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SSS랭크로 귀환한 사연 76화
그녀의 눈동자가 당혹으로 흔들린다.
벨리알이 벌써 미주알고주알 떠벌렸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하긴, 누가 알겠는가.
그가 본인의 값싼 목숨을 위해 비밀 따윈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마계의 사정은 전혀 모르고 계신 줄 알았는데.”
“날 무시하고 있다는 건 잘 알겠군.”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하지만 이야기는 빠르겠어요. 저는 협상을 위해 왔습니다.”
“협상이라…….”
“네, 당연히 마르바스를 저지하시려 하겠죠. 제가 그걸 돕겠습니다. 그러니…….”
“잠깐.”
“……왜 그러시죠?”
그녀는 멈칫하며 의아하게 되묻는다.
당연히 내가 받아들일 줄 알았다는 듯이.
“감히 누구 앞에서 협상을 운운하는 거지.”
아까부터 잠자코 듣고 있었지만 도저히 불쾌함을 참지 못했다.
협상이란 본디 동등한 위치에 있는 자들의 대화.
릴리스가 마계의 공작임은 알지만 그건 내게 별다른 메리트가 되지 못한다.
그 힘이야 뻔한 것이기에.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은가?”
이미 마르바스는 내게 패배했었다.
지금 스킬이 봉인된 상태라지만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런 데다가 그녀를 덥석 믿기는 힘들다.
누가 보증이라도 서지 않는 이상 당연한 일이었다.
‘스파이 노릇이라도 할 셈인가.’
접근한 목적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아무리 내가 마왕이라지만 자존심 높기로 유명한 마족이 선뜻 몸을 낮추었다.
그것도 마계의 공작이라는 자가.
그건 그녀가 원하는 것이 결코 작지 않음을 뜻했다.
“그가 모으고 있는 마족이 몇인지나 아십니까? 아티팩트들은 어떻고요? 아무리 당신이 강하다지만,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채 싸우는 건…….”
나는 말없이 내재된 마나를 증폭시켰다.
응축된 마력은 작지만 빠르게 그녀에게 적중한다.
“컥……!!”
울컥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피를 내뱉는다.
몸도 지탱할 힘이 없는지 바닥으로 향한다.
그렇지 않아도 핏기 없는 그녀의 낯빛은 허옇게 질려 간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다 천천히 마력을 거뒀다.
“허억…… 큽…….”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그녀에겐 억겁과도 같이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숲속에는 릴리스의 헐떡이는 소리만 가득하다.
한참을 쓰러져 있던 그녀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입가를 닦았다.
부들거리는 손에는 핏물이 흥건하다.
“어떻게…… 이렇게 강할 수가…….”
“이 정도도 버티지 못한다니, 마계 공작의 수준이 의심되는군.”
“……제 몸이 평소와는 다르다지만 할 말이 없군요.”
그녀는 비틀거리며 내 발밑으로 기어 온다.
잠시 무언가 고민하던 그녀의 고개가 서서히 떨궈진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부디 제 건방진 태도를 용서해 주세요……. 마신께 맹세하노니, 평생 마왕님께 복종하겠습니다. 제발 마르바스의 목숨만은……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천천히 그녀의 입술이 내 신발에 내려앉는다.
완벽한 굴종.
마계의 공작이 취할 만한 태도는 절대 아니었다.
비굴한 태도에서는 진실 섞인 간곡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나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는 감정이다.
‘아무리 마신을 들먹여 봤자 지금 나에게 굴복한다는 말을 믿긴 힘들지.’
고작 말뿐인 맹세를 믿을 순 없다.
그때 말했던 마신은 사실 마왕 ×신의 줄임말이었습니다, 라고 할지 누가 안단 말인가.
“……뭐?? 동부 공작, 노망이라도 난 건가?”
그녀를 무시하려는데 잠자코 옆에 있던 아렐리아가 경악한다.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듯 버럭 소리 지르기까지 한다.
“네가 정말, 정말 복종의 맹세를 한다고?”
“내 진심을 믿기 힘든가 보군요, 남부 공작. 그럼 직접 보여 주는 수밖에…….”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더니 무언가 중얼거린다.
곧 어두운 마기가 그녀의 몸에서 일렁이며 빠져나온다.
‘설마 공격?’
하지만 그 마기는 곧바로 내 몸에 흡수되었다.
당황해 무언가 하려는 그때.
터질 듯한 힘은 심장 부근에서 소용돌이치더니 금세 잔잔해진다.
마기는 마치 원래부터 나의 힘이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융화되었다.
“정말 미치기라도 한 거야??”
아렐리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하지만 릴리스는 고요하기만 하다.
[새로운 펫을 획득하셨습니다!]
[릴리스[마족]: 마계 동부의 공작. 본디 마신을 섬기는 마신관 출신으로, 각종 마법에 능하다. 알 수 없는 제약으로 지금은 본래 힘을 반밖에 내지 못한다.]
나는 갑작스레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에 당황했다.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고 내용을 천천히 읽어 보았다.
‘맹세라는 게 펫이 되는 거라고?’
그제야 아렐리아의 행동이 이해가 간다.
가뜩이나 내 권속이 된 크레아시론을 떨떠름해하는 그녀다.
그나마 내게 도움이 되고 있으니 망정이지, 처음에는 당장 버리고 오라고 난리를 쳤었다.
그런데 척 봐도 사이가 나쁜 릴리스가 내 펫이 되었으니…….
“그냥 여기서 죽여 주마!!”
그녀는 순식간에 방금보다 더한 마기를 뿜어낸다.
숨길 수 없는 분노가 가득한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하지만 마법이 릴리스의 몸에 닿자마자 경고음과 함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주인이 같은 펫은 서로 공격할 수 없습니다.]
