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SSS랭크로 귀환한 사연 78화
“마족들의 소환이라.”
구경꾼이라도 모으려는 셈인가.
하기사 마왕의 싸움은 보기 드문 광경이 될 터였다.
아렐리아의 말대로 마족들을 위한 축제나 다름없었다.
“사실상 말이 제전이지 재판과도 비슷한 것이라서요. 참관인들과 배심원들이라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죄목도 없는데 재판이라니. 좀 다르지 않나.”
“마왕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가 죄 아닐까요?”
아렐리아는 마치 간신배마냥 말한다.
나도 모르게 그건 그렇지, 라고 대답할 뻔했다.
“그래서 저희 공작들이 투표를 합니다. 무분별한 제전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입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있으나 마나 한 규칙이겠지만요.”
“맞아요. 이미 공작 둘의 복종을 받고 있으시니까요. 역대 마왕들을 살펴보아도 전례가 없는 일이죠.”
내가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긴 했다.
말을 곱게 포장해서 펫이지,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다.
주인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데, 그건 자존심 강한 마족들에게는 어려운 일일 테니까.
‘그런데 릴리스야 그렇다 치더라도…… 아렐리아는 왜 나에게 복종의 맹세를 했을까.’
그때는 그게 복종의 맹세인지 몰랐다.
그저 펫으로 받아들여 달라기에 그러라 했을 뿐.
보자마자 마왕님이라며 따르던 것도 그렇고, 무언가 이상하긴 했다.
“마왕님, 어차피 시간 보내는 김에 마왕성이라도 둘러보시겠어요?”
의심의 눈초리로 살펴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해맑기만 하다.
뭐, 아무렴 어떻겠는가.
이미 나와 아렐리아는 한 배를 탄 상황이다.
그것도 자의로는 절대 내릴 수 없는 원양 어선과 다름없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보물 창고가 있다고 했지.”
“맞아요! 몇천 년간 쌓인 물건들이니 보실 만하실 거예요.”
시간이나 죽일 겸 그녀가 안내하는 곳으로 향했다.
릴리스는 자신의 성에 있다 오겠다며 떠난 상태였다.
긴 복도를 구경하며 걷는데, 단둘이 남았다 싶으니 아렐리아가 슬쩍 말을 걸어온다.
“그런데, 정말로 마르바스를 살릴 생각이세요?”
“내가 어떻게 하든 상관없지 않나.”
“그건 맞지만요…….”
그녀는 눈에 띄게 침울해진다.
무언가 사정이 있긴 있는 모양.
“아까부터 이상하다 생각하긴 했는데, 두 공작을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지?”
“사이좋은 공작들은 여태껏 없었을 거예요. 마족들은 뭉치기 힘든 종족이니까요.”
그녀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것이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언젠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오겠지.’
나 역시 크게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분위기를 망쳤다 생각했는지, 허둥대며 재빨리 주제를 돌린다.
“마왕님, 나중에 마계를 한번 둘러보시는 건 어때요? 저기 창 밖에 높은 산 보이시나요? 마신의 기운으로 가득한 산이에요. 마족이 성년이 되다면, 한번쯤 찾아가는 전통이 있죠.”
마치 여행 가이드와 같은 말투였다.
관심은 없지만, 그녀의 노력이 가상해 힐끗 밖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험준한 산이 보인다.
“별 쓰잘데기 없는 전통…… 응?”
대충 훑어보는데 산 끄트머리에 왠 기다란 탑 같은 것이 보인다.
멀리 있지만 하늘을 뚫을 듯 높은 모습은 어딘가 익숙하다.
나도 모르게 무심코 말을 내뱉었다.
“<검은 탑>?”
“네???하…… 하하하. 마계에 <검은 탑>이 있을리가 없잖아요?”
그녀는 갑자기 눈에 띄게 당황한다.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그 태도가 오히려 궁금증을 더했다.
“왜 그런 반응이지?”
“제가 뭘요? 아, 저기 창고가 보이네요!”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거대한 문이 있었다.
더 묻고 싶긴 했지만, 제대로된 대답을 줄 것 같진 않았다.
‘뭐. 우선 지금 중요한건 저게 아니니까.’
“저긴 나중에 찾아가지.”
“네……정말 나~중에요.”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쉰다.
저 반응을 보니 무언가 있긴 한 모양.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가 보물 창고예요!”
