없어요?]
애써 잊고 있었지만 결코 잊히지 않는 추억들.
나는 언제쯤 이걸 떨쳐 버릴 수 있을까.
차마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는다.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저 바닥만 바라보았다.
‘아직은 아니야.’
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할지.
강력하고 수많은 적을 상대하는 건 숨을 쉬는 것만큼 쉬워도, 여전히 이것만큼은 어려웠다.
나중에, 정말 나중이라면.
……언젠가는 가능할 날이 오리라.
작은 한숨과 함께 마계로 향하는 차원의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