마법은 신기루처럼 부스스 사라져 버린다.
잠시 멍하니 있던 아렐리아는 머리를 부여잡고 소리를 질렀다.
“아악! 짜증 나!!”
“저도 이렇게 될지는 몰랐지만, 일단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당장 맹세를 파기해 버리세요!!”
아렐리아는 나에게 다가와 징징거린다.
정말 끔찍한 일인 것마냥 울먹이기까지 한다.
“흠…….”
내 펫이 된 그녀는 이제 완벽하게 내 권속이 된 상태.
시스템까지 관여한 이상 무르고 싶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제는 정말로 릴리스의 진심을 의심할 수 없다.
“원하는 게 마르바스의 목숨이라고 했나.”
본인의 목숨도 아니고 연인의 목숨을 위해서라니.
한편의 신파극이 따로 없었다.
한호의 회장부터 시작해서 웬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에 자꾸 엮이는 기분이다.
그것도 악역의 역할로.
“그의 계획을 알게 되시면 당연히 죽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맞는 말이긴 하다만.”
“솔직히 말하자면 저도 왜 그가 그런 짓을 벌이는지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뿐이죠.”
그녀는 쓴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 모습을 본 아렐리아는 가소로운 듯 콧방귀를 뀌었다.
“사실 제가 꺼내려는 협상의 조건은 이게 아니었지만요.”
“아까도 말했지만 이번 전투에서 네 도움은 필요 없어.”
“하지만…… 아스티란에서 온 기사라면 어떨까요?”
설마 한스를 말하는 것인가.
날카롭게 그녀를 쳐다보자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얼마 전에 겁도 없이 북부로 온 인간이 하나 있었습니다. 듣자 하니 마왕님을 찾는 것 같더군요.”
“설마 죽였나?”
“그럴 리가요. 보자마자 그자가 마왕님과 협상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깨달았죠. 지금은 제 성에서 보호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결국 북부에서는 한스를 찾을 수 없었다는 소리였다.
허탈한 마음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릴리스를 만나지 못했다면 헛고생을 할 뻔했다.
‘이 자식…… 만나면 바로 한 대 날려 줘야겠어.’
설마하니 때깔 좋게 릴리스의 성에서 지내고 있진 않겠지.
고생한 티가 나지 않는다면 바로 인생의 고달픔을 깨닫게 해 주리라 마음먹었다.
“이제 좀 구미가 당기시나요?”
“들을 만하군.”
“그러니 부디 목숨에는 목숨을.”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숙인다.
조마조마한 심정을 숨기지 못한 채였다.
“글쎄…… 무게 차이가 나는 듯하는데.”
아직까지 마르바스를 살려 주겠다는 확답을 듣지 못한 릴리스는 내 눈치만 본다.
죽이는 것보다는 반죽음 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이 더 피곤한 일이다.
손속에 자비가 없는지라 마르바스를 어떻게 요리할지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죽이는 게 편한데.’
릴리스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그건 내 사정이 아니었다.
이미 내 펫까지 된 상태라 나를 거스를 수도 없는 상태이고.
이리저리 고민하고 있는데 내 머릿속을 퍼뜩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잠깐, 마르바스를 죽인다라?’
[<마신의 부탁>: 감히 마계를 어지럽히는 자의 계획을 파헤치고, 방해하라.
* 숨겨진 성공 조건이 존재합니다. (힌트: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다시금 퀘스트 내용을 훑어보았다.
퀘스트들은 보통 세세하게 조건이 붙기 마련이다.
하지만 마신의 부탁은 간단하기 짝이 없었다.
‘파헤치고, 방해하라.’
뒷말을 계속 곱씹었다.
마계를 어지럽히는 자라는 건 마르바스일 터.
하지만 어딜 봐도 죽여 없애라는 말은 없다.
“아렐리아, 마신이 자비로운 성격이던가?”
릴리스와 눈싸움을 하고 있던 그녀가 내 말에 의아한 듯 대답한다.
“그럴 리가요. 물론 직접 뵌 적은 없다지만, 전설에 따르면 잔혹하고 무도하기로 유명하시죠. 그야말로 피와 전투를 사랑하는 분이시니까요.”
“마계의 질서를 방해하는 자에게는 더더욱 그렇겠고.”
“그런 자가 있다면, 차라리 죽여 달라고 빌겠군요.”
그녀는 음습하게 웃는다.
상상만 해도 재밌는 일이라는 듯 즐거워 보이기까지 한다.
피를 보는 걸 주저하지 않는 성격 파탄자 마족다웠다.
‘그래, 마족은 원래 성격들이 다 저 따위지. 마족을 보살핀다는 마신은 더 말할 필요도 없겠고.’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마신이라고 다르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방해라는 완곡한 표현을 쓸 정도라…….
드디어 생각을 정리하고 릴리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긴장하며 내 입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르바스는 죽이지 않겠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릴리스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다.
계속 고민하고 있던 나를 봤기에 혹시나 내가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까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그래, 하지만 사지가 멀쩡할 거라고 장담할 순 없겠군.”
“으음…….”
그녀는 뭔가 고민하며 눈알을 굴린다.
이윽고 어느 정도 결정을 내렸는지 나를 향해 웃어 보인다.
해맑기까지 한 미소였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더 좋네요.”
릴리스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미친 대답이 나왔다.
잠시 얼이 빠져 버렸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허튼 짓거리는 못하겠죠. 성격이 워낙 불같은지라. 이제 좀 얌전해질 때도 되었다고 생각해요.”
마족치고 유약해 보이는 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곧바로 그녀에 대한 편견을 철회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하여간 마족들 성깔은 답이 없군.’
릴리스도 결국은 제정신이 아닌 마족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