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SSS랭크로 귀환한 사연 28화
크레아시론에게 복종의 맹세를 받은 후 잠시간 그와 대화했을 때의 일이었다.
“반드시 아스티란에 돌아갈 방법을 찾아 주지. 가서 왕의 무덤을 짓밟든지 마음대로 해.”
차원 이동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었지만 게이트와 <검은 탑>은 결국 아스티란의 일부분.
확신을 갖기까지는 조금 걸렸지만 알아낸 이상 어렵긴 해도 불가능하리라 생각되지 않는다.
“옥새를 파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만약 미궁 밖 아스티란에 갈 수 있다면…… 그의 무덤보다는 우선 제 딸의 무덤을 찾아가고 싶군요.”
그는 턱뼈를 덜그럭거린다.
마치 미소를 지어 보이려고 하는 것처럼.
“사실 미궁에서만 지내며 서서히 감정이란 게 사라지는 듯했는데, 이상하게 주인님께 맹세를 한 직후 점점 이성이 돌아오는 기분입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리치라곤 하나 인간의 몸으로 흑마법을 감당하긴 힘들어요. 하지만 마왕님께서 거둬 주시면서 마기를 잘 흡수할 수 있게 되었죠. 아마 시간이 지나면 더 높은 등급의 아크 리치로 변할 거예요.]”
갑자기 미쳐 날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가.
덕분에 걱정이 줄어들었다.
그러다 문득 크레아시론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몇백 년간 옥새를 지킴으로써 테론 왕의 자손들이 정당한 왕이 되지 못하게 방해하고, 결국 그의 후손은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의 복수가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복수는 달콤하지만 결국은 허무함밖에 남지 않는 것.
“나야 괜찮은 수하를 얻어서 좋다지만, 평생 동안 지켜 왔던 목표를 잃었는데 계획이라도 있나.”
“글쎄요…… 우선 아스티란에 돌아가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만. 그 이후 쓸모를 다 했다 생각하셔서 옥새를 파괴한다면 딸의 무덤 옆에 묻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시스넨 제국이 어느 정도 공고히 자리 잡고 난다면 그때는 옥새가 필요 없어질 것이다.
그때라면 라이프베슬을 부수고 그가 원하는 바를 이뤄 줄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간단한 문제였지만…….
‘죽음을 피하기 위해 리치가 되고, 이제는 죽기 위해 누군가의 수하가 된다라.’
리치를 대놓고 끌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니 분명 은신처를 하나 만들어 숨겨 두어야 할 것이다.
물론 펫창에 들어온 이상 펫 전용 아공간에서 대기시킬 수 있지만 호기심에 한번 다녀온 아렐리아의 말로는 그곳은 먼지 하나 존재하지 않는 공허 그 자체.
다시는 들어가지 않겠다며 질색팔색을 하며 난리를 피워 댄 터라 기억에 박혀 있다.
골렘이라면 모를까, 생각과 사고가 가능한 생명체에게 못할 짓일 터.
‘결국 아무도 찾지 못하는 장소에 처박아 둬야 한다는 소린데…….’
멀쩡한 사람도 그런 곳에 수십 년간 가둬 놓으면 미쳐 버릴 것이다.
이제야 미궁을 나왔더니 또 다른 미궁에 갇혀 있는 셈이었다.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약간의 안타까움이 생긴다.
“……소일거리라도 마련해 주지. 원하는 것이라도 있나?”
“음, 그런 걸 잊고 산 지가 한참 되어서 뭐라 말씀드릴지……. 아, 황궁에서 일할 때 마법 물품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긴 했습니다. 쑥스럽지만 그때 당시 연금술과 마법 물품 제작으로 저를 이길 자가 없었습니다.”
마법사들은 보통 연구형과 전투형으로 나뉘는데, 그중 전자였나 보다.
정 없으면 뜨개질이라도 시키려고 했는데 그것보단 훨씬 나은 취미였다.
“그래, 아스티란으로 돌려보내 주기 전까지 즐길 만한 충분한 연구 환경을 마련해 주겠다.”
“그렇게까지 신경 써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연구에 열정을 쏟을 수 있게 되었군요.”
* * *
‘필요한 마법사는 크레아시론을 하나 추가하는 정도면 되겠군.’
어차피 주구장창 마법 물품이나 만들게 할 예정이었으니 불만은 없으리라.
8서클의 마법사니 웬만한 물건들은 모두 만들 수 있겠지.
턱없이 마법사가 부족한 상황에서 그 정도면 훌륭한 인재였다.
‘그럼 마법사는 해결되었고, 이제 남은 건 마법 재료들인가.’