도착한 곳에는 마족 몇 명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고 잔뜩 긴장한다.
“영광된 마왕님을 뵙습니다!!”
일제히 인사를 하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서둘러 문을 열어 주는 마족들을 뒤로한 채 보물 창고에 들어갔다.
사방이 번쩍이는 그곳은 마치 드래곤의 레어를 방불케 한다.
“짠! 어때요?”
“많긴 하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놀랐다.
주먹만 한 루비가 발에 챌 정도라니.
우선 보이는 대로 인벤토리에 쏟아 넣었다.
어차피 마왕인 내 성에 있는 물건들이니 어떻게 쓰든 상관없겠지.
“이쪽은 아티팩트들인가.”
벽면에는 온갖 무구가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그중 유난히 사악한 기운이 담긴 검을 꺼내 살펴보았다.
[피에 적셔진 광기의 마검[L급]: 미쳐 버린 고대 마왕의 영혼이 담긴 에고 소드입니다. 오래 사용 시 소유자의 몸을 뺏길 수 있습니다. 공격력 +666%]
‘이건 쓰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공격력은 말도 안 되게 좋지만 사실상 사용할 수 없는 검이나 다름없다.
다른 방어구나 무기 따위도 확인했지만 비슷하다.
하나같이 미쳤다든지 사악하다든지의 설명이 붙어 있다.
“아티팩트들은 마음에 들지 않으시나요?”
어이없는 심정을 숨기지 못하고 물건들을 모두 내려놓았다.
이 이상 살펴보는 것도 시간 낭비였다.
불길함을 잔뜩 머금은 무구들을 보아하니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같겠지.
“이걸 대체 쓰라고 가져다 놓은 건가.”
원수에게나 선물하면 딱 좋은 아티팩트들이다.
받자마자 피 터지는 싸움이 일어나겠지만.
저것들은 그야말로 값비싼 도전장과 다름없었다.
“그런가요? 전대 마왕도 쓰는 모습을 본 적 없긴 해요.”
“그나마 그 정도의 정신머리는 있었나 보군.”
미치지 않고서야 사용할 리가 없지.
혀를 작게 차고 주변을 마저 둘러보았다.
겉모습만은 화려한 아티팩트들 사이에서 유난히 초라한 구슬 하나가 눈에 뜨인다.
‘저건 뭐지?’
가까이 다가가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작게 진동한다.
홀린 듯 낡은 구슬을 주워들었다.
[지나간 기억의 구슬[??급]: 마신의 힘이 담긴 고대의 유물입니다. 사용 시 상대방의 과거 기억 중 일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원하는 시점을 명확히 정해야 합니다. * 상대가 기절해야만 사용 가능.]
[힌트: <마신의 부탁> 퀘스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아티팩트입니다.]
평소라면 쓸모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아티팩트였다.
내 미래라면 모를까, 굳이 남의 기억까지 뒤져 볼 정도로 한가하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이템의 설명을 확인하자마자 뜨는 힌트.
‘대놓고 가져가라 말을 하는군.’
이렇게 눈앞에서 떠먹여 주는데 무시할 이유는 없었다.
마신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바는 확실하다.
분명 마르바스의 과거에 퀘스트의 실마리가 있을 것이다.
* * *
시간이 지나고, 모든 마족이 마왕성에 모였다.
메인홀은 대관식 때 참여했던 인원보다 훨씬 많은 수로 북적였다.
“이게 얼마 만의 <명예의 제전>인지…….”
“저는 직접 보는 건 처음입니다.”
“재밌는 구경거리가 되겠어. 과연 누구를 지목하실까.”
모두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저울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부분 모였나.’
하지만 내가 원하는 자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느긋하게 왕좌에 기대어 주변을 훑어보았다.
쾅-!!
문이 큰 소음을 내며 열린다.
저러다 부서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소리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장식 몇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지 성 아니라고 막가는군.’
수리비라도 청구할까 했지만 너그럽게 넘어가기로 했다.
곧 일어날 상황도 파악하지 못하는 멍청한 놈이니까.
“마왕이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우스운 짓거리를 벌이는군.”
다른 자들보다 머리 몇 개는 큰 덩치의 검은 피부 마족.
크게 솟은 두 뿔의 한쪽은 반쯤 잘려 있는 상태였다.
