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SSS랭크로 귀환한 사연 82화
“향이 좋군.”
나는 들고 있던 와인 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매력적인 레드 와인의 향기가 잔잔하게 풍긴다.
맛을 보려는 그때 앉아 있던 몸이 기우뚱한다.
“균형.”
“네…… 넵!!”
그제야 내 밑에 있는 기사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한 모금 머금자 바디감이 좋은 와인이 혀에 묵직하게 감긴다.
만족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사들은 거대한 돌과 철근 따위를 올린 채 엎드려뻗쳐 있다.
중력 마법까지 걸린 상태라 그 무게는 코끼리 몇 마리를 얹은 듯 무거울 것이었다.
“끄으윽…….”
“흐억!”
땀을 비 오듯이 흘리는 기사들은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얼굴들이다.
마나도 사용하지 않고 순수 근력으로 5시간째 유지하고 있는지라, 지탱하고 있는 팔뚝은 허물어질 듯 바들거린다.
그야말로 술이 절로 넘어가는 광경이다.
“오랜만에 훈련받으니 다들 기뻐하는군. 좋아할 줄 알았어.”
“폐하…… 저는 이제 그만하면 안 되겠습니까? 계속 제대로 된 식사도 못했는데…….”
한스는 울먹이며 나를 쳐다본다.
릴리스에게 납치당해 몇 달 동안 묶여 있었기에 한눈에 봐도 초췌해 보이긴 했다.
나도 방금 전 상황이 아니었다면 자비롭게 봐줬을 텐데.
“그런 놈이 와인을 모가지째 뜯어 마셔?”
“폐하가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 너무 기뻐서 그만…….”
퍽-!
들고 있던 와인 잔에 마나를 담아 한스의 얼굴에 정확히 적중시켰다.
깨지지는 않았지만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나뒹군다.
그의 한쪽 눈덩이는 순식간에 푸른 멍이 들었다.
‘대체 과거의 나는 이놈들을 데리고 무슨 전쟁을 했던 거지.’
기억은 제대로 나지 않지만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게 정녕 기사가 맞단 말인가.
차라리 시정잡배를 불러다 기사 서임식을 해도 이보단 나을 지경이었다.
힘들었던 일은 금방 잊고 노는 모습들이 긍정적이라고 해야 할까.
한심함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흐억……!”
흑사자 기사단에서 제일 막내인 기사가 결국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기절했다.
등 위에 올라가 있던 돌덩이가 쿵 소리와 함께 옆으로 굴러간다.
큰 돌은 바로 옆에 있던 기사를 쳐 버렸고, 그 역시 함께 쓰러졌다.
“어억!!”
“야!! 같이 쓰러지잖아!!”
균형을 잃자 한 명, 두 명 도미노처럼 부딪혀 바닥을 나뒹굴었다.
버티고 있는 기사는 이제 손에 꼽을 정도.
작게 한숨을 쉬고 올라타 있던 기사의 등에서 내려왔다.
“다들 쉬어.”
“허억…… 감사합니다!!”
“아스티란에 돌아가면 군기 한번 다시 잡아야겠군. 내가 없다고 배에 기름만 가득 차서는.”
혀를 차고 사방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기사들을 쳐다보았다.
전에 이 정도 훈련은 가뿐히 버텼던 것 같은데.
지금 상황이 마음에 차지는 않았다.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해야겠군. 그래도 이 정도라면 약간 정신을 차렸겠지.’
굳이 전쟁터도 아닌 이곳에서 군기를 잡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날 잡고 주먹질하지 않는 이상, 크게 바뀌지도 않을 놈들이다.
자유분방한 용병대를 오랜 시간 이끌었던 탓인가.
흑사자 기사단의 분위기도 비슷했다.
한동안 내가 없었기에 더 심화된 게 문제지만.
“저…… 폐하?”
카일이 초점 흐린 눈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입에서는 침을 줄줄 흘리고 있는 상태였다.