“일단 지금부터 게이트에서 나오는 마법 재료들은 협회 측에서 모두 구매하는 것으로 해야겠군요.”
“여태껏 마탑과 연금술사들이 아닌 이상 필요가 없어 판매처도 적었는데, 그 정도면 헌터들도 충분히 납득할 것 같습니다.”
“하…… 그래도 이 많은 재료를 어느 세월에 모을지…….”
모든 생각을 마치고 아직도 열띤 토론 중인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건 아마 내가 어느 정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진 헌터님이요? 혹시 게이트에서 얻으신 마법 재료들이 있으십니까? 몇 개라도 좋으니 협회에 팔아 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시장에 풀려 있는 모든 재료를 구매한다 해도 부족할 테니까요.”
“필요한 재료의 목록을 정리한 문서가 있나?”
내 말에 김현도 팀장은 얼른 산처럼 쌓여 있는 문서를 뒤져 보더니 종이 세 장을 건넨다.
마구잡이로 놓은 줄 알았는데 자신만의 정리법이 있긴 한 듯 빠른 속도로 찾아내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여기 있습니다. C급 21종, B급 13종, A급 8종, 그리고 S급 2종입니다. 이 중에 몇 개 정도 보유하고 계신지……. 특히 S급 재료 말입니다.”
다행히 SS급 이상의 재료는 없었다.
뭐, 그 정도 재료가 필요하다면 8서클 이상의 물품일 테니 당연한 건가.
‘푸른 요정풀과 야광 버섯이라…….’
확실히 구하기 힘든 재료들은 맞았다.
내 인벤토리에도 모두 합쳐 30개 정도밖에 없으니.
하지만 그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잠깐 어디 좀 다녀오지. 기다려.”
빠르게 사무실 밖을 나왔다.
가능하면 보는 눈이 없으면 좋을 텐데…… 고민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다 통화를 위한 작은 방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았다.
비어 있는 곳을 찾아 들어가니 의자 하나와 테이블 정도만 있는, 2평 남짓한 심플한 공간이 보인다.
문을 잠그고 인벤토리를 열어 생각하고 있던 아이템을 바로 찾았다.
[변화하는 공간[L급]: 사용자가 원하는 임의의 공간을 제공합니다. 단, 이지가 있는 생명체와 SS급 이상의 아이템은 포함시킬 수 없습니다. * 크기: 5×5km * 최초 1회 등록한 공간으로 고정됩니다. 이후 공간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이렇게 빠르게 사용하게 될 줄이야.”
변화하는 공간을 손에 쥐고 다른 아티팩트를 발동시킬 때처럼 마력을 불어넣었다.
네모난 큐브 모양의 변화하는 공간이 작게 진동하더니 주변이 어두워진다.
[변화하는 공간을 사용합니다.]
[원하는 공간을 설정해 주세요.]
“현존하는 모든 C급부터 S급까지의 마법 재료들로 가득 찬 곳.”
[현존하는 모든 C급부터 S급까지의 마법 재료들로 가득 찬 공간이 맞습니까? 한 번 설정한 후에는 바꿀 수 없습니다.]
“맞다.”
[확인되었습니다. 요청된 사항에 적절한 공간 도출 중…… 도출 완료.]
[요구 사항에 맞는 공간이 제공됩니다. 사고를 할 수 있는 종족에게 얻을 수 있는 재료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예: 인어의 눈물, 요정의 가루 등.]
[스킬이 추가되었습니다.]
[변화하는 공간의 문[L급]: 변화하는 공간으로 이동 할 수 있는 문이 생깁니다. 퇴장 시 문을 이용하면 마지막에 있었던 곳으로 이동합니다. 단, 소유자와 권속만 사용 가능합니다. 24시간 동안 3번만 이용 가능합니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스킬 하나가 추가되었다.
하루 세 번이라는 제한이 거슬렸지만 어차피 그렇게 자주 오갈 일은 없을 테니 상관없겠지.
모든 준비가 끝났는지 주변 환경이 빠르게 변화한다.
어느새 아무것도 없던 공간은 푸른 초원으로 바뀌었다.
기분 좋게 사각거리는 느낌에 발밑을 보니 잡초가 있어야 할 곳엔 온갖 약초가 즐비했다.
그중 하나를 뜯어보니 약방의 감초마냥 연금술에 빠져서는 안 되는 마나초였다.
[마나초[C급]: 흔히 찾을 수 있는 마법 재료. 각종 포션에 필수로 들어가야 하는 약초이다.]
조금씩 걸어가 보니 저 멀리에는 높은 산이 보인다.
아마 그곳에는 산에서만 얻을 수 있는 마법 재료들이 있을 것이다.