마르바스는 불쾌감을 숨기지 못하고 큰 보폭으로 걸어온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도 왔나.”
그의 뒤에는 날카로운 눈을 번뜩이는 마족 수백이 있었다.
마치 기선 제압이라도 하려는 듯 기세가 맹렬하다.
그래 봤자 내 눈에는 겁도 없이 나대는 병아리와 다름없었다.
[마족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명예의 제전>의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상대를 지목해 주세요.]
메인홀에 음산한 마기가 맴돈다.
일반적인 마족이 가질 수 없는, 명백한 마신의 힘.
그에 웃고 떠들던 마족들이 모두 긴장하며 나를 쳐다본다.
“나는 마르바스를 지목하겠다.”
“……뭐??”
“지금 마왕님이 북부 공작을 택한 게 맞나??”
“허, 그저 마음에 들지 않는 마족 하나 선택할 줄 알았는데.”
마족들은 당혹을 숨기지 못하고 웅성거린다.
마르바스 역시 본인이 선택될지는 몰랐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마왕이여, 그대가 지금 무엇을 한지 아는가.”
“알다마다.”
‘주제도 모르고 지구 침공을 준비하는 놈, 미리 손봐 주는 일이지.’
먼저 공격해 오기 전에 선공을 받을 줄은 몰랐는지 그는 내 단호한 대답에 더욱 얼굴을 구겼다.
“허나 이 제전은 이유 없이 받아들여질 수 없다. 모르나 본데, 이 신성한 전투는 공작들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이유야 차고 넘쳤지만 그는 여전히 모른 척을 시도했다.
내가 그의 계획을 알고 있을 리가 없다는 확신이 가득하다.
[<명예의 제전>에 마르바스가 선택되었습니다. 마계 공작들의 찬반 투표가 이어집니다.]
“반대한다.”
“겁나나 보군.”
“……이런 터무니없는 놀이에 어울릴 수 없을 뿐이다.”
내 도발에도 마르바스는 인내심을 발휘한다.
분명 이 정도로 깊은 생각은 없다 들었는데.
옆을 돌아보니 아렐리아 역시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놀란 얼굴이다.
“저놈이 왜 저러지? 죽을 때가 된 건가?”
“……제가 생각해도 그는 너무 이상합니다. 언제부턴가 다른 사람처럼 굴더군요.”
릴리스 역시 아렐리아의 말에 동조한다.
표정에서는 착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인다.
한두 해 같이 지낸 게 아닐 텐데, 그녀가 봐도 마르바스가 정상은 아닌 듯했다.
[북부 공작이 반대합니다. 과반수가 넘지 않으면 제전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찬성합니다.”
아렐리아가 슬며시 웃으며 손을 든다.
마르바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다.
“역시 반쪽짜리답군. 그대라면 마왕의 편을 들 줄 알았다. 마족의 수치 같으니…….”
“마족의 수치는 당신이겠지.”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마르바스를 쏘아붙였다.
잠시 눈썹을 꿈틀거리지만 차마 마왕성에서 싸우진 못하겠는지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저도 찬성합니다.”
“릴리스!!”
마르바스는 릴리스의 말에 믿지 못하겠다는 듯 소리를 지른다.
배신감으로 물든 눈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와 잠시 시선을 교환하던 릴리스는 입술을 깨물더니 고개를 돌린다.
[현재 제전을 진행하기 위한 과반수의 표가 모였…….]
“흥미롭군요. 나도 찬성합니다.”
뜬금없이 맑은 미성이 홀에 울려 퍼진다.
마족들 무리 사이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보랏빛의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나른한 얼굴을 한 장신의 사내였다.
그는 화려한 장신구를 잘그락거리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저는 아르모데스. 영광된 마왕님을 뵙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올린 자는 마계 서부를 다스리는 공작, 아르모데스.
애써 참으려 하지만 잔뜩 신이 난 얼굴이다.
“인간의 몸으로 마왕이 되고 나서 처음 하는 일이 <명예의 제전>이라. 이런 분이신 줄 알았다면 진작에 찾아뵐 것을.”
“이 배신자들!! 공작이라는 자들이 하나같이……!!”
마르바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큰 고함을 질렀다.
아렐리아야 그렇다 치더라도 나머지 공작들까지 긍정의 표시를 할지는 몰랐던 모양.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당장이라도 고혈압으로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