지저분한 그 모습에 한 걸음 물러서고,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아…… 쓰읍……. 아스티란에 돌아가신다니요?”
“말 그대로지. 너희와 함께 돌아가 볼 예정이다.”
“……그, 지구라는 곳으로 가지 않으십니까?”
그는 무언가 한껏 기대하는 표정이다.
아마도 내가 아스티란에 머무르는 걸 상상하는 듯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것마냥 기뻐하는 그를 보니 살짝 착잡한 마음이 든다.
“그건 아니야. 대륙에는 잠시만 머무를 뿐.”
“아…… 그렇습니까. 역시 그렇겠죠.”
카일은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고 다시 기사들에게 돌아간다.
그의 뒷모습에는 쓸쓸함이 묻어나온다.
‘어떻게 귀환한 지구인데.’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아스티란이 아니었다.
몇백 년 동안 있긴 했지만 나는 이방인에 불과했으니.
그래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왕 돌아가는 것, 목적을 이루고 나면 조금은 머무를 생각이었다.
‘한국 상황도 나쁘지 않은 것 같고.’
[홍: 와, 18층 난이도 미쳤는데?? 죽을 뻔했어.]
[가을하늘: 그래도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자유 길드분들.]
[세하세하: 근데 아직도 진 헌터님 소식은 없으십니까?]
[초코짱: 그러게.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지다니.]
[가을하늘: 무슨 일이 있긴 한 것 같습니다만, 괜찮을 듯합니다. 순위표에는 아직도 진 헌터님의 이름이 있으니…….]
[홍: 그 양반이 어디서 객사하는 게 더 이상하지.]
[초코짱: 하긴, 누가 누굴 걱정해.]
내가 하는 말은 전송되지 않지만 1랭크 채널의 대화는 여전히 읽을 수 있었다.
일방적인 소통이긴 해도 헌터들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 무리는 없었다.
듣자 하니 딱히 큰 사건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벌써 <검은 탑>을 18층까지 공략한 상태였다.
‘이 정도면 99층도 금방일 것 같은데.’
점점 공략의 난이도는 올라가는 건 확실했지만 그래도 헌터들의 수준도 향상되고 있다.
그들은 탑에서 나온 아이템과 경험들을 바탕으로 계속 성장하는 중이었다.
[홍: 근데 19층 이후부터는 어쩌지? 여태껏 용병왕이 알려 준 공략대로 진행했잖아. 이 뒤부터는 뭐가 나올지 짐작도 안 가는데.]
[마법의성을지나: 그때는 5개 길드 모두가 참여해야 하지 않을까요? 다 같이 행동한다면 조금 괜찮겠죠.]
[홍: 우리야 상관없다지만……. 아레스 저 꼰대가 제일 문제야. 용병왕 없어진 뒤로 아예 잠적했던데.]
[초코짱: 같이 데려가기라도 한 거 아닐까요?]
[홍: 용병왕이? 아무리 강준하를 아낀다지만 그건 아닐 듯. 워낙에 독고다이라.]
[진우주최고최강위대한형님: 형님, 보고 계시면 제발 한마디라도 해 주세요…….]
[도유: 맞습니다. 진 님, 어딘가에서 이걸 보고 있다면 당근이라도 흔들어 주세요.]
박민호와 이도윤이 나를 백방으로 찾고 있나 보다.
강준하 역시 안 봐도 뻔했다.
미친개마냥 오만 곳을 들쑤시고 있을 것이다.
오래 연락이 되지 않을 거라 주변에 언질은 주고 왔지만 부족한 듯했다.
‘크레아시론을 이용하면 스켈레톤으로 연락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잠시 스켈레톤의 손에 당근을 쥐여 보내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
지금은 딱히 연락을 취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진우주최고최강위대한형님: 도윤 헌터님…… 바쁘신가요? 같이 버림받은 사람들끼리 술이라도 한잔…….]