[변화하는 공간에 지도 기능이 추가되었습니다. 원하는 재료를 검색하면 해당 공간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언제 저기까지 걸어가나 싶었는데 제법 편리한 기능이 생겼다.
우선 지금 서 있는 초원을 훑어 푸른 요정풀을 찾았다.
마나초처럼 발에 차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특이한 생김새 덕에 찾기 어렵진 않았다.
‘그런데 이걸 언제 다 줍지…… 아!’
“크레아시론 소환.”
눈앞에 검은 마력이 몰아치더니 순식간에 크레아시론이 나타난다.
소환이 끝나고 잠시 멈춰 있던 그가 나를 발견하고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주인님, 생각보다 빨리 부르셨군요. 제가 처리해야 할 적이 나타난 겁니까?”
나에게 걸어오던 그는 낯선 풍경을 이제야 발견했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당연히 전장이 펼쳐져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런 적도 없는 평화로운 풍경에 조금 당황한 듯하다.
“그런 건 아니고, 시킬 일이 있다.”
“예? 여기서요?”
“일단 스켈레톤들을 소환해. 등급은 낮아도 되니 최대한 많이.”
“처치할 적이 없는데 스켈레톤을 불러냅니까? 그것도 최대한이라니…… 제 마력이면 그 정도 등급은 천은 넘게 불러낼 수 있습니다. 너무 많은 것은 아닐지.”
천이라…… 생각보단 많았다.
하지만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기에 더욱 잘된 일.
아직도 쭈뼛거리고 있는 그에게 방금 전 들고 온 문서를 던져 주었다.
“이건 마법 재료들이군요. 아, 혹시 스켈레톤이 필요하다는 것이…….”
눈치 빠른 그가 어이없다는 듯 되묻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충 무시한 채 빈 종이를 꺼내 변화하는 공간의 지도를 옮겨 그리기 시작했다.
지도 제작 스킬이 있다면 편했겠지만 대부분의 스킬을 봉인당한 터라 어쩔 수 없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수제작으로 지도를 만들고 있으니 크레아시론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무얼 하고 계신 건지요. 아, 혹시 이곳의 풍경화입니까? 풍경…… 의 표현이 개성적인 것 같아 좋습니다.”
그래, 나 손재주 없다, 이 새×야.
내가 봐도 삐뚤빼뚤한 선은 무얼 표현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래도 계속 꾸준히 작업하니 제법 지도 같은 느낌은 표현된 듯하다.
……어차피 대충 위치만 알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지도다.”
“예?? 지도요??”
완성된 지도를 던져 주니 크레아시론이 펄쩍 놀라서 뛰었다.
빡침을 눌러 참는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으니 그는 그제야 허둥대며 지도를 천천히 살펴본다.
“알아보긴 힘들…… 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표기는 되어 있군요. 그럼 이것들을 모아 오면 되는 겁니까?”
“일단 S급 재료 두 개부터 채집해 오도록. 시간은…… 1시간 정도 기다려 주지.”
“아, 알겠습니다!”
크레아시론은 황급히 많은 스켈레톤을 불러내더니 이리저리 명령을 내렸다.
무기 대신 삽과 호미, 바구니를 들고 후다닥 뛰어가는 스켈레톤들을 보며 풀밭에 비스듬히 누웠다.
토끼 같은 작은 소동물들이 돌아다녀야 할 초원에는 뼈다귀들이 호미질하는 소리로 가득하다.
‘잠깐, 어차피 소환물이니까 계속 일 시켜도 되는 거 아닌가?’
1,000명의 스켈레톤이 쉬지도 않고 일하는, 그야말로 24시간 돌아가는 채집 공장.
2교대, 3교대로 할 필요도 없이 하루 종일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엔 그들을 보호해 줄 노동법도 존재하지 않으니.
그렇다는 건 크레아시론도…….
“크레아시론, 리치니까 잠을 잘 필요가 없지?”
“네, 그렇습니다만…….”
말없이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내 눈빛이 이상하게 느껴지는지 눈에 띄게 당황한다.
“……뭔가 좀 오싹합니다만…….”
“그럴 리가.”
별일 아니라고 말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여전히 어리둥절해 보이는 그가 뼈를 덜그럭거리며 스켈레톤 무리로 사라진다.
그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크레아시론이 마법 물품 만드는 걸 좋아한다고 했으니 그걸 이뤄 주는 게 주인 된 도리 아닐까.’
취미는 하루 종일 즐겨도 부족한 법이다.
뭔가 불안한 듯 계속해서 나를 힐끔대는 크레아시론.
나는 그에게 미소를 띠어 보이며 손을 천천히 흔들어 주었다.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말이다.