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SSS랭크로 귀환한 사연 89화
“내가 아는 것은 단 하나. 드래곤이라면 <예언>의 인간들을 당연히 지지하리라는 것, 그것뿐이야.”
“……당연한 일이라.”
“그래, 제약 때문에 그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여하튼 인간을 방해하려는 자들은 6차원계의 종족이 전부여야 정상이야. 그대가 말했던, 탑을 방해하려는 드래곤은…… 솔직히 나로서도 짐작조차 가지 않는군.”
그의 얼굴은 이제껏 본 것 중 제일 진지하다.
그걸 떠나서도 드래곤은 오직 진실만 말하는 종족이다.
결코 거짓은 아닐 터였다.
“그래도 그런 드래곤이 많지는 않을 거야. 장담하지. 지금의 우리 종족들은, 인간들에게 관여하는 것 자체를 혐오하고 있으니. 아스티란에 있는 드래곤도 오직 나뿐. 거의 대부분은 차원의 틈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어.”
“그렇다면 너는 왜 아직 대륙에 머무르고 있지?”
“태어난 지 몇백 년 되지 않았는데 남은 용생을 그런 따분한 곳에 낭비할 순 없지 않은가. 아직은 인간과 어울리는 게 더 재밌고.”
유난히 무게감 없다 생각했는데, 그는 예상보다 훨씬 어렸다.
그 정도면 갓 헤츨링을 벗어난 수준.
내 생각을 알아차린 듯 그는 멋쩍게 웃어 보인다.
오래 살아온 고룡이라면 모를까, 헤르멘에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그저 그런 수준이겠지.
“그래도 드래곤들을 뒤지고 다니지 않게 되어 다행이군. 황금빛 드래곤이 한둘은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결국 크게 얻은 정보는 없었다.
애초에 이놈은 왕따 드래곤이다.
중요한 단서를 얻을 거라 기대조차 않는 게 맞겠지.
‘그나마 모든 드래곤을 적으로 돌리지 않게 되어 다행인가.’
물론 내가 상대하지 못할 적수라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지구를 멸망시키겠다 나서는 순간이 문제다.
나에게는 세상 자체가 인질과 다름없다.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자와, 지켜야 할 것이 없는 자.
이미 시작부터 손해인 싸움이었다.
‘차라리 일대일로 덤벼 주면 좋겠군.’
하지만 그 골드 드래곤은 절대 그렇게 하진 않겠지.
이제껏 한 행동들을 보아하니 확실하다.
그는 은밀히 행동하는 걸 즐겨 하는 자였다.
“저…… 그…… 친우여?”
계속 골똘히 생각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였다.
헤르멘이 나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제야 자세히 그를 살펴보니 마치 뭐 마려운 강아지 같은 얼굴이다.
“뭐가 불만이기라도 한가?”
“그게 아니라…….”
그는 한참을 말을 고른다.
무언가 고민이라도 하는 건가.
빤히 지켜보자 그제야 입을 뗀다.
“……골드 드래곤의 개체는 오직 하나뿐이야.”
“뭐? 대체 누구지?”
왕따 드래곤도 제법 쓸모가 있었나.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그는 점점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드러내었다.
“설마 그와 적대하려는 건가? 안 돼……. 그건, 그건 괴물이야. 그는 거의 세계의 처음을 같이 한 자, 그리고 세상의 끝도 같이 할 자일 거야. 수명이 다 되었음에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윤회에 들지 않는 유일한 드래곤이고.”
“그게 무슨…….”
세상에 태어나서 죽지 않는 존재는 없다.
그건 아무리 드래곤이어도 피해 갈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세계의 처음을 같이 한 자라니?
‘거의 신과 다를 바가 없잖아.’
생각보다 더 엄청난 것이 튀어나왔다.
같은 드래곤이 괴물이라고 주저 없이 칭할 정도라니.
그 정도 존재가 할 일도 없이 왜 인간 세계에서 난동을 피우고 다니는 것인지.
단순한 재미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과했다.
“그를 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돼! 친우여, 늦지 않았으니 다 포기하고…….”
“이미 있는 힘껏 방해하고 있는데 말이지.”
영원한 잠에 블랙마켓, 그리고 마르바스까지.