[도유: ……좋습니다. 오늘 어떠십니까?]
[진우주최고최강위대한형님: 하아…… 저녁에 그림자 길드로 찾아가겠습니다. 술이라도 마셔야지 걱정이 잊혀지겠네요. 정말 형님이 무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의 대화에서는 나에 대한 걱정이 듬뿍 묻어나온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나는 실소를 금치 못하고 중얼거렸다.
그걸 보는 기사들이 하나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다가온다.
기분이 괜찮아 보이는 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저…….”
“안 돼. 돌아가.”
“아직 한마디도 안 했는데요.”
“보나 마나 또 헛소리하려는 거겠지. 내가 너희를 한두 해 보는 줄 아나. 곧 아스티란으로 돌아갈 거니 준비들이나 하고 있어.”
“칫…….”
용기 있게 물어보았던 기사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돌아간다.
그래도 명령은 잊지 않았는지 들고 온 짐이며 무구들을 점검하고 있는 기사단이었다.
나는 그들을 두고 어딘가에 있을 아렐리아를 찾아 나섰다.
그녀의 익숙한 마기를 훑으며 그대로 따라갔다.
“으…….”
도착한 곳은 흐드러진 붉은 꽃들이 가득한 정원이었다.
마계에서만 피는지 처음 보는 형태였다.
장미를 닮은 꽃들이 만개한 곳의 한구석에는 내가 찾던 아렐리아가 있었다.
검은 대리석 테이블에는 와인 열몇 병이 나뒹군다.
그마저도 부족했는지 위스키며 보드카 따위가 섞여 있었다.
보아하니 모두 빈 병이다.
잔도 없이 마시는 그녀의 손에도 연노란빛의 위스키 한 병이 들려 있었다.
“아렐리아.”
“……내가 취했나……. 웬 마왕님 목소리가.”
“취해 보이긴 하다만, 헛것은 아니지.”
아렐리아는 흐린 눈으로 내 모습을 눈에 담으려 애쓴다.
슬쩍 웃으며 그녀의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마왕니임…….”
그녀가 잔뜩 발그레한 얼굴로 헤실 웃는다.
풍겨 오는 입김에는 알코올의 냄새와 단내가 가득했다.
“반마족인 널 그리도 배척하던 공작들을 받아들인 게 원망스럽나.”
아렐리아가 날 원망하든 말든 신경 쓰진 않는다.
같이 지낸 지도 꽤 되는지라 정이 조금 붙었어도, 어디까지나 쓸모 있는 말에 불과할 뿐.
하지만 제일 먼저 나에게 맹세했던 그녀이다.
조금은 그 생각이 궁금해졌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마왕님은 역시 모르시는 게 없군요.”
그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곧 공작들이 설명했겠거니 생각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원망이라……. 음…….”
잠시 말문이 막혔던 그녀는 다시 배시시 웃는다.
“마왕님을 뵈지 못했었다면 그랬을지도……. 지금은 아니에요. 조금 기분이 안 좋긴 하지만 어차피 저처럼 충성을 바칠 이들이니까.”
“그럼 왜 이렇게까지 불쾌해하지?”
“어라? 그러게요…….”
그녀는 작게 입을 벌리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투명한 보랏빛 눈동자에는 내 모습이 비친다.
이윽고 아렐리아는 무언가 깨달은 듯 화들짝 놀라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아!!”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는 계속 묘한 얼굴이다.
그러면서 두 손은 끊임없이 꼼지락거렸다.
“하…… 하하……. 그래요, 그랬어요. 제가…… 그랬군요.”
그녀는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대체 뭔데?”
“……나중에,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언젠가…… 기회가 온다면요.”
이기지도 못할 술을 잔뜩 마시고 취기가 오른 걸까.
그렇지 않아도 발그레한 아렐리아의 얼굴이 점점 터질 듯이 붉어진다.
나는 그 모습이 주변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붉은 꽃과 닮아 있다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