사실상 그가 조용히 있어 주길 바라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나라도 누가 이 정도 깽판을 놓는다면 밤길 조심하라고 협박한 지 오래였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매일같이 이를 갈고 있겠지.
“……망했군.”
그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다.
공포와 슬픔, 안타까움까지.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그에게서 흘러나온다.
나는 그저 담담하게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릴 뿐이다.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는가?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야!”
오히려 헤르멘이 더 답답한 듯 소리친다.
누가 보면 내가 아니라 그가 쫓기고 있는 것처럼 느낄 정도였다.
“글쎄…….”
모든 것을 듣긴 했지만 여전히 조급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저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되새길 뿐.
‘어렵겠지만 못할 일도 아니다.’
강한 적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골드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진 않겠지.
스스로 죽지 않는다면 누군가 죽여 주면 될 터.
오히려 그처럼 강력한 상대가 대놓고 나서지 않는 것이 여전히 의아하기만 했다.
“그자의 이름이 뭐지?”
“너는 대체…… 한가하게 이름이나 물을 때가 아니지 않은가. 후…….”
여유롭게 질문을 하는 나를 보며 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다.
“아마 그의 이름을 정확히 아는 것은 오직 한 분밖에 없을 거야. 우리는 그저 렌이라고 부른다.”
“렌이라…….”
상대해야 할 적의 이름까지 알아냈다.
이 정도면 예상치도 못한 큰 수확이었다.
“친구비,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군.”
그는 나의 눈을 정확히 바라보지 못하며 시선을 돌린다.
나는 말없이 그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 * *
적은 알아냈지만 그의 목적은 전혀 모르는 상태.
기존의 블랙마켓이 잠적한 탓에 조그마한 정보조차 없다.
‘내가 자리를 비운 뒤, 무언가 일이 없었을까.’
골드 드래곤의 흔적은 보통 지구에서 발견되었다.
혹시 모를 정보를 얻기 위해 오랜만에 1랭크 채널을 열었다.
하지만 채널에는 여전히 쓸모없는 수다가 가득하다.
[가을하늘: <검은 탑> 20층을 준비해야 되는데…… 국내 랭커분들을 모시고 회의라도 해야 할 듯합니다.]
[혜라: 이제는 공략법도 없을 테니 조심해야 하긴 하죠. 그나저나 나비 길드장님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신 것 같고…… 걱정이네요.]
[하얀나무: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처음 쓰러지실 때보다는 많이 괜찮아지셨습니다.]
[홍: 뭐, 그래도 다른 나라들은 아직도 15층도 못 깼는데, 이참에 여유 좀 가지자고.]
[영원: 맞습니다. 다들 길드를 한번 재정비할 필요도 있겠고요.]
[마법최고: 그렇지 않아도 한국 마탑은 당분간 참여 못해요. 마탑 본부 때문에 난리거든요.]
[마탑대표: 이 너구리, 진짜 내가 조만간 멱살 한번 잡는다…….]
다들 당분간은 쉬어 가는 타이밍이었다.
그러고 보니 연이은 탑 공략으로 지칠 만도 했다.
‘딱히 큰 사건은 없나. 돌아가도 별건 없겠군.’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별다른 특이 사항은 보이지 않았다.
‘먼저 일을 쳐 주면 모를까, 어차피 숨어 있는 놈을 찾는 건 불가능해.’
확실한 건 단 하나.
무수히 많은 차원계 중 지구에 유달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
아마 돌아가야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겠지.
우선은 아스티란의 일을 마무리하기로 마음먹었다.
황제로서 마지막 업무를 위해, 궁에 있는 집무실을 정리하라 일렀을 때였다.
[주인님, 혹시 김지연이라는 헌터 아십니까?]
뜬금없이 크레아시론이 연락해 온다.
요새 블랙마켓을 오간다더니 마주쳤던 건가.
[알다마다. 그림자 길드의 소속이니.]
그의 말투에서는 흥분이 잔뜩 묻어난다.
마치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와 같았다.
[그렇습니까? 상당한 실력의 연금술사더군요. 슬슬 연금술에도 관심 있었는데, 함께해 보고 싶습니다.]
정체야 알아서 잘 감출 테니 문제는 없었다.
특히 김지연이라면 크레아시론을 평생 마법사로 알 것이다.
그런 쪽으로는 둔해서 눈치라곤 쥐뿔도 없었으니.
흔쾌히 허락하자 그는 한동안 바쁠 거라며 신나 한다.
[아, 그림자 길드에 갈 거라면 당근 하나 들고 이도윤을 찾아가. 흔들면서 가면 더 좋고. 내가 보냈다면 바로 알 거다.]
[당근 말입니까……?]
[보자마자 바로 눈치챌 거야.]
이미 탑 19층에서 얼굴을 비쳤으니 상관없겠지만 그래도 직접 소식을 알리는 게 좋겠지.
당근을 받고 입이 떡 벌어질 이도윤을 상상했다.
그 얼굴을 못 보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전에 1랭크 채널에서 당근을 흔들어 달라고 했으니 원하는 대로 마음껏 흔들고 오라 언질했다.
* * *
며칠을 업무에 집중했다.
새벽에 일어나 하루 종일 일만 하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모두 내가 없어질 제국 연합에 대한 처리였다.
“마왕님…… 오늘도 이러고 계시는 거예요?”
아렐리아가 걱정스럽게 물어 온다.
계속 서류만 훑는 내가 걱정된 탓일까.
그녀는 집무실 밖에조차 나가지 않는 나를 매일 찾아왔다.
“이거라도 마시면서 하세요.”
그녀가 책상 한편에 커피를 놓는다.
텀블러에는 아직 차가운 기운이 맺혀 있다.
아마 이걸 사 오기 위해 지구에 직접 다녀온 모양이다.
한 모금 하자 이제야 숨 돌릴 틈이 난다.
‘이것도 버릇 된 건가. 오랜만에 일하는 건데 할 만하군.’
걱정 어린 시선들에 비해 그닥 힘들지는 않았다.
전부터 이상하게 폭군은 참아도, 일을 내팽개치는 왕은 참을 수가 없다.
그게 내가 되는 건 더더욱.
그 와중에 손에 익었는지 속도는 빨랐다.
심지어 거의 마무리와 다름없는 상태.
곧 아스티란을 떠날 때가 되어 가고 있었다.
“폐하, 여기 영주들의 동향을 정리한 서류입니다.”
카일이 어김없이 보고서를 들고 온다.
다시 서류를 봐야 할 때였다.
“여기에 둬. 그리고 아렐리아, 너는 마계로 가 있어. 같이 갈 곳이 있으니.”
나는 전에 보았던 탑에 대해 언급했다.
그녀는 무사히 넘어간 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보았던 <검은 탑>과 비슷해 보이는 그곳을 방문하겠다는 생각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
“마계요? 지구가 아니라요? 아, 설마 전에 둘러보신다는 거길…….”
그녀의 얼굴이 희게 질린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시선은 오갈 데를 못 찾고 있었다.
“준비…… 하고 있을게요.”
그냥 등산 좀 하자는데 준비 씩이나 필요할 일인지.
한 소리 하려는데, 그녀는 서둘러 마계로 가 버렸다.
‘대체 뭐기에 저런 반응인지.’
아렐리아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렸다.
책상에 널브러진 서류 뭉치를 대충 치우고, 보고서를 받아 살펴보았다.
대충 훑어보아도 거슬리는 점은 없었다.
“이 틈에 반란이라도 일으킬 줄 알았는데.”
겁이라도 내는 것일까.
제국에서 권력깨나 있다는 자들치고 소심한 행보다.
“귀족들이요?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황제의 자리가 사라진다 해도 제국에 대한 마음은 변치 않을 자들이지 않습니까.”
그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 역시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였다.
“아무렴, 내가 직접 뽑은 자들이니까.”
기존 왕국과 제국을 통합하며 이미 썩은 싹들은 모조리 잘라 냈었다.
지금 자리 잡고 있는 귀족들은 나에게 충성을 바친 자들.
수십 년이 흘러도 그들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몇 놈은 손봐 줘야 할 일이 생길 줄 알았는데.’
어찌 되었든 좋은 현상이다.
며칠 동안 어수선했던 황궁은 이제야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나가 해결되면 다른 하나가 생기는 법.
“친우여, 이 마족들 좀 어떻게 할 수 없는가? 대체 마족들이 왜 대륙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냔 말이야!”
오늘도 집무실 문이 벌컥 열린다.
요새 제집마냥 드나드는 놈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